몽골은 몹시도 추웠다.
겨울은 영하 30도, 40도를 내려가는 매서운 추위였다.
1999년 몽골은 1960년 또는 70년대 한국 같았다. 과거 사회주의를 지낸 국가여서인지 삭막하고 또 경직되어 보였다.
몽고 반점이라는 공통점이 있어서인지, 한국 사람을 좋아하고 또 형제와 같이 친근하게 느꼈으며, 한국을 '무지개의 나라'(솔롱고스-몽골말로 무지개)라고 불렀다.
징키스칸은 후예들이었지만 내게 몽골사람들은 너무나 순박하고 순진했으며 다정했고 지조가 있었다.
몽골 울란바타르 시내의 첫 인상은, 매우 한국적이었다. 이 말은, 당시 울란바타르 시내에 달리고 있는 차량들 중에 유독 한국에서 온 중고차들이 많았다. 버스, 승합차, 봉고, 택시 등등.. 근데 그런 차량에 버젓히 한국어를 지우지도 않고 그냥 붙여 사용하고 있었다. 예를 들면 시내 버스에 '청량리행', 봉고차에 '삼진물산' 등등 말이다. 또 한국산 화장품이 인기가 있어, 도시 곳곳에 한국 화장품 광고나 입간판등이 붙어 있었고, 내가 사역 했던 울란바타르 대학의 한국어 학과는 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아, 한국어를 배우려는 학생들이 많았다. 아무튼 한국과 몽골이 정말 가깝구나! 라고 피부로 느낄 정도로 울란바타르에서의 한국의 열기가 강력하게 뿜어나고 있었다.
나는 우리 교단 소속의 안교성, 윤순재 선교사 아래 견습 선교사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안교성 선교사(현, 장신대 교수)는 당시 몽골 신학교와 아멘 교회 및 울란바타르 한인교회 담임 목사로 사역하고 계셨고, 윤순재 선교사(현, 주안대학교 총장)는 당시 울란바타르 대학 학장으로 사역하고 계셨다.
나는 두 분의 선교사 밑에서 주중에는 울란바타르 대학교에서 한국어 강사로 사역하고, 주말에는 한인교회와 아멘 교회 사역을 하게 되었다.
당시 몽골에서 한국어 선생으로 학생들을 가르친 경험은 이후 내가 크로아티아 선교사로 자그레브에 와서 한글학교를 설립하고 현지 학생들을 가르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울란바타르 대학에서 경험하지 못했다면 현재 자그레브 한글학교와 어학당의 존재도 불투명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미 10년 후를 내다 보시고, 나를 미리 훈련시키고 경험시키셨다.
그 분의 섭리는 신묘막측하다.
또한 현지 교회인 아멘 교회에서의 사역은 내게 미래 선교사로서 가능성이 있는지 자질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었다.
나는 아멘 교회에서 찬양팀 인도를 하고, 또 성가대를 조직하여 지휘를 하고, 몽골 청년들을 가르치는 사역을 했다.
찬양 사역에서 나는 두각을 나타냈다. 그게 또 그곳에서는 가장 필요한 사역이었다. 난 한국에서 찬양 사역에 관해서는 호된 신고식을 치루고 온 상태였고 그래서 이미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여호와 이레!)
몽골 청년들은 한국의 70.80년대 통기타 유행 시절처럼, 교회 안에서 통기타로 가스펠 송을 불렀고, 젊은 남학생들은 기타를 그렇게 배우고 싶어했다. 나는 기타를 가르쳐 주고, 또 한국 복음송을 같이 부르고 가르쳐 주며...그들과 쉽게 어울릴 수 있었다. 또한 깊은 신앙적 교제를 교회 안에 청년들과 나누게 되었는데, 그들 중에는 지금도 기억나는 할륭, 홀랑, 토야, 을찌, 등이 있다. 당시 할륭을 빼고는 10대, 20대 등의 어린 학생들이었지만, 이젠 모두 성인이 되고, 가장과 엄마가 되고, 또한 몽골 교회의 일꾼이 되었다. 지금도 종종 페이스북을 통해서 소식을 듣고 전하기도 한다.
나는 몽골이 좋았고, 몽골사람을 사랑했으며, 또 내가 선교사로서 자질이 충분이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