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01) 좋은 시와 나쁜 시 - ② 좋은 시의 다섯 가지 요건/ 시인 박태일
좋은 시와 나쁜 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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② 좋은 시의 다섯 가지 요건
첫째,
좋은 시는 무엇보다 좋은 시인으로부터 말미암는다.
좋은 시의 첫째 요건이 이것이다. 시인을 바라보는 눈길에는 크게 둘이 있다.
심리적 시인관과 사회적 시인관이다.
심리적 시인관이란 시인 안쪽에 시인이 됨 직한 특질을 갖추고 있다고 보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보통 사람과 나뉘는 특별한 이로 여겨진다.
사회적 시인관은 이와 달리 시인은 사회 안쪽의 인정기제에 따른 결과라는 생각이다.
이럴 경우 시인은 여느 사람과 다름없다. 다만 시 창작 수련과 발표에 남다른 노력을 기울인 이를 뜻한다.
그가 시인일 수 있는 터무니는 등단 제도나 방식을 거쳤는가 아닌가에 있을 따름이다.
우리 근대시사에서 좋은 시인으로 일컬어지는 이들은 그 삶에서 흔히 특별한 면모를 지닌다.
때로 안타까운 요절이나 열정적 연애와 같은 비장함, 언어 바깥의 선정성으로 겉칠된 삶이 그것이다.
곧 특별한 삶에서 좋은 시가 나올 것이라는 소박한 인과론, 개성론의 틀은
시인 됨됨이에 타고난 각별함을 요구한다.
심리적 시인관을 밀 수밖에 없다.
시작에 대한 즉흥성과 삶에 대한 예외성을 버릇처럼 요구하는 태도가 이로부터 말미암는다.
그러나 좋은 시인은 세상의 그러한 조급한 기대와는 달리 끊임없이 시와, 말글과 다투는 이다.
그의 작품이 좋은 시 자리에 오를 개연성은 그만큼 크다.
둘째,
언어를 중심으로 좋은 시의 요건을 따져 봄 직하다.
시는 두말할 것도 없이 숱한 말글 관습 가운데 하나다.
그러면서 말글의 특이성과 가능성을 극대화하려는 갈래다.
드높은 언어 관습이자 진지한 말놀이인 셈이다.
이 점을 형식주의자의 생각에 따라 일탈이라 부르든 비틀기라 부르든 시가
언어라는 조건을 받아들이는 한에서는 달라지기 힘든 자질이다.
따라서 좋은 시는 말글의 진폭이 넓고, 다채롭게 활용 가능성을 보여 준다.
그런데 무엇보다 언어는 자민족 중심적이다. 말글 활용의 가능성이란 바로 민족어의 가능성과 다르지 않다.
백 년 남짓한 근대 시기 동안 우리시는 노래로 불려졌던 노래시가 아니라 눈으로 읽는 문자시로서
한글의 용례를 키우고 쓰임새를 새련시킨 공이 크다.
이 점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근대시의 전통이다.
좋은 시는 이러한 전통을 따르면서도 그것을 더욱 변화, 발전시킨 경우다.
따라서 우리 근대의 제국 언어였던 왜식 한문 투에 갇혀 있는 시는 좋은 시가 되기 힘들다.
영어 공용이론이 솔솔 피어나고 있는 오늘날 눈길에서 볼 때도 이 점은 달라짐이 없다.
글말이란 입말과 달리 본디부터 지식계층, 엘리트문화물이다.
따라서 겨레 구성원과 더불어 함께하고자 하는 언어로 나아가지 못하는 시는
특권문화로 떨어질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근대 민족국가의 민족다움을 재는 주요 상수 가운데 하나는 말할 것도 없이 말글의 동질성이다.
그러나 오해 없기 바란다.
이 말의 요체는 추상적인 정치 이념의 동질성이나, 섣부른 민족혼과 같은 명분론과는 거리가 멀다.
그것은 민족 구성원이면 누구나 손쉽게 다가가서 생각과 느낌을 주고받을 수 있는 언어여야 한다는 뜻이다.
담긴 뜻의 깊고 얕음이나, 언어 기법의 각별함과는 관계없는 일이다.
셋째,
표현에서 본 좋은 시의 요건이다.
시는 무엇보다 언어의 긴밀성을 요구한다.
따라서 수필이나 소설과 달리 압축과 생략을 바탕으로 삼는다.
시는 줄여 써서 많이 말할 수 있는 길을 따르고, 소설은 늘여써서 적게 말하는 길을 따른다.
이 둘의 차이를 힘껏 맞세운 자리에 시와 소설의 관습적 정당성이 있다.
시가 소설에 가까워져 번잡하고 느슨해지면 더는 오롯한 시의 자리를 내세우기 힘들다.
거꾸로 소설이 시처럼 줄이고 다듬어 말과 말 사이의 긴장을 애써 키우고,
생각을 건너뛴다면 더는 소설 자리를 고집하기 힘들다.
그런데 압축과 생략이라는 지극히 평범한 시적 요건이 뜻하는 궁극은 어딘가?
그것은 다름 아니라 반복불가능성, 곧 다르게 쓰일 수 없을 상태에 이른 표현이 그것이다.
이 점이 진지한 말놀이로서 시 창작의 즐거움이고,
시가 다른 갈래와 맞서 끊임없이 살아남을 수 있었던 터무니다.
좋은 시란 바로 이미 알려진 표현과 다른 반복불가능성을 실천하고자 한 작품이다.
다르게 쓰일 수 없을 상태로 나아가기 때문에 그 말에 힘이 실리고,
그 뜻에 환한 자장이 피어나고, 그 주체인 시인에 대한 외경이 솟아난다.
그렇다면 이 점은 어떻게 확인하는가. 간단한 길이 있다.
해당 시의 특정 부분을 다르게 고쳐 보면 알 일이다.
이 경우 고친 상태가 본디 시보다 더 좋아 보인다면 그 본디 시는 서툴고 나쁜 시다.
거꾸로 다른 이가 손을 대었을 때, 오히려 고친 시의 상태가 더 나빠 보이는 경우도 있다.
이를 때 본디 시는 다르게 고쳐 쓰기 힘든 상태, 곧 반복불가능성에 가까이 다가선 경우겠다.
이른바 좋은 시인 셈이다.
아무리 명망을 얻고 있는 시인이라 하더라도 다르게 쓰일 수 없을 상태에 이르고자 하는 열정과 노력,
그것이 일깨워 주는 표현 가치를 포기한다면 하루아침에 범상한 시인으로 떨어지고 만다.
넷째,
작품 내용에서 볼 때 좋은 시의 자질에 대해서는 이미 낯설게 하기라는 널리 알려진 개념이 있다.
이것은 단순히 형식주의자의 언어 일탈에만 걸리는 일이 아니다. 그
것은 세계 개방, 곧 주류 이념에 대한 문제 제기나 대거리라는 적극적인 뜻을 지닌다.
손쉽게 이를 수 있는 생각이나 느낌,
이미 타자에 의해 만들어진 기지의 세계를 겨냥한 시는 좋은 작품이 되기 힘들다.
널리 승인된 작품 내용이나 문화 관습에 가까이 빌붙으려는 유행시,
특정한 내용만을 부풀리는 키치(kitsch)시와 같은 것이 본보기다.
사랑을 하며 산다는 건
생각을 하며 산다는 것보다
더 큰
삶에의 의미를 지니리라.
바람조차 내 삶의 큰 모습으로 와 닿고
내가 아는
정원의 꽃은 언제나
눈물빛 하늘이지만,
어디에서든 우리는 만날 수 있고
어떤 모습으로든
우리는 잊혀질 수 있다
사랑으로 죽어간 목숨조차
용서할 수 있으리라
시인이라는 이름을 내걸고 있는 어떤 이의 작품 가운데 한 자리다.
‘사랑을 하며 산다는 것’에 대한 깨달음을 드러냈다.
겉만 번지르르하고 막연한 생각에 머물렀다.
키치시라 일컬을 만큼 감상성도 두드러진다.
이런 작품의 가벼움과 얄팍함 속에는 삶에 대한, 사랑에 대한 범상한 감각만이 담겼을 뿐이다.
좋은 시는 적어도 손쉬운 고정관념으로부터 매몰차게 등을 돌리고 서려는 작품에 붙일 수 있는 이름이다.
다섯째,
독자 쪽에서 좋은 시의 요건을 살필 수 있다.
압축과 생략, 곧 줄여서 말하는 방식인 시는 읽는이 쪽에서 볼 때 늘여서 읽는 일을 근본 방식으로 한다.
늘여서 읽기 어려운 시, 뻔하고 빤하지 않아 한 번에 쉽게 뜻이 잡히지 않는 시,
그것이 무엇인가를 거듭 고심하게 만드는 힘이 큰 작품이 좋은 시일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거니와 적게 말하면서 많은 생각과 느낌을 일깨우고자 하는 역설적 갈래의 시다.
그런 까닭에 독자의 거듭 읽기와 독서시간의 지연, 곧 소급적 독서는 필연적이다.
좋은 시란 이렇듯 읽는이를 그 속으로 끌어들이고, 그들을 자기 안에 묶어 두는 힘이 강한 작품인 셈이다.
그리고 그 힘은 여러 방향에서 작용한다.
작품 안일 수도 있고, 작품 바깥일 수도 있다.
문학교육이나 매체의 관심, 문학상과 같은 문학사회의 제도적 장치는 바깥 요인이다.
대중시에 가까울수록 독자들은 작품 바깥에 의한 규정력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한다.
시 읽기는 문화 훈련이다.
일상언어 활동과는 길이 다르다.
세련된 언어 관습으로서 읽기 훈련과 그로 말미암은 내면화는 필수적이다.
읽는이에게 손쉽게 읽히지 않는 시란 그 훈련에 거듭 이끌어 들이는 힘이 강한 시다.
그들이야말로 특정 세대 독자나 당대 현실독자가 아니더라도 마침내 문학사나 문화 자체가 독자가 되는 시,
오래도록 독자사회로 열려 있는 좋은 시로 거듭난다.
< ‘시의 조건·시인의 조건, 박태일 비평집(박태일, 케포이북스, 2015)’에서 옮겨 적음. (2021. 3. 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01) 좋은 시와 나쁜 시 - ② 좋은 시의 다섯 가지 요건/ 시인 박태일|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