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03) 시를 쓰는 세 단계 - ① 첫 번째, 시의 종자 얻기/ 시인 이형기
시를 쓰는 세 단계
티스토리 - http://balgil.tistory.com/1127/ 앙증맞은 이름을가진 야생화
① 첫 번째, 시의 종자 얻기
영국의 시인이자 시 이론가인 세실 데이 루이스는 《젊은이를 위한 시》라는 책에서
시를 쓰는 과정을 세 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첫 번째는 ‘시의 종자’를 얻는 단계이다.
루이스가 그것은 어떤 감정, 어떤 체험, 어떤 관념, 때로는 하나의 이미지이거나
한 줄의 시구일 수도 있다“고 말했던 종자는 앞에서 설명한 ‘시를 쓰는 계기’에 해당한다.
그러니까 종자는 그 당자가 결코 가볍게 흘려버릴 수 없는 심리적 충격, 달리 말하면
‘아, 이거 시가 되겠다’ 싶은 인상적인 느낌을 말한다.
일종의 영감이라 할 수도 있다.
루이스는 이 종자를 반드시 기록해두라고 권고한 다음,
기록한 뒤에는 대부분의 시인들이 그 사실을 잊어버리게 된다고 덧붙였다.
잊어버리게 된다는 뒤의 말은 누구나 꼭 그렇게 잊어야만 한다는 뜻이 아니라,
그 종자를 당장 한 편의 시로 만들려고 서두를 필요는 없다는 정도의 뜻이라고 새겨두는 게 좋다.
아닌 게 아니라 종자 하나를 붙들었다고 해서 그것을 바탕으로 당장
한 편의 시를 쓰려고 서두르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상상력이 종자 자체에만 얽매어 표현이 단조롭고 내용이 빈약한 시가 되기 쉽다.
그런 사태를 막기 위해서는 조급증을 부리지 말고 느긋하게 기다릴 줄 아는 힘을 기를 필요가 있다.
물론 예외가 없는 것은 아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시의 종자를 붙든 순간에 펜을 들어 단숨에 한 편의 시를 써낼 수도 있다.
즉흥시는 그런 예 중 하나이며,
그런 즉흥시 중에서도 훌륭한 작품을 찾자면 적잖이 찾아낼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실패율이 높고 성실성 면에서도 문제가 되는 방법이다.
때문에 대가나 중진이라 불리는 시인들도 부득이한 경우가 아니면 시를 그렇게 쓰지는 않는다.
그러니 시를 쓰려는 사람들은 더욱 삼가야 할 방법이다.
시의 종자를 기록해 두고 다음에는 그것을 잊어버린다는 루이스의 말 속에는
이러한 즉흥시적 방법에 대한 경계도 아울러 함축되어 있다.
그렇다면 그렇게 잊어버릴 바에야 기록은 또 무슨 소용이냐 할 법도 하지만,
참으로 중요한 것이 바로 기록이다.
만일 시의 종자를 기록해두지 않으면 아무리 기억력이 좋은 사람이라 해도
생활의 이런저런 일을 겪는 사이에 조만간 완전히 까먹게 된다.
완전히 까먹는다는 말은 그 종자가 도저히 싹터서 자랄 수 없는 멸실(滅失) 상태가 된다는 뜻이다.
루이스가 말하는 잊어버림은 그러한 멸실 상태가 아니라
시인의 무자각적 의식 속에 그 종자가 간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리하여 그 종자는 시인의 의식 속에서 조금씩 부풀어 언젠가는 싹을 틔우게 된다.
기록은 이러한 시 종자의 생명력을 보증하는 비망록이다.
나는 그러한 기록의 좋은 표본 하나를 간직하고 있다.
나의 것이 아니라 고인이 된 박목월 시인의 것이다.
박목월 평전 《자하산 청노루》를 쓸 때 유족한테서 얻은 노트에는 목월이 초기에 쓴 시들의
여러 종자들이 기록되어 있었다.
초기인 만큼 물자가 귀한 일제 말기였는데도 불구하고 목월은 고급 아트지로 된
노트에 연필로 《청록집(靑鹿集)》에 수록된 시에서 찾아볼 수 있는 여러 구절이나
이미지들을 한 장에 한두 줄씩 단편적으로 기록해 놓았다.
그것을 보면 《청록집》의 목월 시들이 모두 그 노트에 적혀 있는 종자 성장의 결과라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이처럼 일단은 잊어버리게 되더라도 언젠가는 그것이 싹트고 자랄 수 있게
시의 종자를 확실히 붙들어두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가 기록이다.
<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01. 3. 7.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03) 시를 쓰는 세 단계 - ① 첫 번째, 시의 종자 얻기/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