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년 농민신문 신춘문예 / 봉윤숙
장독대가 활짝 피었다 / 봉윤숙
8월의 뒤란은 출출하다
태양이 볼륨을 높이다가
긴 치맛자락 끌고 내려오면
슬픔도 허기 채워 가라앉고
그 반대쪽으로 풀벌레 소리가 화창하다
소란은 발가락을 꼼지락거리게 한다
그러나 나의 발걸음을 재촉하진 말자
살금살금 고민하며 다가오는 잎새
그 잎사귀 몇 잎 입에 물면
바람의 손가락도 짭조름해진다
빨랫줄 옷가지들이 바람을 몹시 귀찮아한다
옷가지들에 쫓겨난 바람이 장독대를 드나들며
뒷짐 지고 하늘바라기를 하거나
기어오르는 담쟁이 넝쿨 담벼락에 주저앉거나
풍경 속으로 그림자를 흐느적거리며 사라지게 한다
땡볕이 넓적해지면 계절이 새롭게 열린다
빛들도 숙성되며 바스락거리는 동안
내 인생의 무늬도 옅어지는 것은 아닌지
찬란한 정오
장독대에 나를 활짝 펼쳐 놓는다
[당선소감] “좋은 작품으로 모든이에게 보답할 것”
가장 가까운 것이 가장 먼 것이다. 시란 그런 것일까.
순방향이거나 역방향이거나 시신경이 녹아 있는 곳, 출혈과 응고가 반복되었다.
소란을 앓던 두통이 머무르는 곳마다 폭설이 내렸다.
앞으로 더 나아가지도 그렇다고 뒤로 물러설 수도 없이 갇혀 살았다,
아주 오랫동안.
낮은 곳, 미약한 부분, 아래의 심정으로 생각하고 보려 했지만 눈은 항상 위로 치켜 떠 있었다.
그것이 문제였다. 시를 문지르던 손바닥을 펼쳐보면 껍질만 자글자글하다.
연약한 곳에서도 단단한 한 세상이 여물고 있을 것이다.
좁혀지지 않던 간격이 두근두근 싹을 틔운다.
무심함이 오래되면 범람하는 걸까. 기우뚱거리는 불안을 발굴해준 이브의 선물.
부족한 작품을 뽑아주신 심사위원들께 고맙습니다. 좋은 시로 보답하겠습니다.
제 시의 앞 계절, 강형철·전기철·김영남 선생님 진심으로 고맙습니다.
벌써 저만치 앞서가신 문우님들, 뒤따라 가겠습니다.
또한 저를 우뚝 서게 만들어주신 농민신문사의 앞날이 활짝 펼쳐지길 바랍니다.
오랜 세월 묵묵히 지켜봐준 신랑, 1월 초에 공부하러 미국으로 떠나는 사랑하는 딸,
나라의 부름을 받게 될 사랑하는 아들, 모두 고맙고 사랑합니다.
미열의 밤이 깊어갑니다. 눈 뜨면 새 날이 우리 앞에 떠오를 것입니다.
[심사평] “공감각적인 비유·상상력 전개 돋보여”
가을 과원에서 잘 익은 싱그러운 햇과일을 고르는 즐거움 또는 아득한 심해에서
영롱한 진주를 건져 올리는 기쁨과도 같았다.
예심을 거쳐 익명으로 제시된 117편(20명)의 응모작 중에서 당선작을 고르는 감회가 그랬다.
응모자들 또한 언제쯤 당선의 영예가 주어져 새해 신춘문예 지면을 화려하게 장식할까
하는 기대와 설렘이 클 것이다.
심사위원 3명이 최종심에 올린 것은 <장독대가 활짝 피었다> <끈> <채비> 3편이었다.
3편 모두 당선작으로 손색이 없었으나 거듭된 윤독과 합의를 거쳐
<장독대가 활짝 피었다>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이 작가의 <산 너머 남촌> <풍경의 삽화> 등 나머지 응모작도 절차탁마를 보이는 고른 수준인 데다
풋풋한 감성과 농촌 정서를 맛깔스럽게 형상화하는 능력을 높이 샀다.
특히 당선작으로 뽑은 <장독대가 활짝 피었다>는 도시 아파트 생활로 사라져가는
‘장독대’라는 객관적 상관물을 내세운 시상 전개와 언어 구사가 신선했다.
시의 첫 연에서는 ‘출출한 8월의 뒤란’으로 햇살이 내려오면 ‘슬픔도 허기 채워 가라앉고’
‘반대쪽으로 풀벌레 소리가 화창하다’라며 전경을 제시하고 있다.
이어서 장독대로 다가오는 ‘잎사귀 몇 잎 입에 물면’ ‘바람의 손가락도 짭조름해진다’
‘옷가지들에 쫓겨난 바람들이 뒷짐 지고 하늘바라기를 하거나’
‘땡볕이 넓적해지면 빛들도 숙성되고 바스락거린다’ 같은 공감각적인 비유와 상상력 전개가 돋보인다.
아쉽게도 당선의 영예를 비껴난 많은 응모자들에게도 격려를 보내며 찬란한 미래를 기약한다.
심사위원 권영민 문학평론가, 김송배 시인, 손해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