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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원명화
삶의 아포리아에서 ‘나’로 서려는 몸짓
-박원명화의 《길 없는 길 위에 서다》(북나비, 2016)
여세주
1.세 가지의 물음으로 접근하기
수필가 박원명화는 총 6권의 수필집을 발간한 바 있다. 《남자의 색깔》(2004), 《시간 속의 향기》(2008), 《개인날의 낭만여행》(2012), 《고목나무에도 꽃은 핀다》(2013), 《길 없는 길 위에 서다》(2016), 《문화 예술의 풍경》(2018)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개인날의 낭만여행》은 기행수필집이며, 《고목나무에도 꽃은 핀다》는 자전수필집의 성격을 지니고 있고, 《문화 예술의 풍경》은 연극과 영화와 미술 등에 대한 감상이나 해석을 수필의 형식으로 펼쳐낸 작품집이다. 몇 가지의 특정 테마에 대하여 집중적인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볼 때, 박원명화는 꼼꼼하게 계획을 세우고 글을 써온 것 같다.
그러나 박원명화의 글쓰기는 수필이라는 장르 범주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여행안내서가 아니라 기행수필을, 자서전이 아니라 자전수필을, 예술감상문이 아니라 감상수필을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수필이라는 영토 범위 안에서 다양한 양식의 글쓰기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어떤 테마의 글에서든 경험세계를 객관적으로 제시하는 데 머물지 않고 해석을 가미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자아 성찰에 이른다. 이런 과정에서 드러나는 풍부한 어휘력과 탄탄한 문장력, 그리고 그것을 바탕으로 펼쳐내는 합리적인 사유의 힘은 박원명화의 글쓰기에서 커다란 권력이다.
수필은 삶의 경험을 문학적으로 형상화하면서 자아를 성찰하는 장르이다. 수필은 작품 외적 세계를 자아화하지 않고 그 자체를 작품 내적 세계로 끌어오는 ‘비전환 표현’을 장르적 본질로 삼는다. 수필의 작품 내적 세계는 작품 외적 세계의 객관적 실체를 있는 그대로 가져온 것이다. 그러나 그 세계를 바라보는 작가의 시각이 전혀 드러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작품 외적 세계인 삶의 현실이 하나의 문학적 언술구조로 편집되는 과정에서 작가의 세계관은 이미 반영되기 마련이다. 그럴 뿐 아니라, 경험세계에 대해 논평을 덧붙이거나 그 의미를 규정함으로써 작가의 가치관이나 정체성을 노골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이에 따라, 여기서 주목해 보고자 하는 바는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작품의 특징적 서술 형태는 어떠한가? 둘째, 수필이 삶의 경험을 직접적으로 다루는 문학일진대 작가는 삶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셋째, 작가는 그 세계 속에서 자아를 어떻게 규정하고자 하는가? 이 세 가지 의문을 풀어보는 데서, 방원명화의 수필세계가 지닌 특성을 살펴보려고 한다. 그의 수필세계를 제대로 조명하려면 여섯 권의 수필집을 두루 살펴야 마땅하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길 없는 길 위에 서다》만을 논의의 대상으로 삼는 까닭에, 박원명화의 수필세계 전반의 특성을 대변하기는 어렵다.
2.경험의 서사적 형상화
수필은 경험과 사유로 이루어진다. 경험이든 사유든, 수필의 진술 방식은 본질적으로 설명에 의존한다. 수필은 경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충실히 설명하면서, 그것에 대한 작가의 생각을 직설적으로 덧붙이는 서술 형태를 취한다. 경험한 사실을 있는 그대로 전달한다는 점에서는 기록성이 강하고, 그 경험을 두고 따지면서 어떤 판단에 이르는 사유 과정을 거친다는 점에서 철학적이고 비평적이다. 따라서 수필의 본질은 교술이다. 그러나 모든 수필이 교술로서의 전범典範을 충실히 따르는 것은 아니다. 그럴 필요도 없다. 작가는 장르 규범에서 자유롭지 못하면서도 끊임없이 그 규범으로부터 새로운 변화를 꿈꾼다. 수필은 이미 서정시적 감흥은 물론이고 서사적 구성과 표현, 그리고 독백이나 대화와 같은 극의 요소도 활용한다.
이러한 일탈은 경험을 전달하는 데서 시도된다. 《길 없는 길 위에 서다》에 수록한 수필에는 교술적 전범에 충실한 작품들과 맞먹을 정도로 서사적 형상화를 꾀한 작품들이 많다. 수필가 박원명화는 경험을 소설다운 진술로 곧잘 풀어낸다는 말이다. 서사적 수필이란 경험한 사실을 설명하여 말하는 것이 아니라 경험한 상황을 묘사하여 보여주려고 한다. ‘러브스토리의 추억’이라는 부제를 달아 놓은 <바람 한줌 속으로>와 <하얀 그림자>는 작품 전체가 하나의 서사구조로 형상화되어 있다. 앞의 작품에서는 ‘나’를 짝사랑하던 직장 동료 p와의 짧은 만남과 인연을, 뒤의 작품은 결혼 생활에 지쳐 있을 무렵 우연히 마주친 P와의 서먹한 만남을 추억하고 있다. 두 작품 모두 시간적 연속성을 지닌 사건을 두고 어느 부분은 생략하고, 어느 부분은 간추려 요약하고, 어느 부분은 충실히 제시할 것인지를 철저하게 고민한 작품이다. 시간적 순서에 따른 서술을 하였는데도 그 완급을 적절히 조절하여 긴장감 있게 구성하였다. 뿐만 아니라, 인물의 캐릭터를 잘 살려내었고 서사적 자아의 미묘한 심리도 잘 드러내고 있다. 수필의 규범에 굳이 가둘 필요가 없는 서사물이다. 서사적 구성과 표현을 이끌어가는 작가의 능력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임에 틀림없다.
경험을 서사적으로 형상화하는 박원명화의 탁월한 솜씨는 여러 작품에서 확인할 수 있다. 작가는 먼 과거의 경험일수록 주로 서사적 방식으로 재구성한다. <유리그릇>, <마지막 세레나데>, <음찔이>, <소중한 유산>, <그리움 한 자락>, <풍뎅이>, <길 없는 길 위에 서다>.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 등이 그런 작품들이다. 물론, 이들 작품에서는 서사적 형상화로 일관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사적 형상과 교술적 담론을 결합시키고 있다.
<길 없는 길 위에 서다>의 경우는 전신마비가 된 채 8년째 병상에 누워 있는 남자를 간병하는 어느 여자의 삶을 이야기하고 있다. 부부의 이야기를 3인칭 전지적 시점으로 전달한다. 서사를 전달하는 중간과 마지막에 작가의 목소리를 잠시 드러내기도 한다. “여자의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위대한 성자를 보는 듯 따뜻한 감동에 젖는다.”, “상상할 수 없는 모진 풍상을 겪느라 여자는 아마도 우리가 모를 병을 앓고 있는지도 모른다.”라는 문장이 그것이다. 이러한 문장이 서사의 흐름을 깨뜨리는 요소이기는 하지만, 경험을 서사적으로 형상화하려고 한 작가의 의도가 읽혀진다. 이 작품은 이처럼 서사적으로 형상화한 경험을 앞에 제시하고 그 뒤에 이 경험에 대한 의미와 자기성찰의 교술적 담론으로 덧붙이고 있다.
박원명화의 서사적 수필 대부분은 경험의 서사적 형상을 먼저 제시하고 그 뒤에 교술적 담론을 첨부함으로써 귀납적 구성을 취한다. 하지만, <소중한 유산>, <그리움 한 자락>, <마지막 세레나데> 등은 ‘교술+서사+교술’, <추억을 마시고>는 ‘서사+교술+서사+교술’의 서술 형태를 취하기도 한다. 작품의 제재로 채택한 경험이 비록 줄거리를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에도 박원명화의 수필은 진술 방식에서 서사적 면모를 보여준다. <옥탑방>이나 <풍뎅이>가 그런 작품인데 상황이나 장면을 매우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가의 묘사력이 돋보인다.
시합은 언제나 대장인 동환이의 신호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낮의 햇살이 머리 위로 뜨겁게 쏟아져 내려도 상관없었다. 오직 승패의 결과에만 몰두했다. 다리 끝이 잘리고 목이 한 바퀴 돌아간 아픔 속에서도 풍뎅이는 훨훨 날아갈 수 있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버둥댔다. 허망한 꿈을 안고 뱅뱅 돌아가는 풍뎅이의 저항은 점점 고통으로 거칠어지고, 그럴수록 아이들의 목소리는 흥분으로 들떠 승패를 재촉하느라 땅바닥을 두드리는 손바닥이 아픈 줄 몰랐다.
-<풍뎅이>에서
3.아포리아의 세계
수필은 곧잘 오랜 세월 동안 잠자고 있던 과거의 경험을 환기한다. 기억의 저편에 화석화되어 있던 경험을 추억하는 데에 익숙하다. 수필이 특별히 과거의 기억을 재현하는 이유가 지나간 삶을 단순히 추억하려는 데 있지는 않다. 그럴 목적이라면 굳이 문학이라는 옷을 입힐 이유가 없다. 즉, 문학의 형식으로 창조하지 않아도 된다. 수필에서 과거를 추억하는 것은 그때 그 시절의 경험을 되살리려는 것도 아니다. 과거의 경험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은 사실 불가능할 뿐 아니라, 그 경험의 의미도 분명하지 않거나 달랐을 것이다. 지난날의 경험은 기억의 환기 과정에서 항상 현재의 관점으로 재구성 되고 새롭게 의미화 된다. 역사도 그럴진대, 문학의 형식으로 재생되는 과거는 당연히 현재적 과거일 뿐이다. 존재론적으로는 과거의 경험이지만 의미론적으로는 현재의 삶을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과거의 경험이 문학적 언어로 편집되는 과정에는 작가의 현재적 가치관이나 인생관이 투영된다. 수필은 일상의 어느 순간을 포착하지만, 그 집합체는 결국 작가가 현재의 시선으로 바라본 삶의 세계이다.
《길 없는 길 위에 서다》의 여러 작품에 반영되어 있는 박원명화의 세계관은 어떠할까. 삶의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가. <길 없는 길 위에 서다>에서 ‘길 없는’이란 “한 치 앞도 알 수 없는” 인생을 은유한다. 한때 건강미를 과시하던 사람이 갑작스럽게 닥친 전신마비로 식물인간이 되어버리는 인생, 그 삶의 길은 막다른 골목을 만난 듯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 같은 아포리아aporia의 상황이다. <옥탑방>에서는 옥탑방에 살았을 때의 가난과 불편을 이야기하면서, 재활용 쓰레기 수거하는 날에 볼 수 있는 물질적 풍요에 대하여 말한다. 가난했던 과거의 삶과 풍요로운 현재의 삶을 대비시키면서 주제를 이끌어내고 있다. 작가는 이 두 시대의 삶 모두에서 당착을 깨닫는다. 가난으로 고단했던 지난날이 그리워지고, 물질적으로 넘쳐나는 세상에 살면서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인식이 그것이다. 가난으로 고단했다면 그립지 말아야 하며 물질적으로 풍요로우면 만족스러워야 하는 게 당연한데 작가의 인식은 그렇지 않다. 이와 같은 세계 인식은 여타 작품에서도 반복적으로 드러난다. 작가에게 포착된 삶의 세계는 이처럼 모순이고 역설이다.
삶의 세계에 대한 아포리아적 상황 인식은 <추억을 마시고 인생을 마시고>에서 더욱 구체적 문제로 드러난다. “문명의 혜택이 분에 넘치는 지금, 밤거리는 눈이 부시게 밝아졌는데도 인심은 더 어둡고 사건 사고는 더 잦아졌다.”고 하는 데서 작가가 바라보는 삶의 세계는 매우 구체적인 모습으로 나타난다. “물질문명의 홍수 속에서 허우적거리고 살면서도 뭔가 늘 만족하지 못하고 산다.”는 <비움의 미학>에서도 그러하다. <라노크로스의 눈물>에서 보여주는 세계도 더 심각할 뿐 크게 다르지 않은 상황이다.
물질의 홍수 속에 살면서도 너나없이 사는 게 힘들고 어렵다고 아우성들이다. 불행한 것도 세상 탓, 못난 것도 부모 탓, 매사 마음속에 나쁜 병을 키우고 산다. 가진 것이 많아도 적절하게 쓸 줄 모른다. 럭셔리한 삶만 추구하다 보니 너나없이 욕심부터 앞서간다. 더 좋은 집, 더 좋은 옷, 더 좋은 음식에 촉각을 곤두세운다. 높은 수익만 쫓다 보니 땀 흘려 노동하는 사람보다 가진 자의 마음은 점차 지치고 허기져 간다.
-<라노크로스의 눈물>에서
물질의 풍요 속에 살면서도 힘들고 어렵다고 아우성치는 세상, 가진 자일수록 그렇지 못한 사람보다 허기를 느끼는 삶의 세계야말로 해결하기 어려운 난제이다. 편안한 삶을 추구한 결과 더 어렵게 되어버린 삶의 아포리아는 오늘의 문제만도 아니다. 인간은 농업혁명이나 과학혁명으로 모든 수고와 시간을 절약했는데도 수렵채집시대보다 더 느긋한 삶을 살지 못한다. 이러한 삶이 마지막도 아니다. 물질적 풍요로움을 성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삶에 대한 또 다른 욕망이 인간의 삶을 무한히 힘들게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욕망이 난무하는 삶의 세계는 <돈에서 돈으로>에서 매우 구체적으로 명시되기도 한다. 살아가는 데 꼭 필요한 신뢰 시스템이면서 인간적 가치를 손상시키는 돈은 삶의 세계를 비정한 시장으로 만든다. 그래서 작가는 돈을 “좋아할 수도 싫어할 수도 없는” 것으로 해석한다. 아포리아적 삶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찌 이뿐이겠는가. 사사롭게는 <그 남자 그 여자>나 <그래 그렇게 사는 거야>에서 말하는 부부관계도 이런 삶의 세계를 말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풍요를 지향해 가는 사회에서 사치품은 어느덧 필수품이 되고, 인간의 또 다른 열망은 끝없는 욕망의 싹을 틔운다. 인류는 안락한 삶을 찾았지만 그 안락함을 누리지는 못한다. 삶의 세계에 대한 박원명화의 인식도 이와 다르지 않다. 그런 점에서 박원명화의 세계 인식은 인류사적 보편성을 지닌다. 수필에서 경험 해석의 보편성 확보는 공감의 넓이와 비례한다.
4.인정과 긍정 사이의 자기성찰
박원명화는 수필작품에서 자신을 어떤 존재로 인식하고 있을까. 수필적 자아는 언제나 페르소나적 갈등을 겪는다. 자기성찰에 이르는 수필에는 두 얼굴의 페르소나가 공존한다. 두 페르소나를, 프로이트의 용어에 기대지 않고 현실적 자아와 이상적 자아라고 해도 무리는 없다.
<길 없는 길 위에 서다>에서는 긴 세월 동안 남편의 병수발을 하며 주어진 본분을 지키고 있는 어느 여인의 희생을 찬미하면서, 정작 작가 자신이 그런 상황에 부딪친다면 감당할 자신이 없다고 고백하고 있다. 작가는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사랑으로 희생을 감내하는 어느 여인의 삶을 긍정한다. 여인의 희생적 삶이 작가의 지향가치라면, 그럴 자신이 없는 작가는 현실적인 자아의 실존이다. 이 작품에서 타자와 자아를 대비시키지만, 궁극적으로 자신의 이상적 자아와 현실적 자아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자신의 페르소나가 지닌 두 가지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셈이다.
어머니의 고달팠던 삶을 이야기하고 있는 <소중한 유산>도 이와 같은 원리로 자기성찰이 이루어진다. 타인에게 늘 인정人情을 베풀고 타인을 배려했던 어머니처럼 살아가려고 했지만, 남을 생각하는 작가의 인정은 “하늘의 티끌 정도”라고 인식한다. 어머니의 그와 같은 삶을 살아가는 것이 자아의 이상적 모습이라면, 그렇게 살아가지 못하는 게 자아의 현실적 모습이다. <강물은 흘러 흘러 어디로 가나>에서는 정반대의 궁지에 놓여진다. 한시도 자신을 위해 살지 못하고 오직 가족을 위해 희생한 어머니를 바라보면서 “절대 어머니처럼 살지 않겠다”던 자아가 “어머니처럼 살고 있다”는 아이러니가 그러하다. <그리움 한 자락>에서 아버지를 대신해 가족에게 사랑을 베풀었던 오빠를 자주 찾아뵈어야 하는데 살기 바쁘다는 핑계로 찾아뵙지 못한다는 자아의 갈등도 자아가 보여주는 양면이다. 부족하고 파손된 자아와 만족스럽고 온전한 자아, 이 둘은 끊임없는 긴장관계를 유지한다. 작가는 이처럼 자신의 현실적인 삶을 인정하지만, 그 삶을 긍정하지 않고 이상적인 삶을 지향하고자 한다.
<문학의 길>에서 말한 바와 같이, 박원명화에게 수필쓰기는 “잃어버린 나를 찾아가는 길”, 즉 진정한 자아를 찾아가는 과정이다. 그의 수필작품들 속에는 그 과정이 녹아있다. 그렇다면, 진정한 자아는 어디에 있는가? 있는 그대로의 모습인가, 있어야 할 모습인가? 아니면 이것도 저것도 아닌 그 무엇인가?
작가라는 이름이 나를 빛나게 하기보다 산술적 연륜만 쌓아가는 것은 아닌지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그러나 나는 믿는다. 엘리엇의 노래처럼 잔인한 사월의 죽은 땅에서도 라일락이 싹을 틔워내고 잠든 땅이 뿌리를 흔들어 꽃을 피워내듯 내 방랑도 언젠가는 아름다운 결실을 볼 날이 오리라는 걸….
-<문학의 길>에서
작가는 자신의 부족함을 인정하되 결코 긍정하지는 않는다. 이상적인 자아를 지향하는 초월적 의지를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현실의 나’이든 ‘이상적인 나’이든 이것은 모두 자아의 모습이다. 작가는 그 사이에서 ‘진정한 나’를 찾고자 한다.
자기성찰은 진정한 자아를 왜곡하기도 한다. 작가의 윤리적 가치와 판단이 부단히 간섭하고 있기 때문이다. 니체는 “자신만큼 자아로부터 동떨어진 것은 없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현실의 나’와 ‘이상적인 나’는 모두 진정한 자아와는 거리가 있는 페르소나일 뿐이다. 폴 투르니에의 생각을 빌리자면, ‘진정한 나’는 그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고 등장인물로서의 배역만 있다. 진정한 자아 찾기는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일 뿐이다. 삶의 과정에서 덧씌워진 껍데기와 가면을 완전히 떨쳐낸 자아의 참모습을 찾아내려는 시도는 환상을 쫓는 것과 다를 바 없다. 라마크르슈나가 말했듯이, 양파를 끝까지 벗겨도 씨를 찾아낼 수 없는 것처럼 자아의 가면을 벗겨나간다고 해서 진정한 자아가 나타나는 것은 아니다. 결국, ‘실제의 나, 진정한 나’를 찾아내겠다는 유토피아적인 꿈을 포기해야 한다. 진정한 자아를 만날 수 있다는 생각은 신기루를 쫓는 것이나 다름없다.
진정한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자아에 대한 탐구가 무의미하다는 뜻인가? 자아 탐구의 과정인 수필쓰기는 쓸데없는 일인가? 그렇지는 않다. 경험하고 느끼고 추구하는 모든 것이 ‘진정한 나’를 만들어내는 요소이다. 감정과 행동 하나하나가 거짓이고 서로 모순되더라도, 그것들은 모두 나를 뜻한다. 박원명화는 긍정할 수 없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인정하되 긍정하지 않는 자아를 발견하고 있다. ‘현재의 나’를 인정하되 결코 긍정하지는 않으면서, ‘이상적인 나’를 지향하려는 초월적 몸짓을 보여준다. 그에게 자아의 정체성은 진정한 자아를 찾아 헤매고 있는 과정의 그 어디쯤에서 만날 수 있을지 모른다. 수필적 자아는 모두 이런 식이다. 수필적 자아의 이와 같은 존재 양상은 박원명화라는 한 개인의 존재이면서 인간 존재의 보편적인 모습이기도 하다.
5.인간주의로 귀착하기
박원명화의 초월적 몸짓은 궁극적으로 물질 만능의 가치관을 배척하고 인정人情과 배려配慮와 같은 인간적인 가치를 지향하는 노스탤지어의 손수건이다. 풍요의 시대에 살면서 빈곤했던 어린 시절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것도 안락의 도시에서 열악한 시골로 돌아가자는 것이 아니라 인간다움의 결핍을 채우고 싶은 귀소본능적 비유이다. 박원명화는 사유 체계의 근원으로서 인간의 존재를 중요시하고 인간다움의 가치를 귀중하게 여긴다. 인정과 인심의 결핍을 비난하고 그것의 회복을 축원한다. 이러한 성향을 휴머니즘이라 부른다.
물질문명이 발달할수록 그것은 인간다움을 파괴하지만, 인간다움을 지키려 한 의식은 파괴하지 못한다. 박원명화는 인간주의를 내세워 자아를 스스로 바꿔야 한다고, 세계는 변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것이 그가 지닌 작가의식의 요체이다. 한마디로, 그의 수필세계는 인간주의를 바탕으로 삼고 있다. 즉, 박원명화의 수필은 인간주의에 뿌리를 박고 삶의 아포리아에 맞서면서 떳떳한 주체로 서려는 몸짓이다.
-《수필미학》 통권22호(2018. 겨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