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애통하는 자여.
애통은 우리가 본능적으로 피하려 하는 감정이다.
사람은 울지 않기 위해 애쓰고, 무너지지 않기 위해 자신을 붙든다.
괜찮은 척, 버티는 척, 아무 일 없는 듯 살아가는 것이 일종의 생존 방식이 되어버렸다.
그래서 우리는 ‘애통’이라는 단어 앞에서 본능적으로 고개를 젓는다.
그것은 약함처럼 보이고, 실패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그런데 예수님의 선언은 우리의 직관을 정면으로 거스른다.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이 문장은 위로가 아니라 선언이다.
감정에 대한 공감이 아니라 존재에 대한 판정이다.
왜 주님은 하필 애통하는 자를 복되다 하셨을까.
여기서 말하는 애통은 단순한 슬픔이 아니다.
그것은 삶이 무너질 때 터져 나오는 감정의 파편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서 자신을 직면할 때 일어나는 존재의 붕괴다.
우리는 대개 상황 때문에 운다.
관계가 틀어져서, 일이 어그러져서, 기대가 무너져서 애통한다.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신 애통은 그 방향이 다르다.
그것은 ‘내가 왜 이렇게 되었는가’가 아니라, ‘나는 하나님 없이 무엇으로 살아왔는가’를 마주할 때 흘러나오는 눈물이다.
한 아들이 있었다.
모든 것을 쥐고 집을 떠났다가, 모든 것을 잃고 돌아갈 곳조차 잃어버린 채 서 있는 사람.
배고픔 때문이 아니라, 더 이상 자신이 설 자리가 없다는 사실 앞에서 무너질 때, 그는 비로소 아버지의 집을 떠올린다.
그때의 마음은 단순한 후회가 아니다.
돌아갈 수 없을 것 같은 곳을 향해 발걸음을 떼야 하는, 존재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애통이다.
그 애통이 그를 집으로 이끈다.
또 한 사람이 있었다.
끝까지 지키겠다고 장담했던 입술로, 세 번이나 주를 부인하고 말았던 사람.
닭 울음 소리가 새벽 공기를 가를 때, 그는 비로소 자신을 본다.
그 눈이 마주친 순간, 더는 숨을 곳이 없어진다.
성경은 그가 밖에 나가 심히 통곡하였다고 말한다.
그 눈물은 실패의 눈물이 아니다.
스스로 무너진 자리에서, 주님 앞에 설 수 없는 자신을 직면한 자의 애통이다.
이처럼 애통은 자기 연민이 아니다.
오히려 자기 중심이 무너지는 순간이다.
스스로 괜찮은 존재라 여기던 착각이 깨지고,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는 존재임을 깨닫는 자리다.
그래서 이 애통은 고통이지만 동시에 은혜의 시작이다.
사람은 이 지점에 이르기 전까지 결코 하나님을 찾지 않기 때문이다.
애통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
무너짐이 아니라 열림이다.
닫혀 있던 존재가 비로소 열리는 순간이다.
이때 사람은 처음으로 하나님을 필요로 하기 시작한다.
이전에는 하나님이 ‘있으면 좋은 존재’였다면, 이제는 ‘없으면 안 되는 존재’가 된다.
애통은 그렇게 하나님을 향한 방향 전환이다.
그래서 이어지는 약속이 중요하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위로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감정의 완화가 아니다.
시간이 지나 괜찮아지는 그런 종류의 위로가 아니다.
이 위로는 하나님이 직접 다가오시는 사건이다.
멀리서 지켜보는 위로가 아니라, 곁으로 오셔서 함께 계시는 위로다.
탕자는 집으로 돌아갔을 때 무엇을 받았는가.
따뜻한 말 몇 마디가 아니었다.
그는 아버지를 다시 만났다.
베드로는 통곡 이후 무엇으로 일어섰는가.
스스로를 다잡아서가 아니었다.
다시 찾아오신 주님의 시선과 부르심이었다.
그들의 위로는 상황의 회복이 아니라, 관계의 회복이었다.
사람은 문제 해결을 위로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위로는 그보다 훨씬 깊다.
하나님 자신이 우리의 위로가 되시는 것이다.
애통하는 자에게 주어지는 것은 ‘좋아진 상황’이 아니라 ‘돌아온 하나님’이다.
결국 이 말씀은 역설이다.
애통해야 산다.
무너져야 회복된다.
잃어버려야 얻는다.
하나님 없이 살아온 자신을 애통하는 자만이, 하나님으로 위로받는다.
우리는 오늘도 애통을 피하며 살아간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가 두려워하는 그 지점이, 하나님이 우리를 기다리고 계신 자리일지도 모른다.
눈물을 흘리는 그 자리에서 비로소 하나님은 가장 가까이 오신다.
그리고 그때, 우리는 알게 된다.
애통은 불행이 아니라, 하나님께로 돌아가는 가장 깊은 길이었다는 것을.
2026.4.17.
푸른숲참기쁨교회 원응길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