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 집에 가는 길>(김보미)
영달은 어디로 갈 것인가 궁리해 보면서 잠깐 서 있었다. 지는 해 속의 겨울바람이 매섭게 불어왔다. 바람이 온 살을 벨 양 커다란 고층 건물 사이를 불어 나갔다. 영달은 양복 옷깃을 여미며 원서가 날라 가지나 않을까 품속으로 한껏 밀착 시킨다. 그는 오늘도 무거운 발걸음을 옮기다 빛바랜 공원벤치에 자연스레 앉았다. 그 옆에는 낯익어 보이는 사내가 영달을 힐끗 바라봤다. 그는 벤치에 우두커니 앉아 담배를 태우고 있는 영달이 쪽을 보면서 다가 왔다. 그는 키가 훌쩍하고 영달이는 짧달막했다. 그는 팽팽하게 불러 오른 007가방을 들고 한쪽 팔엔 구깃한 벼룩시장을 낀 채이다. “오늘도 꽝인가 보군” 영달도 낯익은 40대 후반의 사내였다. 이걸 누굴 엿먹이느라고 하는 수작질인가하는 생각이 들어서 불끈했지만 영달이는 애써 참으며 담뱃불이 손가락 끝에 닿도록 쭈욱 빨아 넘겼다. 사내가 손을 내밀었다. “불 줌 빌립시다.” “그러슈” 담배꽁초를 건네주며 영달이 퉁명스레 말했다. “이번엔 꼭 잘할 수 있을거라 생각했는데......”좀 수그러진 영달이 답답한 듯 내뱉었다. “오늘은 또 뭐가 불만이오?” “다들 뒷돈을 넣어주었던 모양이더라고요...” 그러나 사내는 또 시비조다. “어짜피 뒷돈 넣어줘 봤자지.” “뭐요? 아니 이 사람이!” “거 왜 그러시나. 아 뒷돈 넣어서 될 사람이면 진작됐지! 많고 많은게 회사니 너무 낙심하지 마쇼!” 사내의 말버릇이 시종 그렇게 나오니 드러내 놓기 화내기도 뭐해 영달이는 픽 웃고 말았다. “그런데 노형은 왜 여기 앉아 있소? 나야 갈데라곤 한평 남짓한 고시원 뿐이지만 보아하니 가족도 있을법한데......” 사내가 말없이 무겁게 가방을 추스르며 “집에 가야지”하고 외치듯 말한다. “그렇군요...” 사내가 뒤를 돌며 묻었다. “어디 갈꺼요?” “뭐 오라는데 있겠습니까? 고시원에 가서 눈이나 붙여야죠.”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자, 그럼 난 이제 가봐야 겠는걸.”하고 그는 공원뒤쪽으로 난 길로 접어든다. 영달은 고시원으로 가기는 싫었지만 어디로 향하겠다는 별 뾰족한 생각도 나지 않았고 동행도 없이 술이나 마실 생각을 하니 아득했다. 안되더라도 한번 물어보자 싶어 잰거름으로 쫒아가며 사내를 불렀다. “여보쇼 노형! 보아하니 술 생각 날거 같은데 한잔합시다!” 그는 대답이 없었으나 걸음을 늦췄다. 조금 후에 사내가 처음으로 다정하게 영달에게 물었다. “어떻게, 저녁은 자셨소?” “웬걸요” 영달이 열적게 웃었다. “회사에서 도망치듯 나왔는데요...” “그럼 저쪽으로 가지. 이 길 끝 쪽에 우리 같은 사람들에게 딱 맞는 술집 하나가 있거든...” “그럽시다.” 둘은 말없이 걸었다. 할 얘기를 찾던 영달이 물었다. “노형 통성명이나 하지요, 나는 노영달입니다.” 그러자 사내도 “나는 정가요”하고 대답한다. 자기소개가 끝났지만 그러고 나서는 서로 할 얘기가 엇었다. 무슨 이야길 해도 금방 끊어지고 말았다. 영달은 괜히 술 마시러 가자고 했나 후회하며 걷는다. 불편한 둘이 골목의 끝자락으로 접어들 무렵 저쪽에 작은 체구의 그림자가 눈에 들어온다. 진한 화장을 한 앳된 소녀가 주머니를 뒤적거리다 마침 잘 되었다는 듯 불쑥 말을 건넨다. “불 좀 빌립시다.” 둘은 어의없다는 듯 쳐다본다. 소녀는 한번 눈을 찡긋한다. “왜~ 안들려요? 불 없냐고!” 영달은 그냥 가고 싶었지만 정씨는 아들 생각이 나 한번 묻는다. “얘, 집이 어디니?” “알아서 뭐하게요! 달라는 거나 주지-.” 소녀가 삐죽하며 내쏘았다. “칫! 됐어!” 하며 가버리려는 소녀를 정씨가 잡았다. “이거 왜이래? 나 이래뵈두 미아리고 용산이고 다 겪은 년이라구! 나 잘못 손댔다가 혼나는 수가 있어!” “엄마, 아빠가 걱정하시겠다. 집이 어디니? 밥은 먹었구?” “됐어 그 딴거- 신경쓰지 말라구!” 소녀가 두려운 듯 정씨의 손을 뿌리치고 냅다 뛰어간다. 정씨는 소녀의 발 그림자를 잠시 바라다보았다. 찹찹한 마음으로 돌아선 그 골목에는 영달이 없었다. 괜한 일에 말려들까 귀찮아진 영달은 이미 가버린 모양이었다. 할 수없이 정씨는 서류가방을 무겁게 추켜들고 집 쪽으로 발을 옮겼다. 갑자기 자신을 본체만체할 중학생 아들 녀석과 일에 쪄들어 오거나 말거나 자고 있을 아내가 생각났다. 정씨는 발걸음이 내키질 않았다. 그는 마음의 정처를 잃어버렸기 때문이었다. 어느 결에 정씨는 그 소녀와 같은 입장이 되어버렸다. 그는 다시 발걸음을 돌려 대포집으로 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