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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시아를 뒤흔든 냉전과 열전의 순간들’이라는 부제의 이 책에서는 우리의 고대사를 자국 중심이 아닌, 국제 관계에 비추어 그 의미를 해석하고자 시도한 결과를 보여주고 있다. 최근에는 공무원 시험을 비롯한 각종 국가고시에서 ‘한국사’가 필수 과목으로 채택이 되고 있는데, 많은 이들이 역사를 ‘시험 등을 준비하면서 주요 사건의 연도와 발생 순서를 도표화하고 문제를 풀기 위한 맥락에 치중’하는 것이 현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결국 ‘역사학이 제시하고자 하는 개개인의 삶이나 사회구조적 문제에 대한 논의는 온데간데없고, 암기 노트 속의 의미 없는 숫자와 명칭들만 남’게되는 한계가 명백하다고 하겠다.
바로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의 고대사를 ‘세계사 또는 동아시아적 관점을 통한 넓은 조망’을 통해서 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한 것이 바로 이 책의 기획이라고 이해된다. 현재 학계에서도 역사학자들의 주요 관심 대상은 ‘조선시대’ 혹은 ‘근대’와 ‘현대’에 집중되어 있다고 한다. 아무래도 ‘역사 기록’을 중시하는 학문적 특성으로 인해 ‘사료(史料)’가 가장 풍부한 시대에 연구자가 몰리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당연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가운데 저자는 연구자가 드문 ‘고구려사’를 전공하였고, ‘동아시아라는 역사.지리적 공간을 배경으로 한 고대사 연구를 지속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전체 7부로 구성된 목차에서 ‘발해와 당나라’ 사이의 관계를 다루고 있는 6부와 ‘고려와 원나라’의 문제를 탐색한 7부를 제외하면, 나머지는 5개 항목에서는 모두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시대와 중국과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그동안 삼국시대의 역사가 신라 중심의 서술을 취하고 있는 <삼국사기>를 중심으로 논의되었다면, 저자는 중국과 우리의 역사 기록을 폭넓게 소화하여 고구려 중심의 서술을 취하고 있다고 하겠다.
1부에서는 중국의 장강(양자강) 지역을 기반으로 활동했던 오나라의 손권이 황하를 끼고 세력을 구축한 위나라를 견제하기 위해서 요동 지역의 고구려와 외교 관계를 채택하고자 노력했던 이유를 중심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 과정에서 오나라와 위나라 사이에 줄타기를 했던 고구려의 생존이 가능했고, 위나라가 세력을 키운 상태에서 침략을 당해 고구려가 멸망할 뻔했음을 다양한 기록을 통해서 드러내고 있다.저자는 일국 중심의 서술이 아닌 국제 정세를 고려한 관점에서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 중요함을 강조하면서, 과거에 존재했던 ‘이러한 역사적 사건들을 냉정하게 되짚어 보면서 현재 동아시아 각국 정상들의 웃음 뒤에 숨겨진 치열한 이해타산과 그 밑바닥의 욕망이 무엇인지 이해하는 안목’을 키울 필요가 있다고 제안한다.
2부에서는 백제에 의지하여 중국 제나라와의 수립하려던 신라가 ‘백제 사신의 뻔뻔한 거짓말’에 의해, 마치 신라가 백제의 속국처럼 묘사된 중국 기록의 의미를 살펴보고 있다. 특히 ‘사료는 어떻게 거짓말을 하는가’라는 이 항목의 에필로그를 통하여 역사 기록을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 아니라 냉정하게 그 이면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이어지는 3부에서는 ‘한반도에 있는 중국인 무덤의 비밀’이라는 제목으로 당시 국경을 넘나들며 활동했던 ‘이주민’들의 활동상을 조명하고 있으며, 4부에서는 고구려 장수왕이 북연 왕 풍흥을 죽일 수밖에 없었던 역사적 상황과 그 의미 맥락을 살펴보기도 한다. 특히 5부에서는 ‘영원한 이방인, 고선지의 두 얼굴’이라는 제목으로, 고구려 유민 출신으로 당나라에서 활동했던 고선지라는 인물의 ‘경계인으로서 인간적이면서도 탐욕스러웠던 행적’을 추적하여 서술하고 있다.
6부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 이후 고구려 유민들이 한반도 북부와 요동 지역에 세운 발해가 왕자들의 ‘형제 싸움’으로 인해, 당나라까지 합세한 ‘동아시아 대전’으로 전쟁이 확산되었던 배경과 의미를 짚어내고 있다. 마지막 7부에서는 고려인으로서 원나라에 귀순하여, 이른바 ‘원나라 간섭기’에 원나라의 입장에서 고려의 탄압에 압장섰던 홍씨 일가의 전횡과 이에 맞서 원나라 황실과 결혼 동맹을 체결하여 이를 벗어나고자 했던 고려 원종의 외교술에 대해서 설명하고 있다. 역사 서술에서는 이 당시 ‘원나라의 간섭’에 대해서 비판적으로 평가할 수밖에 없지만, 저자는 어쩌면 고려 문종의 이러한 정책으로 인해 강대한 원나라로부터 고려라는 나라를 지켜낼 수 있었던 것일 수도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저자는 최근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이 일부 사람들에 의해 ‘국력과 영토에만 집착하는 국수주의적 성향의 역사관이나 반지성주의’가 나타나고 있음을 경계하면서, 다양한 자료의 엄밀한 검증과 해석을 통해 ‘넓은 시야로 본 객관적인 역사’를 서술하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아마도 이 책은 바로 그러한 역사관이 투영된 저자의 연구 성과라고 할 수 있으며, 특히 그동안 신라 중심의 삼국시대의 역사를 넘어 중국 사료를 활용하여 고구려의 다양한 역사와 그 의미를 더듬어볼 수 있었다는 점에서 그 내용이 인상적으로 다가왔다. 결국 역사란 어떠한 시각에서 바라보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달리 설명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던 기회였다.(차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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