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기량(金耆良, 1816-1867년) 펠릭스 베드로는 제주시 북제주군 조천읍 함덕리에서 태어났다. 배를 타고 장사를 하던 그는 1857년 2월 18일(음력 1월 24일) 약재와 그릇을 싣고 모슬포로 항해하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던 중 3월 26일 중국 광동 해안에서 영국 배에 의해 구조되었다. 그는 홍콩에 있는 파리 외방전교회 극동대표부로 보내졌고, 그곳에서 휴양 중이던 조선인 신학생 이 바울리노를 만나게 되어 지친 몸과 마음을 회복하면서 신학생을 통해 하느님을 알게 되었다. 이 바울리노에게 교리를 배운 그는 성령강림 대축일인 5월 31일 극동대표부의 부대표인 루세이유(J. J. Rousseille, 1832-1900년) 신부에게 세례를 받았다. 제주 사람으로는 처음으로 세례를 받은 것이다.
1858년 1월 의주를 거쳐 귀국한 그는 고향인 제주로 돌아가기에 앞서 육지에서 페롱(S. Feron, 權) 신부와 함께 있던 최양업 토마스 신부를 만났다. 그를 만난 최양업 신부는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는 그가 겪은 모든 이야기를 들었을 때 참으로 하느님의 무한하신 인자와 섭리에 감탄해 마지않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참으로 기묘한 방법으로 그에게 뿐만 아니라 제주도의 주민들에게까지 구원의 길을 열어주셨습니다. 그 사람의 말과 행동과 교우를 찾으려는 열성을 보면 진실한 사람이고 믿을 만한 사람이며 장차 좋은 교우가 될 사람임을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아직까지 복음의 씨가 떨어지지 않은 제주도에 천주교를 전파할 훌륭한 사도가 될 줄로 믿습니다. 그는 우리와 작별하면서 자기가 고향 제주도에 돌아가면 먼저 자기 가족에게 천주교를 가르쳐 입교시킨 뒤 저한테 다시 오겠다고 말하였습니다.”(1858년 10월 4일자 서한)
김기량은 고향을 떠난 지 1년 2개월 만인 1858년 4월 죽었으리라 생각하고 있던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그는 자신을 반기는 가족과 사공들에게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에 대한 천주교의 교리를 가르쳤고, 1859년 봄에는 육지로 나와 교구장인 성 베르뇌(S. F. Berneux, 張敬一) 주교를 만나 성사를 받기도 했다. 그를 만난 베르뇌 주교는 “이 새 신자는 제주도 사람인데, 총명하고 신앙이 발랄합니다. 집안이 40명가량 되는데, 그는 그들이 모두 개종할 것을 의심치 않고 있습니다.” 하였다.
그는 그 후로도 육지를 오가며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던 중 1865년에 두 번째 난파를 당하여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하여 프티장(Petitjean) 신부를 만나기도 했다. 무사히 귀국한 후 육지로 나와 리델(F. Ridel, 李福明) 신부를 만났는데, 그 자리에서 사공 두 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는 이 무렵 “어와 벗님들아, 순교의 길로 나아가세. 그러나 순교의 길로 나아가기는 어렵다네. 나의 평생 소원은 천주와 성모 마리아를 섬기는 것이요, 밤낮으로 바라는 것은 천당뿐이로다. 펠릭스 베드로는 능히 주님 대전에 오르기를 바라옵나이다.”라는 천주가사를 지어 불렀다.
제주를 복음화하려는 그의 노력은 안타깝게도 1866년 병인박해로 중단될 수밖에 없었다. 박해가 일어난 직후 그는 거제도로 나갔고, 여비를 마련하기 위해 박하유(薄荷油)를 팔러 조선수군의 본부가 있던 통영으로 나갔다가 게섬(현 경상남도 통영시 산양읍 풍화리)에서 “박하유는 천주학쟁이의 물건이다.”라고 말하는 포졸들에게 체포되었다. 통영관아로 끌려간 그는 여러 차례 문초와 형벌을 받았지만 굳게 신앙을 지켰다.
옥에 갇힌 뒤 혹독한 매를 맞고도 네 명의 신자들에게 “나는 순교를 각오하였으니, 그대들도 마음을 변치 말고 나를 따라오시오.”라고 권면하였다. 그럼에도 목숨이 붙어있자 관장은 다섯 명 모두 옥으로 옮겨 교수형에 처하라고 명령하였다. 특히 관장은 그의 가슴 위에 대못을 박아 다시는 살아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때가 1867년 1월(음력 1966년 12월)로 당시 김기량의 나이는 51세였다.
무속신앙의 영향이 강한 제주 지역에 처음으로 믿음의 씨앗을 뿌린 ‘제주의 사도’이자 최초의 순교자인 김기량의 행적을 밝혀줄 사료가 2001년에 대량 발굴되었다. 이를 통해 그의 영세 날짜와 순교 행적을 보다 정확히 밝힐 수 있었다. 특히 박해 시대 한국 순교자 중 세례 날짜가 정확히 밝혀진 것은 처음 있는 일이었다. 이러한 내용은 제주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가 2001년 5월 28일 교구청에서 첫 전체회의를 가진 자리에서 김기량 순교자의 행적 등을 담은 서한 등을 공개함으로써 알려졌다.
김기량에 관한 기록이 있는 편지가 파리 외방전교회의 ‘전교회지’를 통해 알려진 적은 있지만 한국교회사연구소 최석우 신부가 새로 발굴한 루세이유 신부의 편지 4통은 원본이라는 점에서 더 큰 가치를 지니고 있다. 이 자료에 따르면 김기량은 1857년 성령강림 주일에 영세와 동시에 첫영성체를 했다. 1857년의 부활절이 4월 12일이므로 그의 영세일은 5월 31일이 된다. 이에 따라 제주교구는 이날을 성대히 기념할 수 있는 계기를 갖게 되었다.
또 하나 특기할만한 것은 김기량 순교자 일가의 족보인 것이 확실시되는 ‘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도 발굴되어 공개된 것이다. 이는 가톨릭신문사 제주지사장인 이창준 씨가 족보의 존재 사실을 확인하고 양업교회사연구소 차기진 소장과 함께 입수함으로써 빛을 보게 되었다. 족보의 발굴로 순교자의 정확한 생몰 연대와 집안 내력을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제주교구 시복시성추진위원회는 2002년 1월 18일 역사위원회 전체회의를 열고 김기량 순교자의 시복시성 운동을 본격화하기로 결정했다. 이날 회의에서 최석우 신부는 그동안 논란이 있었던 순교자의 세례명이 ‘펠릭스 베드로’일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지금까지는 두 세례명이 김기량 순교자에게 세례를 준 루세이유 신부의 서한 등 곳곳에 함께 나타나 혼란을 일으켰었다. 하지만 알려진 자료들에 따르면 ‘펠릭스’라는 기록보다 ‘펠릭스 베드로’라는 기록이 훨씬 많은 것으로 보아 ‘펠릭스’는 ‘펠릭스 베드로’의 약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고 주장했다.
최석우 신부와 차기진 소장이 역사위원회에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김기량 순교자의 순교지는 경남 통영의 수군통제사영(통제영) 옥터인 것으로 밝혀졌다. 김기량 순교자는 통영 산양읍의 게섬에서 순찰하던 포교들에 의해 체포되어 통제영의 옥에서 교수형 당했다. 현재 이 순교터는 통영시가 복원사업을 진행 중이어서 순교자의 행적 등을 새긴 기념탑 등 기념물 건립을 위한 구체적인 계획을 세워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와 함께 순교 행적에 있어 중요하게 꼽히는 순교 날짜의 경우 1866년 12월(양력 1867년 1월)로 드러났다. “병인치명사적” 18권 등에 따르면 김기량 순교자는 곤장 60대를 맞고도 죽지 않고 살아나자 옥으로 옮겨져 목이 졸려 죽었으며 다시 살아나지 못하도록 가슴 위에 대못을 박은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순교와 관련한 관변자료가 미비해 정확한 순교 일시에 대한 연구는 더 이뤄져야 할 것으로 보인다.
제주교구는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순교 정신을 현양하기 위해 1999년 제주 선교 100주년 기념사업의 하나로 황사평 순교자 묘역에 김기량 순교비를 세웠고, 2003년 1월 조천 성당에도 순교 기념비를 세웠다. 2005년 4월 24일에는 그의 고향인 조천읍 함덕리의 함덕 중학교 서쪽 도로변에 부지를 마련하여 순교 현양비를 세웠다. 그리고 2006년 9월 10일 김기량 순교 140주년 기념 신앙대회를 열었고, 그해 10월에는 순교 140주년 기념 가톨릭 합창 페스티벌을 열었다.
또한 2007년 11월 그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현양하고 시복시성을 위해 날마다 기도하는 ‘순교자 김기량(김해 김씨 좌정승공파 신방계 67세손) 펠릭스 베드로 종친 기도회’ 창립총회가 종친 후손 50여명이 모인 가운데 열렸다. 이처럼 제주교구는 ‘제주의 사도’로서 제주에 복음을 전하고 순교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의 신앙과 순교정신을 본받고 현양하고자 다양한 노력을 경주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2014년 8월 16일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가 동료 순교자들과 함께 프란치스코 교황에 의해 시복됨으로써 그 첫 열매를 맺었다. [출처 : 여진천, 한국 교회 124위 순교자전 - 제주의 첫 순교자 김기량 펠릭스 베드로, 경향잡지, 2009년 9월호 & 가톨릭신문 관련 기사를 중심으로 편집(최종수정 2014년 11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