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 돌아온 후 우리는 광장동 장신대 아래 작은 반지하에 전세를 얻었다.
결혼하고 곧장 몽골로 가서, 1년을 지나고 돌아온 우리에게는 정말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몽골에서 어떻게 먹고 살았는지도 또 하나의 미스터리다.
사역하는 교회도 중도에 사임하고 나갔으니, 후원교회도 없었을텐데 말이다.
어렴풋이 몽골 은행에 가서 '크레딧 카드'(현금서비스)로 돈을 인출한 기억은 있다.
우리는 몽골에서 잘 지냈고, 굶지 않았고, 행복했다. 풍족하진 않았겠지만, 그렇다고 가난하지도 않았다.
하나님께서는 늘 먹이시고 입히시고 보호하셨다.
주님은 "공중의 나는 새와 들의 백합화도 지키시고 입히시거든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라고 하시며 믿음없음을 꾸짖으셨는데, 우리는 돈은 없었지만 그래도 작은 믿음은 있었다. 1년간의 몽골 생활을 잘 마쳤다.
당시 친형이 삼성전자에 입사하여 일을 하고 있었다.
영남대학 기계공학을 졸업하자 마자 삼성전자 무선사업부에 입사하게 되었고, 구미의 삼성 전자 사업장에서 일을 하고 있었다. 형은 가족에 대한 책임감이 무척 강하고, 또 동생들에 대한 사랑이 남 달랐다.
비록 돌아가신 아버지와는 살아 생전에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그 이유는 아버지에 대한 실망 때문에 그랬으리라.
(정말 나중에 오랜 후에,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형의 잘못을 깨닫게 하시고 회개케 하시는 일을 단행하셨다. 이 일에 대해서는 아직 진행형이기에 많은 것을 남길 순 없지만, 나는 이를 통해 '사람이 무엇이든 심는대로 거둔다'는 진리를 다시금 마음 속에 되새기게 되었다)
형보다 먼저 결혼한 동생(나)이 몽골에서 돌아오고, 또 가족을 데리고 서울로 가야 한다는 것을 안 형은 자신이 모아둔 2500만원을 선듯 내게 주었다. 빌려 준 것도 아니고 그냥 줬다.(형은 동생들에게는 아버지와 같은 역할을 한 분이다).
나는 염치불구하고 그 돈을 받아 장신대 정문 바로 20미터 앞에 있는 반지하 전세집을 얻었다.
그렇게, 우리 세 식구, 나, 아내, 콩닥이(영은이)의 새로운 생활이 2000년 서울에서 시작된 것이다.
전세는 얻었으나 살림은 하나도 없었다. 숟가락은 있었겠지만, 집에 있어야 할 가구나 가전제품은 전무했다.
아내와 나는 100만원을 최대 상향선으로 잡고, 당시 서울에서 잘 산다고 소문난 동네, 강남구 재활용 센터와 서초구 재활용 센터를 방문했다. 새 것으로 가구나, 냉장고, 세탁기, TV 등의 살림을 사기엔 돈이 너무 부족했기에, 우린 재활용 센터에서 물건을 사기로 결정한 것이다. 신혼 첫 살림을 모두 중고로 마련하여 시작했다.
누군가는 이가 비참하거나, 측은하게 생각할런지 모르지만, 우린 전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다.
강남지역 재활용 센터여서 그런지, 물건도 꽤 좋았던 기억이 난다.(텔레비전만 제외하고)
무엇보다 그렇게 중고를 산 이유는, 한국을 곧 떠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어서 빨리 선교지로....
그러니 새 것이 필요없었다.
나그네와 같은 인생, 좋은 것, 새 것이 뭐 필요하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