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주일 전에 목사님들의 모임이 있었다. 경기도 안성, 일죽에서
목회하는 신학대학동기목사님의 교회에서 임현수목사님을
비롯해서 12명의 목사님들이 함께 했다. 그 날 여러 목사님
을 만나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누는 중에 나보다 몇살 연배이신
목사님이 "박목사, 요즘 많이 힘든가봐! 그런 얼굴이 아닌데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나? 안됐어. 너무 힘들게 살지마요."
그렇지 않다고 말씀을 드렸는데도 자꾸 얼굴이 힘들어 보인
다고 걱정에 약간은 빈정거림같은 느낌을 받았다. 박종근도
별수 없네 라고 하는 소리같이 들렸다.
깜짝 놀랐다. 내 얼굴을 보고 그렇게 말하는 분은 처음이었으니
말이다. 아, 요즘 조금 피곤한 것은 사실이다. 마음이 분주하고
교회사역에 대한 목회자로서 끊임없는 고민과 생각이 많기
때문이기도 하다. 하지만 얼굴이 축이 날 만큼 그렇게 부지런한
목사도 아니고 그렇다고 밤을 지새우거나 또 교회사역말고
다른 일을 하는 것도 없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그 말씀에 갑자기
힘들어지는 느낌이다. 오히려 나는 새벽기도회가끝나면 곧장
운동하러 달려가는 목사다.
어찌되었든 나는 무슨 안좋은 일이라도 있는 것 같은 얼굴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힘든 것이 정말 있는가 생각해 보았다.
자다가도 생각해 보았다. 지금 나의 힘든 것, 얼굴에 안돼보이는
것은 무엇인가? 깨달은 것이 있다. 마음이다. 마음에 잠겨 있는
것이 드러난 것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목회는 재밋고 즐겁고
신나는 일이었을 때가 있었다. 30대 40대때이다. 지금 생각하면
부족하고 부끄러움도 느끼는 사역이었다. 그저 박력있고 열정
있고 두려움없이 하나님만 믿고 다니던 때이다. 정말 그랬다.
누구에게 뒤떨어진다고 생각해 본적도 없고 지성과 영성을
나름 골고루 갖추었던 시기였다. 세월이 흘러 그런 뜨거운 열정
이나 간절함을 표현하기가 어색해졌다.
바로 그걸 발견한 것이다. 왜 그렇게 신나고 즐겁고 겁없이 했던
일들이 어색하고 두려워졌는가? 두가지가 나를 붙잡고 있다는
생각을 했다. 하나는 정신의 노쇠?같은 거다. 아이처럼 뛰놀고
앞뒤가리지 않고 주어진 일에는 며칠밤을 새워도 해낸 이력이
내겐 많다. 공부도 그랬고 교회사역도 그랬다. 잠이 두렵지 않았고
일이 두렵지 않았다. 나름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나는 남보다
열심히 노력했고 그 덕에 조금 나는 인정과 대우를 받은 사람이다.
이것은 건강한 육체만 있으면 할 수 있는 일이다. 물론 주님의
도우심이 배경임은 틀림없다.
다른 하나는 신앙심의 진지성의 부족? 같은 거다. 하나님이
그리워 밤을 지새울때가 많았다. 하나님을 부르고 싶어 산엘
자주 갔었고 신학교시절엔 기숙사생활을 하면서 새벽기도회
를 참석하면서 채플실 문이 열리지 않아 시멘트 바닥에 앉아 문열기
를 기다리며 기도하고 문이 열려 예배당에 들어가서 맨 앞자리
에 앉아 눈물로 눈물로 기도했다. 미국유학시절에도 나는 저녁
식사를 마치면 대학채플실에 들어가 하나님께 기도하고 소통하는
기막힌 수년의 시간을 가졌다. 기숙사에 있는 여러 미국친구들은
나를 안다. 밤마다 기도하는 한국인 유학생, 그리고 젊은 목사,
나는 고독한 유학생활을 하면서 성경을 많이 읽었고 독서를 많이
한 편이다. 처음에 영어가 달려서 책읽기가 어려울 때 나는 양서를
하나 잡으면 영어사전을 펴놓고 어려운 단어를 해독하며 책을
잃어가곤 했다. 물론 신학서적이다. 그 때 읽은 몇몇 책가운데
지금도 Practical Theology는 기회있을 때마다 보는 애서이다.
나는 지금도 하나님을 부를때가 가장 좋다. 조심스럽지만 하나님
아버지하고 부를 때 나의 존재감과 정체성이 부각되고 하나님을
부를 때마다 나는 세상의 주인이신 아버지의 자녀라는 생각에
든든하고 만족스럽게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의 신앙심.,
그 진지함을 체크하지 않을 수 있다. 나도는 모르는 사이에 의식
화된 기도, 관념적인 기도, 상투적인 언어등은 결국 나를 이대로
가지 못하게 했다. 새로운 것을 경험하려면 도전해야하고 부지런
해야 하며 남보다 한발자국을 앞서야 한다.
이번 밤별기도회에 나는 정신의 노쇠와 신앙심의 진지성 회복을
위한 참다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산상수훈의 팔복을 읽다가 일시
에 그 두문제가 풀어지는 놀라운 경험을 했다. 팔복에서 발견하고
깨달은 것은 팔복, 심령의 가난, 애통하는 자, 긍휼히 여기는 자,
의에 주리고 목마른자, 온유한 자, 마음이 청결한자. 화평케하는자,
나로 인하여 핍박을 받는자의 복이 얼마나 소중한 가를 깨달았다.
그런데 그가운데 가장 놀라운 진리발견은 팔복은 오직 겸손, 낮아짐
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았다. 예수 그리스도의 낮아지심,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실천해야만 깨닫는 핵심적인 진리이다. 낮아짐의
축복은 아무나 모른다. 가르쳐줘도 모른다. 눈에 보여줘도 그짓은
안하려고 한다. 누가 이 시대에 남보다 낮아지기를 원하는가?
남을 누르고서라도 올라서기를 바란다. 남을 해치고서라도 올라
설수 있으면 그짓을 한다.
그러나 주님은 반대다. 반대하신다. 주님은 세상에 오시기를 바로
낮음의 극치인 마굿간에 나신 것이다. 베들레헴의 작은 고을에서
소리소문없이 주님은 아무도 모르게 오셨다. 그 엄청난 창조주요
세상의 주인이신 그분이 소리소문없이 살짝 오신 것이다. 사실은
당시 사회가 예수님의 오심을 반대하는 경향이었다. 빛이신 주님
이 어둠의 땅에 오셨지만 사람들은 알아보지 못했다. 오히려 저
동방의 박사들이 황금, 유향, 몰약을 가지고 경배하러 왔다. 우리
시대의 딜레마가 여기 있다. 눈에 보이는 화려함에 죄를 짓고도
감춰버리고 악을 행하고서도 악하다 하지 않고 온갖 죄악을 저지
르고서도 다 괜찮다는 식의 도식이 편만해져 있다.
내 얼굴은 아마 그래서 망가진것 같다. 그러나 가다듬는다. 다시
몸을 추스리고 주님을 따라 가야겠다. 나의 부족도 있고 동시에
세상의 악함을 보고 애통하느라고 나는 얼굴이 찌들었다.
얼굴관리도 잘해야겠다. 서울모자이크교회의 목사로서 무게감을
가지고 사랑하는 성도들, 양무리의 본이 되고 양무리를 위해 목숨
을 버리신 목자의 심정을 가지고 이 좁은 길, 좁은 문을 통과하여
묵묵히 걸어가야겠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길임에 틀림없지만
그래도 나는 아버지를 부르며 이 길을 걸어가겠다. 아버지, 아버지
의 마음을 알아 나도 이 세상을 긍휼히 여기며 살아가겠습니다.
교회 권사님들과 집사님들에게 물어보았다. 제 얼굴 문제많나요?
뭐 불편하신지요? 아니란다. 아주 좋다고 하신다. 그런데 약간
피곤해 보인다고 하셨다. 잘 관리하며 이 길을 걸어가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