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회의 끝자락에 서서
목사로 살아간다는 것은 청렴과 빈자의 삶이어야 한다고 가르침을받았다. 신학교 시절 교수이시면서 남대문교회 배명준 담임목사님으로부터 받은 정신이다. 목사님은 평생 목회하시고 은퇴하실 때 사택에서 이사하시면서 용달차에 양철캬비넷이전부였고 자식들이 여럿있지만 단 한 자식도 아버지를 기대어 산 아들들이 없다. 아들 중 한분은 내가 샌디에고 유학시절 반석교회를 목회하면서 간간히 뵌 적이 있는데 그분은 일반인과 같이 직장인이었다. 다른 아드님은 토론토에 계셨는데 연로하신 배목사님을 모시고 살았다. 그리고 토론토에서 주님의 부름을 받고 일생을 마쳤을 때 서울 남대문교회는 목사님을 교회에서 장례예배를 하도록 관을 서울로 운구하였고, 예장통합서울노회주관으로 천국환송예배가 있었다. 그날 나는 매우 침통한 마음으로 참석 했다. 대학의 법인이사이셨고 교수이셨으며 대학을 위해 많은 헌신을 하신 분인데, 그리고 우리 대학의 역사를 보면 초창기 바로 남대문교회에서(6.25 전후) 강의실을 내어주어 학교가 운영을 했는데 대학은 단 한 사람도 조문을 보내지 않았고 그 흔한 조화하나 보내지 않았다. 그날 나는 젊은 시절 목사님을 모시고 반포의 댁으로 일주일에 한 번 모셔다 드릴 때를 추억했다.
믿음이면 가난도 좋다
어느 날 목사님 댁(반포)까지 모셔드려야 해서 가는 중에 "박목사, 목사는 다른 것 없어. 믿음이 있어야 해, 믿음이 좋은 사람이이어야 해" 내 평생 잊지 않고 가슴에 품고 있다. 가난했던 시절 목사님은 소학교 소사로 일하면서 성경학교를 다니셨다. 가난하셨던 목사님은 16살 때 입을 옷이 없어 형님의 두루마기를 입고 전도사로 양평의 양동에서 목회를 시작하셨다. 나는 목사님의 당시 이야기를 내 머리에 토씨하나 틀리지 않게 기억하고 있다. 그 숱한 수모와 무시를 당하시면서 16살에 노회가 파송을 했지만 교회를 관장하시던 어른 "영수"(지금의 장로님격)님마져 전도사로 인정하지 않는 상황에서 16살의 전도사님은 그 험한 산을 넘고 결국 승리하셨다. 훗날 그 교회는 목사님의 지적능력과 영적능력을 아시고 일본 동경에 유학도 보내는 엄청난 결단을 하고 일본 동경신학대학에서 공부하게 하였다. 시골에서 목회하시던 내 선배는 가난해서 자식들을 한사람도 대학에 보내지 못하고 중학교 고등학교만 졸업하고 우체국 집배원이 되고 회사원으로 생활을 보태게 했다. 시골에서 목회하는 가난한 목사이고 아무것도 가진것이 없어 그렇게 그렇게 살아가신 것이다. 은퇴라고도 할 것 없지만 살곳조차 없어 자신의 고향, 부모님이 사셨던 시골집으로 들어가 사시다 천국에 가셨다. 그의 장례식에 갔을 때 아들들과 딸은 50줄을 넘고 감사하게도 조그마한 중소기업도 하고 딸은 목사의 아내가 되고 지역에서는 알아주는 인사가 되었다.
그들이 가난했던 것은 가난을 타고난 것이 아니라 단지 아버지가 목사라는 이름하나 때문에, 그리고 농촌의 교회여서 충분한 대우를 해 드릴 수가 없었기에 불가피하게 차별 아닌 차별을 당하며 살았던 것이다. 가난이 죄는 아니다. 가난이 부끄러운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가난을 자랑할 것은 아니다. 하지만 가난도 나름이다. 가난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면 받아들여야 하고 그것이 자신을 건강하게 해주는 지렛대가 된다면 마다할 것도 없다. 하지만 누가 가난을 그렇게 생각하겠는가 이다.
두아이를 키울때
나는 두 아이를 키웠다. 가정의 여러상황을 고려하여(아내의 투석) 안식년때 미국에서 있다가 아이들을 장인장모님께 맡기고 우리부부만 돌아왔다. 교수로 재직할 때이고 당시 나는 신학대학원장으로 재직할 때, 교수의 자녀들의 대학 등록금을 지원해 주었는데 나는 아이들이 국내가 아니라 미국에서 공부한다는 이유로 두아이의 대학등록금을 한 푼 받아 본 적이 없다. 그리도 당시 시무하던 교회에서 교회가 담임목사의 자녀들의 학비를 지원해주는 것이 일반적인 통례였는데 학비보조나 아이들 등록금을 한푼도 받은 적이 없다. (교회가 재정을 많이 가지고 있으면서도) 장로님이 여덟 명이고 안수집사가 20여명이 넘고 권사와 집사들이 200명이나 되는데 아이들 등록금을 말씀하신 분이 한 분도 없었다. 참 이상한 일이었다. 아마 내가 돈 걱정안하는 사람인줄 알았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때 그때마다 알지도 못하는 이상스런 까마귀가 나타났고 그 까마귀는 두 아이들이 결혼하는 때까지 든든한 지원세력이 되어주었고 나의 목회를 이끌어 주었다. 오늘 갑자기 그 “까마귀”가 떠올라 감사를 드렸다.
마지막 사역을 앞에두고
교회를 개척하고 16년이 지났다. 그리고 5년 시무 연장이 되어 2024년 그 시무 연장 첫 사역을 출발했다. 촘촘히 일을 짜본다. 안하던 짓을 한다. 시간이 되는대로 기도원엘 간다. 기도하는 것은 딱 한가지다. 하나님만 바라보는 목회할 수 있도록 기도한다. 그리고 하나님의 목회, 내가 발 동동구르며 하는 목회가 아니라 하나님이 말씀하시고 하나님이 나타나시고 하나님이 일을 이뤄가시는 그런 목회에 내가 그릇으로 쓰임받는 목회이길 기도한다. 주님과 일대일의 시간을 가능한 한 많이 갖기로 했다. 18세기 미국 인디언 선교 위해 젊음을 바치고 29살에 주님 나라에 가신 데이빗 브레이너드를 생각하면서 기도, 기도, 기도, 오직 주님과 같이 있고 싶어하는 마음을 품었다. 매년 초, 나는 조나단 에드워드 목사가 쓴 “브레이너드의 생애와 일기”를 독서한다. 혹독한 시련에서도 단독으로 인디언 선교를 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운다. 그는 주님과 동행하고 싶어어 아니 주님과 같이 있고 싶어 성탄절엔 깊은 산속에 들어가 텐트를 치고 추위를 몸으로 맞이하며 몇날씩 기도하고 또 기도하며 산 사람이다. 나는 늘 그를 동경한다. 나는 그렇게 주님과 함께 하는 기도와 영성을 내 작은 가슴에 담아 팔복을 통해 주시고자 하는 그 복에 참여하고자 날마다 결심을 하고 따라간다. 시끄러울때 홀로 기도하기 위해 기도의 골방을 찾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까마귀의 은총
나는 “까마귀적 신앙"은 아니다. 흔히 말하는 가만히 있으면 어디선가 귀인이 나타날 것이라는 낙천적 태도나 기복으로 살아가지 않는다. 그냥 몸으로 받아내며 사는 조금은 바보적 삶을 살아간다. 안된다고 없다고 안달하고 꾀를 내지 않는다. 그래서 된통 당하고 고생해야 할 때가 많다. 한마디로 당해야 하면 당하는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 내 신앙여정에는 까마귀가 늘 나타났다. 그럴 때마다 깜짝 놀라면서, 어찌 내게 이런 일이!라고 소리친다. 엘리야가 경험한 그 까마뒤를 나같은 신분으론 어림도 없는 일인데, 정말 이상하게 까마귀는 늘 나를 도왔다. 그리고 다시 목회 연장의 선상에서 현실적으로 이런 질문을 해본다. “까마귀”는 여전히 계속 나를 도울 건가? 나는 안다. 나를 돌보는 까마귀를 나는 안다. 때때로 그 까마귀가 어렴풋이 떠올라 눈물을 적시며 감사한다. 서울모자이크교회안에 숨겨진 까마귀들이 있다. 하나님은 그렇게 섭리하시는 분이시다.
그러기에 나의 모델은 힘 자랑하는 사울 왕이 아니다. 보복을 해도 수십번 보복해서 사울을 처치할 수 있음에도 스스로 도망다닌 다윗이다. 사울은 왕궁에 살고 다윗은 엔게디 굴과 같은 곳으로 피하고 도망다니는 인생이었지만 도망다니는 다윗이 얼마나 부러웠는지 모른다. 도망? 실패자가 아닌가? 반면에 사울은 다윗을 죽이려고 3000명의 군사를 풀고 왕으로서 힘있고 권세를 가진 자였지만 사울은 왜 그렇게 초라하게 보이는지! 나같은 죄인을 구원해주신 은혜에 감사하고 목양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고 부족한 종을 위하여 기도와 사랑의 온기를 주시는 교우들이 있어 행복한 목사다. 배명준 목사님의 가르침, 목사는 "믿음이 좋은 사람이어야 해"라는 말씀이 떠오르는 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