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어법인가 싶습니다. ‘복이 많다’라고 하면 대뜸 생각나는 것은 잘 먹고 잘 사는 것, 아니면 뭔가 잘 돼서 기쁨을 누리고 행복한 표정을 짓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럴 만한 이유가 하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복도 많지, 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고 있는 복에 대하여 보다 차원을 높이자는 의도가 숨겨져 있다고 봅니다. 하기야 성경적인 복도 있습니다만 그만한 복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우리가 참으로 복으로 알고 받으려는 보다 고상한 복도 생각해야 합니다. 풍요로운 물질만으로 복된 삶을 누리는 것은 아니니 말입니다. 쌓지 못해 불행한 사람이나 쌓아놓고도 누리지 못하는 사람이나 다를 바 없지 않을까요?
예전에 잘 쓰던 말이 있습니다.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사실 알고도 아는 대로 행하지 않는 경구 중 하나입니다. 우리 자식이 행복하기를 바라지만 대부분의 부모는 성적순으로 몰고 갑니다. 그게 현실 아닙니까? 꼭 돈이 많아야 행복하냐?고 대들지만 그 사람도 돈에 대한 간절함을 피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세상 살면서 돈이 얼마나 좋은지 모르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 누가 마다하겠습니까? 힘이 닿지 않아서 그렇지, 할 수만 있다면야 두배 세배 아니라 열배 백배라도 더 가지고 싶은 것이 돈입니다. 그런 현실 속에 우리 모두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감독이 쓰러져 세상을 뜹니다. 졸지에 영화를 만들던 팀이 그대로 주저앉습니다. 그렇다 치고 함께 따라다니며 훌륭한 조역을 맡았던 ‘이찬실’ PD가 직장을 잃게 되는 꼴이 됩니다. 누구 받아주는 사람도 없습니다. 노력은 가상히 여겨도 비상업적인 영화에 몰두하는 팀을 제작자도 더 이상 후원하지 않습니다. 돈이 돼야 말이지요. 배신감에 치를 떨지만 도리 없습니다. 어디다 갑질이라고 고발할 수도 없는 일입니다. 그냥 당해야지요. 뜻은 고상해도 누가 먹여살려주지 않습니다. 그러니 뭔가 해야 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뭐 아는 게 있습니까? 나이 40이 되도록 영화나 쫓아다녔는데 말입니다.
어느 날 후배인 배우 ‘소피’를 찾아갔더니 마침 가사도우미가 갑자기 떠나 집안 꼴이 말이 아닙니다. 달리 도리가 없던 차에 그 자리라도 꽤 차야 합니다. 먹고살 일이 급한데 체면 찾을 일 없습니다. 그런데 그 집에 불어 가정교사가 소피를 가르치려고 옵니다. 묘한 감정이 생기지요. 이 남자 도대체 뭐 하는 사람이지? 불어 가정교사라, 나이 들도록 전에는 뭘 했을까? 아무튼 서로 한 집에서 만나게 되니 접하는 시간이 늘어갑니다. 더구나 퇴근 시간도 비슷하여 동행하며 걷기도 합니다. 남녀가 자주 마주하면 묘한 감정이 들기 마련입니다. 더구나 둘 다 미혼입니다. 거리낌이 없습니다. 거칠 것도 없지요. 기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남녀교제는 다양합니다. 보통 20대 전후해서 첫사랑은 앞뒤 가리지 않습니다. 그냥 앞만 보고 내달립니다. 로미오와 줄리엣 식입니다. 가족이 원수라도 소용없습니다. 그 때는 남들이 보이지 않습니다. 가족도 남이 됩니다. 오로지 사랑하는 두 사람만 서로 보입니다. 막무가내입니다. 세상은 오직 사랑으로 덧칠해져 있을 뿐입니다. 아이들의 불장난이 큰 불을 만듭니다. 그런 식이지요. 무섭습니다. 함부로 말렸다가는 다 잃습니다. 조심스럽지요. 경험자들은 옆에서 참고 지켜봐줍니다. 그리고 기회가 될 때 조금씩 침을 놓습니다. 왜냐하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진작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 참으로 시간이 필요한 일이지요.
이찬실 피디와 불어 가정교사 ‘영’과의 미묘한 사이가 참으로 미묘하게 진행됩니다. “아 망했다. 왜 그리 일만 하고 살았을꼬?” 탄식하던 찬실이가 결국 연애 한번 해보려나 싶어서 과감히 도전합니다. 그런데 돌아온 대답은 ‘누나’로 모시겠다는 것입니다. 모처럼 큰맘 먹었는데 허망하게 무너집니다. 하기야 그까짓 다섯 살 연하가 무슨 대수라고, 연애도 못하냐? 그런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 사정일 뿐입니다. 남자의 입장을 어찌 알겠습니까? 참았던 눈물이 쏟아집니다. 젠장, 뭐 되는 일이 없네 싶습니다. 이래도 살아야 해? 하는 마음이 들 수도 있겠지요. 그러나 아직 많이 남아있습니다. 갈 길이 멉니다. 그리고 그 때 옛 동료들이 찾아옵니다.
찬실이가 인생 속에서 만난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선 동료들이지요. 가난하지만 함께 일하며 즐거워했던 동지들입니다. 열심히 일하는 배우이며 후배인 소피, 일자리 잃고 산꼭대기 집으로 이사했을 때 만난 집주인 할머니, 그리고 불어 가정교사 영 등등입니다. 모두 고만고만하고 한결같이 악의가 없이 서로서로 이해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이 험난한 세상에서 하루 세끼 먹고 나면 서로 물어뜯는 일 없이 산다는 것만도 복이 아닌가요? 내가 어느 세상 어떤 무리 가운데서 살고 있는가 생각해보면 깨닫습니다. 어려워도 마음이 하나 되어 함께 일하면서 살 수 있다는 것만도 복입니다.
추가로 한 사람이 더 나오는데 이야기 속에서는 ‘귀신’으로 등장합니다. 아마도 자기 자신과의 대화를 그렇게 상징하고 있는 듯싶습니다.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를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