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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를 통해 조광래 감독님이 이번 경기를 위해 소집한 스물두 명의 국가대표 선수들의 명단을 봤어요. 그런데 그 명단은 여전하지 않더군요. 언제나 ‘수비수’ 항목에 포함되어 있던 ‘이영표’라는 이름이 없었거든요. 뭐,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기에 새삼 놀랄 이유는 없었지만, 부상을 당하지도 않았고, 소속팀에서 주전으로 뛰고 있는 ‘이영표’의 이름이 빠진 대표팀 명단은 아무리 봐도 참 어색했어요.
앞으로 대표팀 명단이 발표될 때마다 이렇게 어색하겠죠? 항상 제일 먼저 찾아보던 이름이 형 이름이었으니까요. 형이 대표팀 은퇴를 발표한 지 열흘이 넘게 지났는데, 오늘에서야 형이 더 이상 붉은 유니폼을 입지 않을 것이란 사실이 실감나서, 이렇게 감상적인 편지를 씁니다.
한 운동선수가 자국 대표팀에 처음으로 선발되고, 국가대항전 데뷔전을 치르고, 유명해지고, 성실한 자기관리로 오래도록 믿음직한 경기력을 선보이고, 나이가 들어 대표팀에서 제외되기는커녕, 대표팀 감독님이 좀더 뛰어줄 수 있겠냐는 말을 하게 만들 수 있다면, 그의 선수생활 자체가 그의 열성팬들에게 정말 훌륭한 선물이 되지 않을까요?
제겐 형이 바로 ‘그 선수’였어요. 형과 함께 책도 썼으니 저는 열성팬으로서 받을 수 있는 모든 선물을 받은 셈이네요^^ 그런데도 아직도 형이 뭔가 해주기를, 뭔가 더 보여주기를 바라는 저를 보니 누군가의 ‘빠돌이’가 된다는 것이 참 성격 버리기 좋은 일이구나 하는 생각도 드네요.
형의 은퇴 소식을 듣고 참 놀랐어요.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그 흔한 은퇴식도 없이, 팬들의 박수 소리도 없이, 아시안컵 경기가 끝난 카타르의 한 경기장 기자회견장에서, 아주 조용히, 그냥 그렇게 은퇴 기자회견을 갖고 곧바로 소속팀이 있는 사우디아라비아로 돌아갔다는 사실이 참 놀라웠거든요. 한 기자님께서 “그동안 그가 한국축구에 바친 역사에 비하면 이날 자리는 조촐하기 짝이 없었다.
여느 기자회견과 똑같았다”라고 표현을 하실 정도였으니, 자칭 ‘이영표 빠돌이’인 제가 얼마나 놀랬겠어요! 아니, 사실 놀랬다기보다 화가 났다고 하는 게 더 정확한 것 같아요. 형의 국가대표 은퇴식은 아주 크고, 성대하고, 훈훈하게 준비될 줄 알았거든요. 그렇게 혼자 화가 나서, 형의 은퇴 기자회견을 대서특필하는 대신 당시에 아직 열리지도 않은 박지성 선수의 은퇴 기자회견만을 주목하는 듯한 언론에, 박지성 선수와 형을 위해 은퇴경기를 계획하지 않는 축구협회를 저주하려고 했어요.
그런데 그때 문득 형과 책을 쓰며 나누었던 대화가 생각나더라구요.
형과 은퇴에 관한 얘기를 하고 있었어요. 제가 ‘대표팀에서 안 뽑아줘서 자연스레 은퇴하는 게 좋냐, 아니면 스스로 대표팀 은퇴를 선언하는 게 좋냐’고 물었었죠. 형은 주저 없이 ‘양 쪽 다 괜찮다’라고 대답했죠. 그 마지막 모양새에 큰 의미를 두는 사람도 있겠지만 형은 그렇지 않다고, 그런 것에 의미를 두다보면 많은 것에 얽매이게 되고, 결국 자신의 실력을 100% 유지할 수도, 결국에는 축구를 즐길 수도 없게 된다고 설명하면서요.
그래도 집요하게 ‘대표팀 은퇴는 어떻게 하고 싶냐’고 묻자 형은 ‘선수가 사라질 때에는 조용히 사라져야 된다’라고 했어요. 사람은 항상 잊혀지는 것이라고, 무엇인가의 마지막은 매듭을 짓는 거라고, 매듭은 조용히 짓는 거라고, 은퇴식을 하거나 할 생각은 전혀 없다면서 말이죠. ‘팬들이 결코 가만히 있지 않을 거다’라는 말에는 ‘팬들이 참 중요하다. 축구를 통해 그분들과 같이 행복했고 같이 기뻐했으며, 서로 좋은 추억을 갖게 되었다’라고 하면서, 물론 마지막 인사는 하겠지만 축구를 통해 하고픈 말을 다 했으니 단지 인사를 하기 위해 은퇴식을 마련하지는 않겠노라 선언했죠.
그리고는 정말로 팬들에게 감사하다는 말로 시작한 조용한 은퇴 기자회견을 통해 마지막 인사를 하고는 형은 붉은 옷을 벗었어요. 대표팀을 비판해준 팬들에게도 덕분에 축구가 흥미로웠다며 인사를 하셨죠. 그 날의 대화가 떠오르자 화를 내야할 이유가 없어졌어요. 가장 ‘이영표다운’ 방법의 퇴장이었으니까요. 제가 화가 났던 것은 형이 제 욕심대로 행동할 것이라는 착각 때문이었으니까요.
오래도록 형을 응원하며 참 많은 상상을 했더랬습니다. 세계 최고의 팀으로 이적하여 주전선수로 경기를 하는 모습, 박지성 선수처럼 매일같이 스포츠신문 첫 장에 오르내리는 모습, 국가대표팀 주장이 되어 필드를 누비는 모습, 홍명보 현 올림픽대표팀 감독님을 제치고 A매치 최다출장 기록을 세우는 모습, 경기장을 꽉 채운 팬들의 함성 속에서 은퇴경기를 치르는 모습, 전 국민의 축복을 받으며 아름답게, 그리고 성대하게 은퇴식을 치르는 모습까지…. 기록을 세우기 위해, 혹은 칭찬을 받기 위해서가 아니라 즐겁기 때문에 축구를 한다는 형의 말을 참 많이 들었는데 그게 다 한쪽 귀로 흘러나갔던 모양입니다.
형의 국가대표팀 마지막 경기였던 우즈베키스탄과의 2011아시안컵 3, 4위전이 끝나고, 등번호 ‘12번’을 단 형의 뒷모습을 보니 새삼 형의 체격이 크지 않다는 것이 느껴졌어요. 2002년 대표팀 선수들 사이에 있을 때만 해도 그렇지 않았는데, 2011년의 대표팀 주전 선수들 중 형의 체격이 가장 작더라구요. 형과 비슷한 체구의 선수들로 가득했던 12년 전의 대표팀에서부터 형의 체구가 유달리 왜소해 보이게 만드는 체격 좋은 선수들로 가득한 오늘의 대표팀에 이르기까지, 퇴보하지 않기 위해 형이 얼마나 피눈물 나는 노력을 했는지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어요.
왜 그때도 저는 형의 그 모든 노력이 여전히 대표팀에서 뛸 수 있는 실력이 있음을 증명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생각했을까요? 형은 축구를 좀 더 즐겁게 하기 위해서 노력한다고 제 귀로 직접 들었었는데 말이에요.
이렇게까지 쓰고 나니 정말 형의 대표팀 은퇴가 실감나네요! 개인적으로 이제 저는 대표팀 경기를 좀 더 넓게 볼 수 있을 것 같아요. 그동안 형이 서 있는 곳 위주로 경기장을 봤거든요. 이제 저는 대표팀 수비력을 문제시 하는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아도 될 것 같아요. 그동안은 비난 받을 필요가 없는 형이 같이 비난 받는 모습을 보며 울화가 치밀었거든요. 이제 저는 대표팀 경기가 있는 날에는 대표팀 하나만 응원해도 될 것 같아요. 그동안은 대표팀과 형을 동시에 응원하느라, 둘 중 한쪽이 잘 하지 못하면 언제나 기분이 좋지 않았거든요.
하지만, 어쩌면 저는 여전히 경기장 한쪽만 바라볼지도 모르겠어요. 형의 포지션에서 뛰는 선수가 제 마음에 쉽게 들 리가 없으니까요. 어쩌면 저는 누구보다 큰 소리로 대표팀 수비를 비난할지도 모르겠어요.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았던 형의 숨겨진 헌신 없이는 대표팀의 수비가 지금보다 더 삐걱댈 것을 알고 있으니까요. 어쩌면 저는 마음속으로 대표팀이 지기를 바라게 될지도 모르겠어요. 혹여나 대표팀이 형 없이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보면 저도 모르게 섭섭할 것 같으니까요.
한동안 대표팀 경기가 참 재미 없을 수도 있겠네요. 대표팀 경기를 보는 주된 이유가 사라졌으니까요. 그래도 대표팀을 있는 힘껏 사랑하고 응원해야겠죠? 형이 대표팀에서 온 몸으로 말없이 뿌린 씨앗이 어떻게 결실을 맺을지 지켜봐야 하니까요^^
에잇, 이렇게 투정부리려고 쓰기 시작한 건 아닌데 말이죠^^; 원래 하려던 말은 이거였어요!
늦었지만 새해 복 많이 받으시구요, 올해에도 전심으로 축구를 즐기는 형의 모습을 열성적으로 응원하렵니다! 손등 부상도 빠르게 회복하시길 기도합니다!
붉은 옷을 입고 12년 동안 형이 보여주신 모든 것에 감사합니다! 정말 수고하셨습니다!
2011년에도, 그 다음 해에도, 제게 있어 형은 언제나 최고의 국가대표 선수입니다!
서울에서,
승국 올림
첫댓글 이글은 이승국씨가 이영표선수의 대표선수 은퇴를 보면서 그간의 우정을 통해 경험한 영표형제에대해 <아름다운동행>에 기고한 글을 옮겨온 것입니다. 멋진 남자의 뒷모습도 아름답다 여겨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