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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 지옥 같던 시간이 흐른 뒤 그는 말합니다. “나 자신을 위해서는 물론, 우리 모두를 위해서, 아니 정치군부를 위해서도 피신했어야 했습니다.” 고문기술자들조차도 “더 이상 두고 볼 수가 없다. 어떻게 해서든 여기를 떠나라. 정말 큰 일 나겠다.”라며 울먹였을 정도의 지독한 고문을 받을 줄은 아무도 몰랐습니다. 그리고 지난 12월30일 새벽에 고인이 된 그를 떠올리자니 “피신했어야 했다”는 말이 너무나 묵직하게 가슴을 쳤습니다. 그는 자신이 받았던 열 차례의 고문에 대하여 아주 상세하게 기록하였습니다. 제일 처음에는 발가벗겨진 채 물고문으로 시작하여, 몇 차례의 물고문으로 혼절시킨 뒤에 전기고문이 이어집니다. 물과 불의 그 절묘한 만남은 멀쩡한 정신을 가진 한 인간을 도륙했습니다. 1985년 9월4일 새벽에 남영동으로 끌려간 그는 9월20일까지 모두 열 차례에 걸쳐 물고문과 전기고문을 당합니다. 그리고 20일 마지막 고문이 끝난 뒤 25일까지 그는 고문자들이 원하는 대로 동료들의 이름을 들먹이면서 진술서를 쓰고 베끼고 ‘소설’을 만들어낸 뒤 새벽 5시 30분에 20분간 집중폭행을 당한 끝에 고문을 ‘졸업’할 수 있었습니다. 온전한 이성과 담박한 육체를 가진 한 인간이 무력으로 꺾인다는 것은 대체 어떤 느낌일까요? 뚝뚝 꺾이는 한 인간의 생기(生氣)를 문자로 만나는 독자를 위해 그는 이렇게 자세하게 설명해주고 있습니다. “그 비명들은, 사람들이바뀌면서 계속되던 비명은 송곳같이, 혹은 날카로운 비수처럼 번쩍거리는 그런 것이 아니었습니다. 돼지기름처럼 끈적끈적하고 비계처럼 미끄덩미끄덩한 것이었습니다. 살가죽에 달라붙은 그 비명은 결코 지워질 수 없는 그런 것이었습니다. 멱이 따진, 흐느껴 대는, 낮고 음산한 울려 퍼짐이었습니다. 무슨 슬픔이나 비장한 느낌이 들기는커녕 속이 완전히 뒤집히고 귓구멍을 틀어막아도 파고들어 왔기에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물론 처음에 그는 이런 비명소리, 울면서 애걸복걸하는 것이 미워지기도 했다고 고백합니다. 늠름하고 의연하게 버텨내지 못하는 젊은이에 대한 안쓰러움이 곧이어 자신에게 가해질 위해에 대한 두려움과 뒤섞여 그는 갈팡질팡하였다고 말합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그를 못 견디게 만든 것은 엉뚱하게도 라디오 소리였다고 고백합니다. “그러나 정말 미웠던 것은 구걸하는 것 같은 비명소리가 아니었습니다. 라디오 소리였습니다. 고문당하는 비명 소리를 덮어씌우기 위해, 감추기 위해 일부러 크게 틀어 놓은 그 라디오 소리, 그 라디오 속에서 천하태평으로 지껄이고 있는 남자 여자 아나운서들의 그 수다를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인간에게 파괴가 감행되는 이 밤중에, 오늘, 저 시적이고자 하는 아나운서의 목소리를 도저히 용서할 수 없었습니다.” 며칠 후 구치소로 이감된 뒤 면회 온 아내에게 발뒤꿈치의 상처를 보여주면서 군사정권 아래 자행되고 있는 이 엄청난 인권유린의 사태는 세상에 폭로됩니다. 하지만 그의 몸속에는 이미 그때부터 죽음이 뿌리 내리고 있었습니다. 훗날 정치인으로 활동을 할 때 그의 모습에서 여느 정치인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넘치는 기백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습니다. ‘생때같다’란 말이 있습니다. 사전에는 그저 ‘몸이 튼튼하고 건강하다’라고 설명하고 있지만 ‘생때’라는 말 속에는 그 어떤 형용사로도 다 설명할 수 없는 생명력이 넘쳐 있습니다. 그것은 푸르고 시퍼렇고 새빨갛고 찬란합니다. 싱싱하다 못해 비릿할 정도이고, 세상의 그 어떤 이론으로도 설명할 수 없고, 그 어떤 흥정으로도 맞바꿀 수 없는 유일한 것입니다. 한 인간을, 자신들의 탐욕과 불의에 저항하는 한 인간을 도륙하고, 그의 생기를 꺾은 고문기술자들은 그 ‘생때’를 범한 자들입니다. 세상이 무너져도, 인간과 신과 부처가 다 망해도 오직 홀로 청청하게 빛을 발해야 할 ‘그것’을 범한 자들입니다. 그런데 고문행위는 차라리 ‘예술’이었다는 고문기술자는 양떼를 치는 ‘목사님’이 되었고, 그 모든 책임을 짊어져야 할 사람은 백담사에서 마음공부를 하고 간혹 법문도 하였다지요. 아, 관세음보살, 저들을 구제하소서. <남영동>을 읽으면서 뜬금없이 뇌리에 스친 것은, 죄를 지었거나 짓지 않았거나 형틀에 묶여 고초를 겪을 때 관세음보살의 명호를 부르면 즉시 달려와 그를 구제한다는 보문품의 구절이었습니다. 그동안은 ‘관세음 명호를 부르면 감옥에서 풀려난다’는 식으로만 이해해 왔습니다. 하지만 그 속에는 ‘풀려난다’는 사실보다 더 중요한 내용이 담겨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생때같은 목숨이 도륙당하는 끝에 그토록 부정하던 모순과 불의 앞에 무릎이 꺾이는 자신의 모습을 스스로 두 눈을 부릅뜨고 지켜봐야 할 때의 그 자괴감, 저 고문자들을 향해 끓어오르는 걷잡을 수 없는 분노와 두려움, 세상은 저토록 달콤하게 흘러가는데 곧 자신의 목에서 나오게 될 저 끈적한 신음소리를 온몸에 묻혀야 하는 그 진저리…. 인간에, 삶에 어긋나는 순간 외치는 ‘오, 관세음보살’이 바로 보문품 그 구절의 메시지였던 것입니다. 그저 머리끝으로만 받아들여서는 안 될 구절이었습니다. 지금도 세상은 불의(不義)의 힘이 셉니다. 그건 의롭지 못한 것을 향해 “안 됩니다”라는 소리를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인들 그 목소리를 내기 쉬웠을까요? 나와 똑같이 내 한 목숨 보존코자 전전긍긍하는 중생인데요. 하지만 세상이 안위의 잠에 깊이 빠져 있을 때 아닌 건 아니라고 소리치는 이들이 있어 세상은 그나마 살만한 곳이었습니다. 그들이 피를 흘리며 간신히 차려놓은 밥상에 숟가락을 슬며시 얹는 비겁한 나…. 독후감을 마쳐야겠습니다. (이미령 선생의 보리살타의 서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