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 딸과 함께 읽는 소설 여행 1
서울, 1964년 겨울 줄거리 (김승옥)
1964년 겨울, 서울의 어느 포장마차 선술집에서 안씨라는 성을 가진 대학원생과 '나'는 우연히 만난다. 우리는 자기소개를 끝낸 후 얘기를 시작한다. 우선 '파리(Fly)'에 관한 이야기다. 파리를 사랑하느냐는 나의 질문에 그는 우물거렸고, 나는 날 수 있는 것으로서 손안에 잡아 본 것이기 때문에 사랑한다고 스스로 답한다. 추위에 저려드는 발바닥에 신경 쓰이는 나에게 그는 꿈틀거리는 것을 사랑하느냐고 묻는다. 나는 의기양양해져 옛 추억을 떠울리며, 여자 아랫배의 움직임을 이야기하고, 그는 꿈틀거리는 데모를 말한다. 그리고 대화는 끊어지고 만다. 다른 얘기를 하자는 그를 골려 주려고 나는 완전히 자신만의 소유인 사실들에 대해 얘기를 시작한다. 즉 평화 시장 앞 가로등의 불꺼진 개수를 이야기하자, 그는 서대문에서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의 숫자를 이야기한다.
나는 안형을 이상히 생각한다. 부잣집 아들이고 대학원생인 사람이 추운 밤, 싸구려 술집에 앉아 나 같은 친구나 간직할 만한 일에 대해서 얘기하고 있다는 것이 이상스러운 것이다. 안형은 밤에 거리로 나오면 모든 것에서 해방된 느낌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가 술집에서 나오려 할 때, 가난뱅이 냄새가 나는 서른 대여섯 살 짜리 사내가 우리 쪽을 향해 말을 걸어와 우리와 함께 어울리기를 간청한다. 힘없이 보이는 그 사내는 저녁을 사겠다고 하며 근처의 중국요리 집으로 들어간다. 그리고는 조심스레 자신의 아내가 급성뇌막염으로 죽었고, 그녀의 시체를 병원에 팔았다는 이야기를 한다. 직업은 서적 월부 외판원이었다는 것, 옛날에 부인과 재미있게 살았다는 것 등을 누구에게라도 얘기하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다며 말을 계속한다. 나와 안은 그 자리를 피하고 싶지만 눌러앉아 있을 수밖에 없다. 사내는 아내의 시체를 판 돈을 모두 써 버리고 싶어했고, 우리에게 돈이 다 없어질 때까지 함께 있어 주기를 부탁한다.
중국집에서 나와 우리는 양품점 안으로 들어가서 알록달록한 넥타이를 하나씩 사고 귤도 산다. 돈의 일부를 써 버렸지만 아직도 얼마의 돈이 남아 있다. 그때 우리 앞에 소방차 두 대가 지나갔고, 사내는 소방차 뒤를 따라 가길 원한다. 택시를 타고 화재가 난 곳에 도착해서 불구경을 한다. 그런데 갑자기 사내가 불길을 보고 아내라고 소리친다. 그러고는 남은 돈과 돌을 손수건에 싸서 불 속에 던져 버린다. 결국 그 돈은 다 쓴 셈이 되었고 우리는 약속한 대로 가려 했지만 사내는 우리를 붙잡는다. 혼자 있기가 무섭다는 것이다. 그는 오늘밤만 같이 지내길 부탁하며 여관비를 구하기 위해 근처에 함께 들르길 요청한다. 사내는 남영동의 한 가정집 대문 앞에 멈춰 벨을 누른다. 그리고 울음을 터뜨리며 월부책 값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한다. 우리는 거리로 나와 여관으로 들어간다. 여관에 들어가서 우리는 방을 몇 개 잡을 것인가에 대하여 약간의 이견을 갖게 되나 각자 방을 정한다.
다음 날 아침 사내는 죽어 있다. 안과 나는 성급히 거리로 나온다. 안은 그 사내가 죽을 줄 알았다는 것, 그래서 유일한 방법으로 혼자 놓아둔 것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참혹한 죽음의 광경을 보고 스물다섯 살짜리이지만, '이제 너무 많이 늙었다'는 말을 되씹으며 헤어진다.
핵심 정리
- 배경 : 시간(1964년 어느 겨울밤). 공간(서울)
- 표현 : 무의미한 대화의 연속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제재 : 연대성이 없는 세 사내가 우연히 만나 하룻밤을 함께 지낸 이야기
- 주제 : 사회적 연대감과 동질성을 상실한 현대인의 소외. 주체성 없는 현대인의 삶의 현실의 부적응으로 인한 삶의 허무 인간의 거짓 희망과 과장된 절망에 대한 진지한 응시
등장 인물
- 나 : 화자(話者). 육사에 실패하고 구청 병사계에서 근무하는 스물다섯 살 난 시골 출신의 고졸 학력의 주인공. 현실에서 소외된 채 심한 고독감을 느끼면서 살아가는 정적인물. 확실한 주관이 없는 회색적인 인물.
- 대학원생 안 : '나'와 동갑으로 부잣집 장남이며 대학원 학생. 그 역시 삶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며 순간적인 초윌을 통해 자기 구원을 시도한 정적인물. 염세주의적이고 개인주의적인 사람.
- 아저씨 : 서른 대여섯 살의 가난한 서적 외판원. 마누라 시체를 병원에 팔아 심한 죄책감과 자의식에 빠져 괴로워하다가 자살한 동적 인물. 도시인의 소외와 고독을 대표하는 인물.
이해와 감상
김승옥은 현대 사회에서 개체화되고 소외된 인간들을 주로 다루고자 하였다. 이 작품은 세 사람의 사내가 우연히 만나고, 교환하고, 헤어지는 풍경을 통해 우리 사회가 서구와 같이 고립화․개체화되고 있음을 극명하게 보여 주는 작품이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1964년 겨울의 서울을 배경으로 현실에서 소외된 고독한 세 인물이 서로 무심하게 만나고 헤어지는 사건을 통해서 사회적 연대성을 잃은 현대인의 삶을 그리고 있는 것이다. 이 소설에서 사건다운 사건은 세 사람이 갈 데 없어 헤매다가 목격한 화재, 중년 사내로부터 들은 그의 아내의 비참한 죽음, 그리고 다음날 아침 사내의 죽음뿐이다. 그러나 이런 사건은 ‘나’와 대학원생인 ‘안(安)’에게는 하등의 관심거리가 되지 않는다. 화재는 화재일 뿐, 내일 아침 신문에서 볼 것을 오늘밤에 미리 본 것에 불과하다. 중년 사내가 아내의 죽음을 이야기하고, 그 주검을 실험용으로 팔고, 또 그 돈으로 술을 샀음에도 불구하고, ‘나’와 ‘안’은 “네에에, 그거 안되셨군요.”라고 말할 뿐이다. 죽음 자체가 사소한 것이 아니라 타인에게는 그 죽음이 사소하게 느껴질 뿐이다./ 이 소설의 인물들은 처음 만날 때부터 돈에 대한 인식에서 철저하게 개별화되고 있다. ‘나’와 ‘안’은 선술집에서 우연히 함께 술을 마시고 자리를 피할 때에는 각자 계산을 하기 위해 호주머니에 손을 넣는다. 중년 사내가 동행을 제의할 때에도 자기 술값이 동행의 전제 조건이 된다. 뿐만 아니라, 세 사람이 함께 여관에 들었을 때에도 이들은 제각기 다른 방에 들게 된다.‘벽으로 나누어진 방들, 그것이 우리가 들어가야 할 곳’이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에서 두드러진 점은 ‘나’와 ‘안’이라는 새로운 인물 유형이다. 선술집에서 만나 대화를 나누는 동갑내기인 이들은 결코 그들의 자신에 대해 말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알고 있는 것, 느꼈던 것만을 주고받는다. 사회적 연대감이나 공동체성을 완전히 상실한 비극적이고 외로운 현대인의 초상이 잘 나타나 있다. 이들의 대화와 행동을 통해 우리는 당대의 도시적 삶의 황폐성과 파편성, 그리고 왜곡된 개인주의의 심화된 양상을 읽을 수 있다.
일찍부터 이 작품은 1960년대적 의식의 방황을 그렸다는 점에서 의의가 큰 작품으로 인정받아 왔다. 1950년대의 도덕주의적 엄숙성을 지닌 문학의 경향에서 탈피하여 도시에서 소외당한 현대인의 고독과 비애, 그리고 고립을 그리고 있다. 특별한 사건은 없이 우연한 만남을 이룬 세 사나이의 비현실적 대화의 행동을 통해 전망 없는 세계에 처한 삶의 부조리성을 드러낸다. 소위 4․19세대가 일으킨 ‘감수성의 혁명’의 맨 앞자리에 놓이는 김승옥 문학의 대표작으로, 감각적이며 유희적인 문체가 인간관계의 단절상을 극적으로 제시하게 되는, 반어적인 성취가 이루어진다. 인간끼리의 진정한 자아로서의 만남이 불가능해진 현대 사회의 어두운 뒷모습을 ‘의도된 어색함의 상황’에 담아 보인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대학원생 안씨와 서적 외판원 아저씨는 결국 1960년대 우리 사회가 가질 수 있는 전형적(대표적) 개인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