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13) 사물의 감각화 - ② 물의 이미지와 시적 변용 5-2/ 시인 송수권
사물의 감각화 - ② 물의 이미지와 시적 변용 5-2
Daum카페 http://cafe.daum.net/guardianangel [성경 속 상징] 1 -물 : 구원과 생명
㉰ 물의 상징과 시
위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물(水)은 단순한 기호(sign)라는 물리적 체계가 아니라
상징적 표상(symbolic representation)으로서 삶과 문화와 역사의 전반을 아우르고 있다.
카시러(E. Cassirer)는 상징과 기호를 다음과 같이 구별하고 있다.
예를 들면 기호는 지시하는 의미가 1:1의 관계이고 상징은 1:다수(다의적)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빨간 불=멈춤, 파란 불=감’처럼 기호는 지극히 단순한 지시성을 띠지만
상징은 의미 있는 세계의 다양성을 지닌 표상능력으로서의 기능적 가치인 것이다.
더 쉽게 말하자면, 여러분은 일본영화(소설) 〈철도원〉을 본 일이 있을 것이다.
늘 그 자리에 서서 말없이 푸른 깃발만을 흔드는 사내,
‘당신은 죽어서 돌아오는 우리 아이까지도 그 깃발로 맞이하는군요!’
이 기호(신호)에 애통해하거나 슬퍼하는 감정이 담길 수 없음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다.
개나 새도 기호적인 언어를 소유하지만 그 언어는 상징적 의미체계,
즉 개념을 모두 상징적 표현으로 완성할 수 없다.
이러한 상징적 현상의 창조활동이 곧 인간의 문화(culture)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물은 기호의 지시가 아니라 상징의 의미체계로서 시 창작에선 가장 중요시되는 질료인 셈이다.
각 시인들이 그들의 삶의 정신을 어떻게 물의 이미지에 담아내 작품을 완성하였는지
그 비밀을 밝혀보는 것도 대단히 흥미 있는 일 중 하나가 될 것이다.
바람도 없는 강이
몹시도 설렌다
고요한 시간에
마음의 밑둥부터가
흔들려 온다
무상(無常)도 우리를 울리지만
안온(安穩)도 이렇듯 역겨운 것인가?
우리가 사는 게 이미 파문(波紋)이듯이
강은 크고 작은 물살을 짓는다.
―구상, 〈강〉 연작 부분
여기서 강은 그 자체가 하나의 살아있는 생명체다.
바람이 있어야 파문을 짓는다는 건 하나의 상식적 논리이지만,
바람이 있건 없건 강은 벌써 하나의 물살을 지으며 흘러간다.
그러한 강을 고요한 시간에 응시할 때 ‘삶이란 무엇인가.’를 묻게 되고,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그 무상함이 우리를 울리지만 그렇다고 그 무상함에 삶을 기댄다면 삶의 깨달음 또한 무상할 수밖에 없다.
“바람도 없는 강이/ 몹시도 설렌다”는 1연은 그래서 의미심장하다.
이 설렘이 곧 무상함이 무상하지 않게, 안온함이 안온하지 않도록 시인의 마음작용을 일깨우고 있다.
무엇인가 뜻을 세워 강물이 바다에 닿듯이 파문을 일으키는 것이 곧 삶의 의미이고 삶의 순리다.
그래서 오늘도 강은 저 혼자 고요하고 설레면서 크고 작은 물살을 짓는 것이리라.
그래서 이 시는 달관된 삶의 철학을 ‘강’에서 배우는 것이다.
‘이것이 삶의 원칙’이라는 자성(自省)의 길에서 강물은
하나의 상징적(기호가 아닌) 의미로 변용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겨울 강에 나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돌 하나를 던져본다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쩡, 쩡
돌을 튕기며, 쩡
지가 무슨 바닥이나 된다는 듯이
쩡, 쩡, 쩡, 쩡, 쩡,
강물은 쩡,
언젠가는 녹아 흐를 것들이, 쩡
봄이 오면 녹아 흐를 것들이, 쩡, 쩡
아예 녹기도 전에 다 녹아 흘러버릴 것들이
쩡, 쩡, 쩡, 쩡, 쩡,
겨울 강가에 나가
허옇게 얼어붙은 강물 위에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수도 없이 돌들을 던져본다
이 추운 계절 다 지나서야 비로소 제
바닥에 닿을 돌들을,
쩡 쩡 쩡 쩡 쩡
―박남철, 〈겨울 강(江)〉 전문
강과 바다가 백 개의 계곡물을 다스릴 수 있는 것은 낮은 위치에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물은 자신을 낮추어 만물이 이롭지 않은 것이 없다.
추우면 얼고 더우면 녹아 제 갈 길을 간다. 얼어붙은 겨울 강가에 나가 돌을 던져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계절이 여름인 상하(常夏)의 나라 사람에게는 이런 경험이 없을지도 모르겠다.
눈썰매를 타고 스케이팅을 하려고 동남아 사람들의 겨울을 찾아 관광을 오는 것도 이 때문인지 모르겠다.
이 시는 빙판에 돌을 던짐으로써 울려 퍼지는 음역(소리)의 확장에 의해 의미영역이 점점 넓어지고 있는
시적 효과가 백미편에 든다.
모름지기 의성어나 의태어는 이런 시적 울림이 없을 경우 사용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초보자들에게 들려줄 만한 이야기다.
겨울 빙판에 돌을 던지고 얼어붙은 눈물을 핥으며,
고독한 자신의 존재를 들여다보는 또는 확인하는 모습이 객관화되어 있어 정서적 충격까지를 맛보게 한다.
삶이란 빙판에 돌을 던지는…… 그리고 되울려오는 그 소리를 들어내야 하는 모순적 존재 확인이 각인되어 있다.
겨울 나루터에 빈 배 한 척이 꼼짝없이 묶여 있다.
아니다! 빈 배 한 척이 겨울 나루터를
단단히 붙들고 있는 것이다.
서로가 홀로 남기를 두려워하며
함께 묶이는 열망으로, 더욱 가까워지려는
몸부림으로, 몸부림 끝에 흘리는 피와
상처로,
오오 눈물겹게 찍어내는
겨울 판화(版畫)
―이수익, 〈겨울 판화(版畫)〉 전문
얼어붙은 겨울 빙판에 돌을 던지고 되돌아오는 그 소리를 들어내야 하는
현대인의 삶은 〈겨울 판화〉에서 보다 아프게 각인된다.
이 헐벗은 풍경을 있는 그대로 복원해 판화로 찍어낸 풍경은 이 이상 더 아플 수 없는 비극적 고통의 풍경이다.
서로가 이를 악물고 어떻게든 이 강추위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열망과
이를 악물고 버텨내려는 극기(克己)의 몸부림은 그대로 얼음판에 돌을 던져보는 행위와는 또 다른,
즉 그 행위와 주체마저 보이지 않는 객관화된 풍경으로 철철 피를 흘리게 한다.
그러므로 시란 설명이나 구차한 진술이 필요 없는 이와 같은 그림 한 폭이면 족하다.
‘너는 겨울 나루터, 나는 거기에 묶여 있는 빈 배’,
이 두 개의 정물이 만들고 있는 겨울 강가에서 우리가 살아남는 방법은
‘열망’ 말고는 다른 방법이 없다는 극기의 정신을 이 시에서 읽어낼 수가 있는 것이다.
< ‘상상력 개발을 위한 유형학습, 시창작 실기론(송수권, 문학사상, 2017)’에서 옮겨 적음. (2021. 3.2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13) 사물의 감각화 - ② 물의 이미지와 시적 변용 5-2/ 시인 송수권|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