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뉴스N제주 신춘문예 / 황세아
부처님이 낸 소문을 들었다 / 황세아
- 실상사 약사전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단 얘기 탓인지
불상의 양 손이 시커멓게 닳았다
누가 오나, 주윌 살피던 누군가
더듬었을 두 손에 목탁소리 이고 온
햇살이 올라서는데, 가만 곁을 살피니
사하라, 사나운 모래바람 앞인 듯
게슴츠레 뜬 저 두 눈!
피부 곳곳 긁히고 멍이 든 흔적!
혹시 그는 지금 공중에 앉아
부동으로 각 처를 돌아다니는 중이신가
하늘 안방에 들앉은 태양처럼
칩거로 전국을 유람했을 법한
저 약사불!
그의 말씀이었을까
마사하면* 소원이 이뤄진단 얘기!
세간을 풍문으로 떠돌다 모른 척
가부좌 틀고 앉은 이 철제여래속설에
흑심의 손바닥이 얹힌다
문득 북적대는 소리, 솟을꽃살문 틈을 보니
앞마당 석탑 앞 합장과 탑돌이 기와불사들
땡볕이 슬며시 두드리자 살갗문 열고 나와 뻘뻘
흐르던 불심佛心의 물주머니에 담기는 그들
정신을 다시 방에 들여놓으니
시커멓게 닳은 내 손을 불상이 쓰다듬고 있다
게슴츠레한 눈, 결가부좌로
허공에 올라앉은
내 양손을
마사하다
* 손으로 주물러 어루만지다 또는 손으로 문지르다
[당선소감]
컵밥을 먹는 도중에 당선 연락을 받았습니다. 제가 사는 고시원 앞 이백미터 즈음엔 컵밥 거리가 있는데요.
출출할 때마다 포차에 가서 컵밥을 주문한 뒤, 철판 위에서 볶아지는 고기와 채소, 밥,
계란들을 가만히 보고 있으면 햐~ 내 시도 딱 저렇게만 볶아졌으면,
그래서 이 한 겨울 누군가의 마음 속 허기를 따스하게 채워졌으면 하는 바램이 들곤 합니다.
물론 요즘은 배달음식이 유행이라 휴대폰 화면을 몇 번 터치하면 집에서
간단하게 음식을 먹을 수 있어 좋긴 하지만,
저는 재료들이 비벼지고 볶아져 완성에 이르는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컵밥이 훨씬 더 좋습니다.
이러한 과정으로 탄생된 것들 앞에 서면 왠지 모르게 허리가 숙여지고,
아주머니가 건네주는 컵밥도 두 손으로 받아들게 됩니다.
맛이 일품인 건 두말하면 잔소리겠죠.
책상 앞에서 언어를 아무리 비비고 볶아도 나는 왜 그런 맛이 나지 않을까,
왜 그런 맛이 나지 않을까,
왜 그런 맛이 나지 않을까 자책을 하다보면 허기는 다시금 내 뱃속을 찾아옵니다.
그렇게 꼬르륵, 소리가 귓가를 스치는 것을 신호로 저는 또 시를 쓰다 말고 컵밥 거리로 갑니다.
마음 속 허기를 제일 먼저 채워야 할 사람은 저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래 가지고 언제 맛있는 시를 쓸 수 있나, 언제 맛있는 시를 쓸 수 있나,
언제 이 컵밥 같은 시를 쓸 수 있나 타박 아닌 타박을 자신에게 하면서
컵밥을 먹는 도중에 당선 연락을 받았습니다.
대낮의 햇빛에 검게 타버린 하늘과 튀겨진 별들이 제 머리 위로 한창 반짝이던 때였는데요.
앞으로 제 시를 타박할 일이 더 많아질 것 같아서 한 편으론 두렵기도 하고
그만큼 컵밥 거리를 자주 가게 될 것 같아 또 한편으론 즐거운 마음도 들었습니다.
변변찮은 작품이지만 맛있게 읽어주신 심사위원님들께 다시 한번 감사를 드립니다.
그리고 순정시대 카페 연우님들과 정전스님, 영적인 동생 최성우, 부산 싸나이 윤정환씨,
컵밥 동료 핑크형, 경기호 사장님, 울릉활기원 황동구 선생님,
찾아갈 적마다 상냥한 미소로 컵밥을 볶아주신 아주머니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보다 더 맛있는 시를 만들도록 노력에 노력을 거듭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심사평] 비유로 무장된 탁월한 시상
이번 신춘문예는 ‘뉴스N제주’라는 신문사와 ‘시를사랑하는사람들 전국모임’과
‘한국디카시연구소’라는 전국적인 단체가 ‘공동주최’하는 형식을 취함으로써
여타의 신춘문예와는 차별성이 있었다.
시 부문만 1113명이 3507편을 응모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아서 응모작을 확인하기도 했다.
결론은 주최 측의 열정과 치밀한 계획,
그리고 응모자들이 메이저급이 아닌 소위 말해서 하향 지원을 한 것이라는 느낌을 받았다.
작품성을 이유로 너무 난해하게 쓴 것은 제외 했다는 운영위원장의 귀띔에서
시가 요구하는 근본 방향을 잘 잡았다는 생각을 했다.
신달자 시인과 허형만 시인, 필자는 이 작품을 보내기 위해 노력했을 응모자들의 간절한
마음을 알기에 예심을 통과한 52편의 작품을 꼼꼼히 읽고 서로의 의견을 교환했다.
마지막까지 남은 두 작품은 각기 우수한 작품이었다.
<부처님이 낸 소문을 들었다>(황세아)와 <숨바꼭질>(신계옥)이 그것이었다.
<숨바꼭질>은 잃어버린 엄마와 그 이후의 아버지 시간이 대조되어 나타난다.
어쩌면 소설 <엄마를 부탁해>를 연상시키기도 하지만 앞뒤 구도는 서로 다르다.
엄마를 잃어버린 시간에는 슬픔을 숨기기 위해 허둥거리기도 하고 웅성거리는
사람들의 혀끝에 놓이기도 하면서 그 공간에는 아버지의 서툰 앞치마가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나 나비 한 쌍 해후의 기쁨으로 하늘은 날아오르고 양위분은 목관에 나란히 눕게 되고
비로소 자유로워지는 술래의 자리! 나비의 해후, 별것 아닌 구도로 팽팽한 긴장을 만들어내는
시인의 감각이 돋보인다.
<부처님이 낸 소문을 들었다>는 불상을 만지면 소원이 이뤄진다는 부처의 영험에 대한 작품이다.
너무나 사람들이 불상의 두 손을 만져서 반질반질 닳았다는 이야기다.
부처로 들어가서 시인은 부처도 사찰에 있는 부처가 아니라 열사의 사막 사나운 바람 쓸고 지나가고
피부가 긁히고 멍이 든 상태의 지극한 통고의 부처로 형상화한다.
그러므로 침거로 전국을 유람하는 저 약사불이요 공중에 앉아 부동으로 돌아다니는,
또는 가부좌 틀고 앉은 변화무쌍의 부처이다.
시는 마지막 연에서 어느 순간 시커멓게 닳은 내 손을 불상이 쓰다듬고 있다는 반전의 극이다.
이미지와 비유가 더할 수 없이 정교하고 기초가 단단한 교과서적이므로 시를 공부하는 사람들이 참고할만하다.
이 시인은 이 점에서 신인이 신인을 벗어나 저만치 달려가고 있다는 느낌을 준다.
우리 선자들은 그런 점에서 <숨바꼭질> 쪽에서 눈길을 <부처님이 낸 소문을 들었다>로 이동하여
들여다보며 당선의 손을 잡아 주었다.
<숨바꼭질>의 시인도 분발하며 차기를 위해 준비해 주었으면 한다.
- 본심위원 신달자, 강희근(글), 허형만, 예심위원 윤석산, 이어산, 현달환, 장한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