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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 지역의 고구려 성 유적지를 1년 넘게 보고 또 보면서 생각을 해 봤는데요.
이 지역들을 역사적 사건과 경제를 연결해 봤더니 꽤 흥미로운 내용이 그려집니다.
위 그림은 광개토태왕과 장수왕 때를 나타낸 것입니다.
먼저. 광개토태왕은 수군으로 강화도, 인천, 화성으로 들어와 백제의 항복을 받아내는데요.
이때 고구려가 획득한 지역이 어디였을까요?
충주, 진천, 단양, 청원, 대전에 고구려성 유적지가 존재하므로 이곳과 연계할 수 있는 있는 지역은
화성, 수원, 평택, 안성, 이천, 여주, 음성, 진천, 청원, 대전등 넓은 평야 지역의 곡창입니다.
고구려는 군사적으로 방어하기 좋은 충주에 성을 쌓아 본진을 구축하는데요.
이천과 여주부터 진천까지 연결되는 곡창을 지키는 핵심 보루인 것입니다.
진천은 평택이나 화성등의 주요 항구와 연결하는 요해처로 보이구요.
그런데 광개토태왕 때의 한강 북쪽은 백제의 영토였습니다.
바닷길로 연결이 가능하고, 북한산성 지역은 오랫동안 국경 지역이다 보니 점령이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광개토태왕은 충주에 군사 5만을 두어 성을 쌓아 새로 확보한 땅을 지켰던 것 같습니다.
시간이 지나고...
장수왕때 백제와 신라가 동맹을 맺으면서 다시 전쟁이 발발하게 되는데요.
475년, 장수왕은 위례성을 빼앗고 한강 북쪽을 확보하게 됩니다.
이 점이 아신왕은 살고, 개로왕은 참수당하는 이유가 아닐까요?
아신왕 때는 북한산성 지역이라는 전략적 거점이 존재했지만, 개로왕때는 협상 카드가 사라진 것입니다.
북한산성 지역에 있던 백제가 사라지면서 고구려는 충주지역에 병력을 집중시킬 수 있었을 것입니다.
그림의 장수왕 1과 장수왕 2 지역은 교전 지역을 나타난 것입니다.
신라의 반격
551년 백제와 신라는 동맹을 맺고 고구려를 공격해 한강 유역을 차지하게 됩니다.
고구려의 충주 지역 방어선이 붕괴된 것입니다.
고구려는 일시적으로 한강을 두고 대치하지만 553년에 신라 진흥왕은 북한산성 지역까지 차지하게 됩니다.
이때 고구려는 백제와 신라의 동맹을 깨기 위한 계략을 꾸미게 됩니다.
신라에게 새로 획득한 땅의 권리를 주면서 백제와 신라 사이를 이간질 한 것입니다.
신라가 새로 차지한 땅은 원래 백제의 영토였습니다.
백제는 이땅을 차지하기 위해 막대한 인력과 물자를 동원했는데 신라에게 배신을 당했고...
고구려가 신라에게 명분을 제공하니 백제는 분통을 터트렸을 것 같은데요.
아무튼, 이 일로 나제 동맹은 끝 났고, 백제와 신라는 원수처럼 싸우게 됩니다.
진흥왕은 함흥지역도 획득합니다.
그림을 보시면 알겠지만 함흥지역은 육상으로 움직이기에는 멀고 불편합니다.
게다가 서해안과 달리 동해안은 작은 마을 몇 개가 전부입니다.
교통도 불편하고 경제적으로 가치가 높지 않은 곳에 많은 병력을 두고 지킬 이유가 없지요.
그래서 559년 고구려 평원왕이 군대를 보내자 이곳을 버리고 고성 지역으로 퇴각해 버립니다.
이후로 삼국은 교착상태에 들어가고...
고구려의 국경은 임진강과 고성군을 두고 신라와 대치하게 됩니다.
고구려-수나라 전쟁때 신라가 획득한 500리 땅.
612년,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자 신라가 고구려의 500리 땅을 차지하게 됩니다.
그런데 그곳이 어디일까요?
함흥지역일까요?
학계에서는 함흥지역으로 설명을 하고 있지만 저는 그쪽은 염두에 두지 않습니다.
그쪽은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땅이기 때문입니다.
연개소문이 말합니다.
"옛날 수나라가 우리를 침략하였을 때, 신라가 그 틈을 타서 우리의 성읍 5백 리를 빼앗아갔다."
"이로인해 원한과 틈이 오래되었으니, 우리에게 침탈해간 땅을 돌려주지 않는다면 전쟁을 그만 둘 수 없다."
이 내용을 통해 알 수 있는 사실이 2가지가 있습니다.
1. 500리 땅은 고구려의 본토이다.
- 고구려는 백제에게 빼앗은 땅(한강유역)에 대해서 신라에게 권리 양도를 해 줍니다.
그러므로 연개소문이 말한 땅 500리는 백제에게 빼앗은 땅이 아닌 옛부터 고구려의 영토임을 알 수 있습니다.
2. 전쟁을 그만 둘 수 없을 만큼 중요한 땅이다.
- 함흥지역은 가치가 적어 고구려가 맘만 먹으면 언제든지 빼앗을 수 있는 땅입니다.
- 함흥지역은 임진강을 방어선으로 하고 있을 때 신라 점유가 쉽지 않은 곳입니다.
함흥지역을 제외하면 그곳은 딱 한 곳입니다.
개성 - 연안 - 해주 - 신천 - 재령 - 사리원 - 황주 (500리 - 200km)
서해안은 좋은 항구가 많지 않습니다.
해주와 남포 정도입니다.
즉, 아주 중요했던 전략적 요충지가 바로 해주였고, 연개소문이 그 곳을 달라고 한 것입니다.
이 내용은 당이 고구려에게 신라를 공격하지 말하고 설득하던 상황입니다. (고구려가 망한 상태가 아님)
신라는 당연히 안된다고 했을 거구요.
고구려가 해주를 잃게 된 배경은 수나라 침공때입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공할 때 동원한 선박이 수백척인데요.
고구려가 수나라를 막으려면 수군을 총 동원해야 합니다.
당연 해주에 있던 수군도 예외는 아니었을 것입니다.
가설입니다.
고구려가 해주의 수군을 다른 곳으로 빼냈고, 신라가 그 틈을 노려 해주를 공격했다면...
지도에서 고구려 성을 보시면 알 수 있습니다.
임진강에서 신천읍까지 고구려 성이 늘어서 있는데요.
해주를 잃으면 우회로 때문에 임진강 방어선은 고립되어 무력화됩니다.
또한 신천의 방어선도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는 수나라 침공에 대비해 꼭 필요한 수비 병력만 남기고 갔다면...
신라는 손쉽게 500리 땅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고구려 신라의 국경은 대동강.
대동강 북쪽의 고구려 성들이 배치되어 있는 형태를 보면서 고구려의 방어 개념을 생각해 봤는데요.
수도를 중심으로 진을 펼쳤다고 보기에는 너무 엉성한 구조여서 이상하다 싶었습니다.
그런데 500리 땅을 추적하면서 대동강을 국경으로 생각하고 보니 비로서 구조가 눈에 들어오더군요.
대동강을 국경으로 지키고 후미의 요충지에 성들이 놓여 있는 구조였던 것입니다.
고구려는 해주를 잃은 후에 엄청난 손실을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백령도 - 해주 - 인천 - 덕적도를 잇는 해상권을 잃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육로로 북한산성 쪽을 공격하게 되는데요.
가장 효과적인 공략법으로 배후에 위치한 북한산성이었던 것 같은데...
어려운 일이었고 고구려는 실패합니다.
고구려와 당의 전쟁이 벌어지고 신라는 고구려 남쪽을 공략합니다.
저는 요양시 주변에 평양성이고, 현 평양은 장안성이 있었던 것으로 생각하고 있는데요.
신라가 수나라때 대동강까지 확장을 했다면, 당나라때 공략한 고구려 남쪽은 해안선에 있을 것입니다.
김유신이 평양성으로 식량 운반을 했다는 기록도 해상으로 이동한 후 옮겨 졌을 가능성도 높아졌고...
신라 입장에서 보면 만주땅을 밟았다는 것이 당대 큰 이슈를 불러올만큼 큰 사건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신라가 연정토로부터 받은 12성의 위치도 만주까지 확장 가능합니다.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왔다갔다 했던 이해하기 힘들었던 내용들도 조금씩 풀리는 것 같은데요.
신라가 빼앗은 고구려 땅을 당나라가 내 놓으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는데요.
그 지역을 요동반도 쪽으로 보면 꽤 재미있을 것 같습니다.
당시 고구려는 망한 후 당의 위성국가가 된 상태입니다.
당나라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신라에게 고구려에게 빼앗을 땅을 내놓으라고 했을 거구요.
그리고 나당 전쟁때 당과 신라가 압록강에서 싸웠는데요. (수군 전쟁)
현 요하를 압록강이라고 했을때 평양성 남쪽을 신라의 땅이라고 하면 설득력을 갖게 됩니다.
참고로,
당 소정방이 백제를 공격하러 왔을때, 신라는 덕적도에 선박 100여척을 이끌고 당을 마중합니다.
덕적도는 육지에서 꽤 떨어진 곳으로 이곳을 출입하려면 배들은 꽤 커야 합니다.
즉, 먼 바다를 다닐 수 있는 전선 혹은 수송선 100여척을 이끌고 왔다는 것입니다.
이 내용을 볼 때 이 시기의 신라의 수군은 생각보다 규모가 컸을 것으로 보여집니다.
첫댓글 잘 보았습니다.
이번엔 한반도 내에 관한 것이라 특별히 할 말은 없는데 지금의 요하를 압록강으로 보는 것이나 평양을 지금의 요양으로 보는 것에 대해서는 질문하지 않을 수가 없군요.
이전에 용성에 관련한 글에서, 낙랑군 위치를 지금의 발해 북안에 비정하셨는데, 현 한국통설은 낙랑군 지역 내에 조선의 왕검성 곧 고구려의 평양성이 있었다고 보고 있고 저 또한 그렇게 생각하기에 평양성을 지금의 요양이라 비정하는 것을 납득할 수가 없군요. 지금의 요양이라 비정할 만한 근거가 있나요?
기록을 보면 고구려는 수도를 자주 옮기는데요. 대부분 전략적 거점(국경 인근)으로 전진 배치를 합니다. 국내성, 환도성, 장안성등이 대표적인데요.그래서 고구려에는 다수의 평양이 있었고, 그 중 마지막 수도를 평양성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요양 지역은 오랜기간 전쟁에서 벗어난 곳이며, 교통의 중심지여서 경제적으로 번화했던 곳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고구려 후기에 가장 번화했던 곳). 요양 지역에 평양성을 둔 이유는 고-수, 고-당 전쟁등을 분석하면서 압록강 동쪽이라는 점과 지리적 거리(해안에서 150km~160km)등을 고려하여 설정한 것입니다.
고구려 시기의 압록강이 지금의 요하라면, 당시의 요하를 지금의 어느 강으로 지목하시는 것인지요?
답 주세요.
요하를 비정하지 못하면 고구려를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