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뉴스N제주 신춘문예 / 서동석
발포진 랩소디 / 서동석
하늘에도 물길이 있어요 비와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이죠
낙엽도 허공에서 노를 저어요
겨울나무들은 흔들리지 않기 위해 허공 깊이
닻을 내리는 법을 알죠
좌현 쪽으로 기울던 오동나무 잎이 다급히
우현으로 몸을 틀어요
놀라지 마요
이곳에선 파도치고 배가 드나들 듯 흔한 일이죠
운이 좋으면 좌초된 해초 한 줄기에
당신의 오후가 생포될 수도 있어요
그럴 때는 그를 알아볼 순간이 필요해요
어쩌면 어선 위에서
젊은 어부가 되어 양식한 물김을 뜯고 있거나
또 모르지요 누각에서 홀로 일기를 쓰고 있을지도
해풍이 부는 밤바다에서 어떤 그림자를 보거든
신호를 보내듯 말을 걸어야 해요
이렇게 물어보는 건 어때요?
혹시 12라는 숫자를 좋아하세요?
아니면 푸른 버드나무 냄새가 훅, 스치거나
정강이 어디쯤을 조금씩 절고 있는지 재빨리 살펴요
그가 조금만 망설여도
당신은 바로 돌아서는 것을 잊지 말아요
고독한 수염 과묵한 입술과 눈빛
밤이라면 횃불 하나는 오른 손에 꼭 챙겨요
가끔은 내 안에서도 횃불이 번지긴 해요
나도 내가 누군지 잘 몰라요
우리는 서로를 모르기에 낯익은 사람들
물가에 가면 *두정갑옷을 입은 듯 몸이 무거워요
온 몸이 비늘이에요 두드러기처럼 매일 철갑이 돋아나요
발포진에서는 환한 귀가 필요해요
깊은 밤 물가에 서서 눈 감고 하나, 둘, 셋, 세어 봐요
바람 속에서 갑옷의 기척이 먼저 말할 거예요
손 내밀 거예요
발포만호의 손에서 물비린내 날 거예요
손바닥에 짠 내 밴 굳은살이 쓸쓸할 거예요
밤이면, 그날의 수군(水軍)들이 지금도
송판으로 판옥선을 만들고 돛을 달아요
거북선 위에서 망치질 소리 들려와요
잠깐, 포구 저쪽이 술렁여요
순시를 마치고 돌아온 그가 한쪽 손에 등채*를 들고
나를 향해 걸어와요
그의 한쪽 가슴에 활 맞은 자국이 보여요
설마 그의 눈에 내가 보이는 건 아니겠죠?
아직 나를 들켜선 안 돼요
붉은 두정갑옷이 내 앞에 당도 했어요
해풍의 냄새를 맡은 장군 어깨의 견룡이
구름을 박차고 날아올라요
내 말을 아무도 믿지 않겠죠? 심장이 터질 듯한 밤이에요
[당선소감] "시와 어머니, 단단히 잠긴 두 개의 문"
어머니의 기억은 어디쯤에서 길을 잃은 것일까요? 오늘 아들에게 기쁨이 찾아온 날이라는 것을…,
저를 보며 부용꽃처럼 웃으시는 어머니가 아시든 모르시든,
오늘은 조금 환하게 어머니를 안고 걱정 없이 웃어보고 싶습니다.
시를 쓰기 시작한 후부터 풀지 못한 숙제가 매일 저를 따라다닙니다.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사유의 열쇠들, 어제도 오늘도 아마 내일도 어쩌면 시는 저에게 그런 신기루일 겁니다.
그에게로 가 닿는 길이 이리 먼 줄 몰랐습니다.
그날도 몇 줄 생각을 깎느라 안양천을 걸었습니다.
모든 것들이 떠나가는 겨울 강가에서 뜻밖의 전화를 받았습니다.
그러고 보면 이 겨울에도 떠나는 것만 있는 것은 아닌가봅니다.
전화기 저쪽에서 제게로 도착한 몇 마디의 소식은 제게 손난로처럼 따뜻했습니다.
시시각각(詩視刻各)에서 감각의 고랑을 일구는 문우님, 시금치창작반, 시클 시창작반 문우님들 함께 공부한 모든 문우님 감사합니다.
그리고 시의 길로 이끌어주신 김순진 선생님, 전영관 선생님 감사드립니다.
이번 생에서 따뜻한 울타리로 묶인 사랑하는 가족의 응원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내가 계속 걸어야 하는 이유이자, 내 안의 등불이신 어머니,
사랑하는 당신은 나를 전진하게 하는 연료인 것 아시죠?
부족하고 흠 많은 제 글과 저에게 손잡아주신 심사위원 선생님과 <뉴스N제주>에 머리 숙여 감사인사를 올립니다. 이제야 출발선에 섰습니다. 항상 노력하며 부끄럽지 않은 글을 쓰겠습니다.
[심사평] "전인적 인식과 반응을 포괄한 창조적 작품“
예심을 통과한 작품 139편을 넘겨받은 강희근 시인과 나는 코로나19로 인한 비대면 심사방법으로 각자 자기 집에서 최종적으로 두세 편씩 골라 온라인으로 논의하기로 했습니다.
꼼꼼하게 작품을 살펴볼 여유가 있어서 심사하는데 오히려 좋은 환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두 사람 모두가 김순애씨의 「백사장 리사이틀」(접수번호 412번)과 서동석씨의 「발포진 랩소디」(접수번호 4번)를 고르는 겁니다.
음악을 제재로 삼은. 하지만 염두에 둔 당선작은 각기 달랐습니다.
저는 파도에 대한 감각을 형상화하는데 그치지 않고 그 이미지들을 이용하여
또 다른 세상을 창조하려는 김순애씨 작품을 내심으로 꼽았습니다.
그러나 강 선생님은 예심의 기준에 ‘현실감과 역사성’을 추가하자면서 서동석씨의 작품을 말씀하시는 겁니다.
제호의 ‘발포진’이 ‘포진(疱疹)’을 연상시켜 접어뒀던. 그런데, 선생님으로부터 ‘발포진(鉢浦鎭)’은 전라남도 고흥군 포구 가운데 하나로 선조 14년 5월에 이순신 장군께서 수군만호(水軍萬戶)로 처음 부임한 곳이라고 귀띔을 받는 순간 동의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늘에도 물길이 있어요 비와 바람이 드나드는 길목이죠’로 시작하는 이 작품은 ‘자연과 인사’를 융합해 ‘또 다른 세상’을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문장율’을 이용하여 자연스럽게 전달하고, 현대화라는 명분으로 ‘우리’를 외면하는 시단에 좋은 본보기가 될 것 같다는 생각에 「발포진 랩소디」를 당선작으로 올리기로 합의했습니다.
당선을 축하합니다. 시는 ‘전인적(全人的) 인식과 반응을 다 담아 또 다른 존재를 창조하는 장르’니 이 점을 평생 기억하면서 좋은 작품을 많이 쓰시고 부디 대성하시길 빕니다.
- 본심위원 강희근 시인, 윤석산 시인(글), 예심위원 윤석산 시인, 현달환 시인, 강정림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