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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와 이미지
하 재 영
오늘 이미지(Image)란 주제는 어쩌면 감당하기 힘든 내용이지 않나 생각됩니다. 이미지는 모든 종류의 예술에 마치 한약방의 감초처럼 끼지 않으면 안될 용어입니다. 그림, 조각, 사진, 춤, 음악, 하물며 스포츠에서도 이미지는 작품성을 이야기하기 이전에 독자, 청중들에게 전해지는, 그리하여 느끼게끔 하는 그 무엇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술을, 특히 시를 공부하는 한 과정에 필수조건으로 ‘이미지’가 들어있어야 하지 않나 생각했기 때문에 커리큐럼 속에 ‘이미지’를 넣은 것 같습니다.
이미지에 대한 언어적 개념을 파악한 후, 시인은 시속에 이미지를 어떻게 담고 있으며, 여러분이 시를 쓸 때, 시의 이미지 처리를 어떻게 끌고 나가야 할 것인지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이미지를 사전적 의미로 파악해보자면 ‘형상. 영상 또는 마음속에 그리는 상. 심상’입니다. 즉 우리가 겪은 여러 체험의 관념이나 정서를 사물로 바꿔 보여주는 형태를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이는 원래 심리학의 용어로 ‘머리에 떠오른 것으로서 감각적 성질을 지닌 것’ 이라 정의되기도 했습니다.
문예사조의 한 분야에 반영된 이미지즘(Imagism) 은 제 1차 세계 대전 말기로부터 재래된 전통적 시풍에 만족을 느끼지 못하는 영국과 미국의 시인들이 일으킨 신시 모더니즘 운동을 말합니다. 시각적 효과를 중요하게 여기는 이 그룹은 영상의 색채와 율동의 중요성을 주장하고, 애매한 일반 개념을 피하여 일상 적확한 용어로 새로운 운율을 창조하려 한 데에 특징이 있습니다. 문학의 갈래에서 이러한 작품을 쓴 사람들을 ‘이미지스트’라 말합니다.
좀 더 깊이 이야기하자면 이미지스트(Imagist)는 1912년 에즈라 파운드에 의해 형식화된 시적 경향을 보여주고 있는 일단의 영미시인들을 일컫습니다. 당시는 우리가 흔히 이야기할 수 있는 감정의 표현을 최대한 작품에 반영하는, 즉 풍미했던 방만한 사고방식과 낭만주의적 낙관론에 반기를 든 T. E. 흄의 비판적 견해에 고무되어, 파운드 이외에도 동료 시인인 힐다 둘리틀, 리처드 알링턴, F.S.플린트 등이 이미지스트의 대표적 인물로 꼽을 수 있습니다.
이 시인들의 특징은 정확한 시각적 이미지가 시적 표현의 전부를 이루는,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명료하고 딱딱한 형식의 간결한 시를 썼습니다. 이미지즘은 프랑스의 상징주의 운동을 이어받은 것이었으나, 상징주의가 음악과 유사성을 지닌 반면 이미지즘은 조각과의 유사성을 추구했습니다.
후일 이미지스트라 일컫는 알링턴(R.Aldington)이 쓰고 로우얼(Amy Lowell)이 수정한 ‘이미지즘 선언’을 살펴보면 이렇습니다.
1. 일상어 사용, 수식적인 말은 사용하지 말 것
2. 새로운 창조의 표현으로써 새로운 리듬을 창조할 것. 새로운 운율은 새로운 사상을 추구.
3. 주제의 선택을 절대로 자유롭게 할 것.
4. 막연하고 보편적인 것을 사용하지 말고, 명확하고 정확하게 표현할 것.
5. 조각같이 확고하고, 눈에 명백히 보이는 시를 지을 것
6. 긴축(집중)의 시가 정수임을 명심할 것.
여기서 우리 나라에 처음으로 이미지란 개념이 들어온 이후 이미지스트들에 의해 씌여지는 시는 어떤 것이 있나 짚어보고자 합니다. 우리 문학사에 김기림이라는 시인, 평론가가 있습니다.
1930년대 일본에서 신학문을 접한 이 시인에 의하면
『시인의 정신의 포즈는 대체로 세 가지로 가정할 수 있다.
1. 내 자신을 노려봄.
2. 나에게 반영된 세계를 굽어봄.
3. 나를 통하여 세계를 바라봄.
이미지스트 이전의 모든 유파와 시인의 정신적 포즈는 대체로 1의 것이었다. 이미지스트의 정신적 포즈는 제 2의 것이었다. 』
김기림의 시론 ‘시인의 정신의 포즈’에서
작품 한 편 감상하면서 우리는 이미지에 조금 더 접근토록 하겠습니다.
정한모의 ‘아가’란 시를 분석하기 위해 쓴 아래 평론을 통해 이미지에 대한 접근은 보다 용이해집니다.
『이미지가 한 시에 있어서 얼마나 큰 비중을 지니는가 하는 것을 모를 사람은 없다. 그리고 우리 주위에서 쉽게 이미지스트라고 부를 만한 뛰어난 시인들(박남수,김광림같은)과 작품을 볼 수 있다. 그런데, 이미지 시론의 암시를 담은 시이며 대표적 시의 하나로 소개되는 흄의 ‘가을’을 읽을 때면 발언된 물상으로서가 아니라 시각적 상징에 머물고 있다는 인상을 받는다.
A touch of cold in the Autumn night - 가을밤의 싸늘한 감촉.
I walked abroad, 나는 밖을 걷고 있다.
And saw the ruddy moon lean over a hedge 불그스름한 달이 생나무 울타리에
Like a red-faced farmer. 기댄 것을 보았다.
I did not stop to speak, but wistful stars 벌건 얼굴을 한 농부와 같이
With white faces like town children 나는 멈춰서서 말하지는 않았지만
무엇인가 바라는 것 같은 별들을
만날 수 있었다.
도회지의 아이들처럼 흰 얼굴을 하고
이 시는 시각적인 이미지를 강조하고 있다. 달과 농부의 얼굴, 별과 도회지 아이들의 얼굴을 통해서 가을 분위기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이미지의 강조로 해서 물상과 물상 사이의 다른 표현(어휘)을 제거하고 있다. 고전적 방법이나 이미지 제시를 위한 암시적 작품으로는 수작일지 모르나, 한 낱말이 이미 대화의 개념을 지니고 있다고 함으로써 설득되어질지는 모르나, 물상 그 자체로 머물 수밖에 없는 경우, 그 시인이 지닌 구술적 가치를 소흘히 하는 경우를 포함할 소지를 지니고 있는 것이 바로 이 ‘가을’과 같은 작품이다.』
- 김형필의 평론집 “현대시와 상징”의 ‘시인의 음성세계’에서
일반적인 이미지에 대한 윤곽을 우리는 우리 문학사에서 훑어보았습니다. 그렇다면 현대, 우리 시인들의 시에 용해된, 시에서 보여지는 이미지는 어떤 것이 있는가 최근 우리 문학에 드러난 ‘이미지’ 용어를 몇 개 찾아보며 이미지에 대한 개념을 접근해보도록 하겠습니다.
『황동규의 초기 시는 인간의 절대를 향한 비극적인 자세를 모티프로 하고 있다. 그것은 지극한 내면적 고뇌이며 따라서 그의 치열한 개인적 정서이고 쉽사리 포기하지 않고 그 비극과 대결하려는 지적 의지를 이룬다.
…… 밤이 들면서 골짜기엔 눈이 퍼붓기 시작했다. 내 사랑도 어디쯤에선 반드시 그칠 것을 믿는다. 다만 그때 내 기다림의 자세를 생각하는 것뿐이다. - ‘즐거운 편지’
나는 갔었다. 너의 문 닫는 집으로/얼은 벽에 머리 부비고 선 사내에게로/너의 입가에서 웃음으로 바뀌는 너의 서 있는 자세에로 -‘얼음의 비밀’
……당신이 나에게 바람 부는 강변을 보여주며는 나는 거기에서 얼마든지 쓰러지는 갈대의 자세를 보여주겠습니다. -‘기도’
기다림, 기대서 있음, 쓰러짐과 같은 황동규의 몸짓은 삶의 외향, 의식의 바깥으로부터 자기를 폐쇄시켜 피할 수 없는 스스로의 내부와 치열한 씨름을 벌일 태세를 예비한다. 그것은 따라서 명징한 영혼의 부르짖음, 거의 운명적으로 치솟는 갈구, 그것에 대한 안타까운 사랑을 내포한다. 20대 초에 씌어진 그의 시들은 ‘겨울노래’ ‘겨울날 단장’ ‘얼음의 비밀’ ‘눈’과 같은, 그리고 ‘겨울밤 노래’와 같은 추위에 내맡긴 한밤을 노래했다는 것이 이와 깊이 관련을 맺는다. 얼음, 눈, 언 땅과 같은 이미지들은 어두운 밤의 이미지와 어울려 정신의 고통을, 그 고통과 대결하는 엄격한 정신을 동시에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리고 시인은 이 추움과 어두움의 힘을 빌려 자신의 영혼을 채찍질하여 비극적인 정서를 극대화시킨다.』
-황동규의 시집 ‘삼남에 내리는 눈’ 김병익의 해설에서
『서울은 어디를 가도 간판이 /많다 4월의 개나리나 전경보다/더 많다 더러는 건물의 마빡이나 심장/한가운데 못으로 꽝꽝 박아놓고/ 더러는 문이란 문 모두가 간판이다/ 밥 한 그릇 먹기 위해서도 우리는/간판 밑으로 머리를 숙이고 들어가야/한다 소주 한잔을 마시기 위해서도 우리는/간판 밑으로 또는 간판의 두 다리 사이로/허리를 구부리고/들어가서는 사전에 배치해놓은 자리에/ 앉아야 한다 마빡에 달린 간판을/ 보기 위해서는 두 눈을 들어/우러러보아야 한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무엇이 있다 간판이 있는 곳에는/무슨 일이 있다 좌와 우 앞과 뒤/ 무수한 간판이 그대를 기다리며 버젓이/가로로 누워서 세로로 서서 지켜보고 있다/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자세히/보라 간판이 많은 집은 수상하다
-‘간판이 많은 길은 수상하다’ 전문
자본주의적으로 기능화된 가장 첨예한 언어 양식인 광고 언어의 저 현란하고 감각적인 언어적 기교들, 그 매끄럽고 그윽한 상상력과 감수성들, 그 넘치는 쾌적과 안락과 풍요의 환상들. 그러한 언어들의 끊임없는 수사학에 의해, 우리는 그것들이 던져주는 따뜻하고 나른한 행복의 이미지들과 그 상품 자체를 동일시하는 매몰된 의식에 머물게 된다. 시인(오규원)은 이제 이러한 자본주의적 언어의 도구성을 폭로하는 데 주력한다. 』
- 오규원의 시집 ‘사랑의 감옥’ 이광호의 해설에서
『시인인 겸손하게 언급한 ‘조선시대 아낙들이 만든 조각보’의 시학이 첫시집에 이어서 여기서도 주도적 동기로 다양하게 변주되고 있다. 빨강색,주홍색,노랑색,초록색,파랑색,자투리 헝겊을 모아 조각보를 만들 듯, 김영무 시인은 아름답고 참신한 이미지를 통하여 소박한 향토의 서정과 선인들의 지혜, 자연의 순리와 존재의 진상, 환경파괴의 현실과 공동체적 삶의 회복을 노래한다. 이러한 노래의 말과 가락은 그러나 우리의 상투적 기대를 벗어나고 있다.
파란불이 켜졌다./꽃무늬 실크 미니스커트에 선글라스 끼고/횡단보도 흑백 건반 탕탕 퉁기며/오월이 종종걸음으로 건너오면//아,천지사방 출렁이는/금빛 노래 초록 물결/누에들 뽕잎 먹는 소낙비 소리/또 다른 고향 강변에 잉어가 뛴다 - 「아,오월」전문』
-김영무의 시집 ‘산은 새소리마저 쌓아두지 않는구나’ 김광규의 해설에서 우리는 시를 통해, 시에서 해설한 평론가들의 말을 통해 이미지의 의미를 느낌(feeling)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습니다. 이미지란 결국 시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형상 또는 의미라 여길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이미지’는 흔쾌히 모든 단어 아래, 상상력과 결부시켜 쓸 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존 러스킨(John Ruskin)은 이미지와 관련 맺어 상상력을 직관적 상상력,연합적 상상력, 정관적 상상력으로 나누고 있습니다. 상상의 결과가 언어로써 나타나는 것이 이미지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이미지를 복수의 개념으로 몇 가지로 구분해 보면
첫째, 외부의 사물에 대한 체험을 모든 감각기관을 통해 지각할 수 있는 사물의 상을 감각적 ‘이미저리’라 이야기 합니다. 여기에는
시각적 이미지 - 현대시는 전달이 아닌 구체적 드러냄을 시의 본질로 삼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며 가장 많이 의지하는 시각적 활동(사물의 형태, 빛깔, 대소 등)에 그 의미를 두는 시각적 이미지는 시에 있어 대표적 이미지라 할 수 있습니다. ‘분수처럼 흩어지는 푸른 종소리’ 김광균<외인촌>, ‘흔들리는 종소리의 동그라미 속에서’ 정한모<가을에> 등
청각적 이미지 - 소리(동물 웃음, 울음, 무생물 부딪치는 소리 -의성어 등)
후각적 이미지 - 냄새(상긋함, 향긋함, 달콤함, 커피향 등)
미각적 이미지 - 맛 (단맛, 쓴맛, 소금맛 등)
촉각적 이미지 - 부드러움,
둘째, 내용면에서
정신적 이미지 - 시각적, 청각적, 미각적 등의 것이 다 포함되며
비유적 이미지 - 제유, 환유, 직유, 은유 등
상징적 이미지 - 상징
심리적 이미지 - 외로움이나 마음의 한 상태를 상상의 세계 속에서 언어로 표출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것을 깨닫게 됩니다. 살아 있음으로 체험하게 되는 모든 이미지는 시에서 결국 본질을 나타냄을 알 수 있습니다. 한 편의 작품이 주는 이미지는 시를 구성하고 있는 가장 최소 단위의 낱말에서, 한 행, 한 연 그리하여 한편의 시 전체에서 발견해야 합니다. 시를 가다듬고 있는 시인을 통해 등장하는 시는 결국 시인의 이미지가 실루엣으로 나타난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상에서 이미지의 의미적 분석, 이미지와 시와의 관계를 살펴볼 때 중요하게 발견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주지적, 회화적이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시를 쓰고자 하는 여러분에게 필요한 것은 사실 이런 학문적 이론보다 시를 쓰는 시인의 체험적 시 접근 방법일 것입니다. 이미지의 접근을 위해 제가 쓴 부족한 작품 ‘돌’ 하나를 놓고, 시적 이미지를 깊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지난 4월 5일(월)이었습니다. 그날은 식목일로 길을 걷는데 돌이 눈에 띄었습니다. 살아오며 무수히 보았고, 만졌고, 밟았고, 어쩌면 흔하기에 별볼일 없었던 돌이 이날은 굉장한 보물처럼 보였습니다. 돌, 돌, 돌, 그리고 돌-. 걸으면서 돌에 대한 상(이미지)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돌은 흔하다.’, ‘돌은 무게를 가졌다.’ ‘돌은 멈추고 있다.’, ‘돌은 움직인다.’ ‘돌은 부식한다.’ ‘돌은 다양하다.’ ‘돌은 무식하다.’, ‘돌은 쓸모가 있다.’, “김동리의 ‘바위’란 소설은 돌을 소재로 했다.”, “박두진 시인은 ‘수석열전’이란 시집을 냈다.” ‘돌은 우주에도 있다.’, ‘돌은 따뜻하다.’, ‘돌은 차갑다.’ ‘돌은 늙었다.’, ‘돌은 ?’ -
그날은 이상하게도 ‘돌’이란 물체에 시적 의미를 부여하고 싶었습니다.
종이에 ‘시작메모’를 했습니다. 그날 초안을 보면
「돌은 무게를 끌고 다닌다/ 강바닥 자갈에서 산 하나로 이룬 바위까지/ 지구 중심으로 향한 돌의 무게/돌은 고행하는 성자의 번뇌를 갖고 있다/천년 전쯤이면 짧을까?/ 우주 먼 곳에서 달려온 빛/ 그 빛의 찰라적 욕망 바라보며/ 선의 경지로 좌선하며/지구 중심으로 향하고 싶은 욕망/ 흐르는 세월에 닦고 있는/ 아 돌의 단단함」
이 시를 만나고 밤낮으로 며칠 끌어안았습니다. 어쩌면 그런 대로 흡족한 이미지시가 될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시어, 행의 구성에 손을 조금씩 대기 시작한 후 일주일쯤 지나 이 시는 다음과 같이 바뀌었습니다. 바뀌었다고 하지만 내 마음속에서 드러내고자 하는, 시에 담으려 했던 이미지, 즉 이미지의 본질이 다치지 않는 상태로 시는 이렇게 바뀌었습니다.
「강변 자갈에서 산 하나를 이룬 바위까지/ 돌은 무게를 끌고 다닌다//고행하는 성자의 모습//천년이라면 짧을까?/우주 먼 곳에서 달려온 빛/ 그 빛의 찰라적 욕망 끌어안으며/지구 중심으로 향하고 싶은/끊임없는 열정/차갑게 식히는/아! 무념무상의 세계」
매일 물을 마셔야하는 그런 식물이 있다면, 단 하루 물을 주지 않으면 죽게 되는 식물이 있다면, 그 식물을 꼭 길러야하는 의무가 있는 사람이라면-. 마치 이 시는 그 식물을 닮아 내게 물을 요구하는 것 같았습니다. 물을 주듯, 시를 들여다보며, 시어 몇 개를 다독거리고, 흡족해하다가 실망하고, 다시 만지작거렸습니다. 예를 든다면 처음 시는 연 구별이 없었습니다. 하지만 일주일이 지난 작품은 연구별이 생겼고, 시어도 많이 다듬어졌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은 이런 상태로 만족할 수 없어.’ 결국 어딘가 나의 손을 요구하는 부분을 다시 두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길바닥에 있는, 산에 있는, 내 마음속에 있는 돌을 찾아 관찰해보았습니다.
1연의 1행 ‘강변 자갈에서 산 하나를 이룬 바위까지’를 조금 더 세분화시켜, 시각적 이미지를 추구하게 할 수 있는 상태로 만들고 싶었습니다. ‘강변 자갈에서/ 산 하나를 이룬/바위까지’ 이렇게 고치고 나니 길게 쓴 앞의 시행보다 정경을 쉽게 떠올릴 수 있는 여유가 생겼습니다. 결국 이 시는 이렇게 마무리되었습니다.
돌
하 재 영
강변 자갈에서
산 하나를 이룬
바위까지
돌은 무게를 끌고 다닌다.
고행하는 모습
때론 풀과 나무의 뿌리
수염처럼 길게 기르고
천년이라면 짧을까?
우주 먼 곳에서 달려온 빛
그 빛의 찰라적 욕망 끌어안으며
지구 중심으로 향하고 싶은 열정
끊임없이 삭이는
아! 무념무상(無念無想)의 성자여
어떤 의미에서 이미지는 시적 화자와 독자와의 공감대 형성을 밑바탕에 깔고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시를 ‘아내’ 또는 ‘남편’감이라 합시다. 당신은 어느 스타일의 ‘아내’,‘남편’의 이미지를 찾으며, 당신에게 맞은 이미지의 배우자를 만들어 나가고(만들어지고) 있습니까? 만약 결혼을 앞둔 20대의 여자(남자)가 원하는 스타일이 이렇다 칩시다. 그가 원하는 배우자 감은 키가 크고, 지적이며, 특히 음악을 좋아하는 이지적이 사람이라 합시다. 주변에서 찾아보면 그런 사람을 쉽게 찾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막상 그 여자(남자)는 그런 사람을 찾기란 하늘의 별따기처럼 어렵습니다.
시 역시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세상은 분명 내가 추구하는 이미지만 있는 게 아닙니다. 모든 사람이 함께 공유할 수 있는 새로운 감각과 낯선 이미지를 추구한다는 것이 시에 있어서, 예술에 있어서 중요합니다.
20대가 지나고, 30대, 40대, 50대 그 이후 사람은 쌓인 연륜에 따라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다를 수 있습니다.
시에 있어서의 이미지는 시인의 주관적이지만, 그 주관적인 이미지는 객관성을 요구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작품 속에 녹아있는 새로운 이미지를 객관화시키느냐가 시를 쓰는 데 성공의 요인이 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수필의 향기
빈남수
1. 수필은 어떻게 쓸것인가?
수필은 생활(生活)을 바탕한 사상이요, 생활적인 사건을 문학적 차원에서 관조(觀照)하고 채색한 것이다. 즉 수필은 관조라는 여과(濾過)과정을 거쳐 표출된 생활의 지혜요 철학이다.
모든 문학 장르가 그러하듯이 글은 인간의 감정을 고향하는 힘이 있어야 하고, 하나의 이상향을 담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이러한 통론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생각을 작품으로 형상화한다는 것처럼 어려운 일은 흔치 않다.
흔히 수필은 붓가는 대로 자연스럽게 쓰는 글이라고 하지만, 실제로 써 보면 사뭇 그 어원적(語源的) 의미와는 많은 차이가 있음을 알게 된다.
수필은 삶의 영위를 과정에서 우러나는 진실의 기록이다.
좋은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공감할 수 있는 세계를 구축하고 독자로 하여금 감동의 세계로 몰입시키는 작업이 우선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사실을 솔직히 이야기하되 결코 푸념이어서는 안 되는 것이 수필의 세계다.
작가는 언제나 사명의식을 가지고 글을 써야 한다.
수필 작품 속에는 그 나름대로의 세계가 있어야 한다. 현실적인 것 같지만 그 속에는 반짝이는 멋이 있어야 하고 싱그러운 사건이 있어야 한다.
수필은 만사를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라 많은 생각을 응축하는 것이다. 타인에 대한 고마움과 끈끈한 정, 인생에 대한 관조, 과거에 대한 회상과 미래에 기대가 엉겨 하나의 글을 형성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수필을 중년 이후의 문학이라고 한다.
2. 수필의 이해와 생활화
수필은 예술적인 형식에 자기 사상을 농축시키는 작업이다.
가장 힘들게 쓰여지면서도 가장 쉽게 읽혀져야 하는 글이 수필이다.
누구든 자신을 드러내 보인다는 것은 쉬운 일일 수는 없다.
작가가 글을 쓰고자 할 때 무엇보다 먼저 생각해야 할 일은 자신을 객관화시키는 일과 자신을 단순한 자기 존재만으로 귀착시키는 데 그치지 않고 확대시켜보는 안목을 갖는 일일 것이다.
좋은 글이 되기 위해서는 어떤 요건을 갖추어야 할 것인가
① 우선 수필은 개성이 드러나 있어야 한다. 글은 곧 그 사람이다.
② 수필을 읽으면 글쓴이의 사유, 생활태도, 성품, 취미, 말투까지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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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복
―황금찬(1918∼ )
한복 한 벌 했다.
내 평생 두루마기를
입어 본 기억이 없었으니
이것이 처음인 것 같다.
암산·상마·학촌·현촌·난곡·청암
모두 한복을 입는데
나만 한복이 없다고 했더니
병처가 큰맘 써 한 벌 했다.
78년 정월 첫날 아침
새 옷을 입고 뜰에 서니
백운대와 도봉이
내려다보고 웃고 있다.
어디든 가서
세배를 드리고 싶다.
우이동 계곡으로
발을 옮긴다.
아직도 우리들의 맥박 속에
살아 있는 선열들
일석·의암·해공·유석
무덤 앞에 섰다가
다시 걸음을 옮긴다.
4·19묘소
비문에 새겨진
꽃 같은 나이들을 읽어 본다.
구름이 날린다.
구름에 새 옷깃이 날린다.
이 나이에 비로소
한 겨레 안에 서는
그런 느낌이 든다.
손가락을 꼽으며 계산해 보니 1978년이면 36년 전이다. 그 시절 선비 스타일 삶이 설날을 배경으로 진솔하게 그려져 있다. ‘암산·상마·학촌·현촌·난곡·청암’, 친구라도 나이 들어 이름을 부르는 건 경망스럽다 여겨서 호로 부르는 점잖은 양반이 ‘모두 한복을 입는데/나만 한복이 없다’고 아내를 은근히 압박한다. 아내에게만은 철부지처럼 풀죽은 모습을 보이고 새 옷을 조르는 것이다. 착한 남편, 여태 내색 한번 안 했지만 그렇게 부러웠구나. 아내는 아무리 넉넉지 못한 살림에 몸도 아프지만 ‘큰맘’ 쓰지 않을 수 없다. 그리하여 화자는 두루마기까지 갖춘 ‘한복 한 벌 했다’! 설날 아침 그 ‘새 옷을 입고 뜰에 서니/백운대와 도봉이/내려다보고 웃고 있’단다. 마음에 쏙 드는 옷을 입으면 기쁜 건 남녀노소 다를 바 없을 테다. 들뜬 마음에 화자는 ‘어디든 가서/세배를 드리고 싶다’. 그래서 집 가까이 있는 선열들의 무덤도 찾아가고 4·19묘소도 간다. 그 참배는 그전부터도 화자의 설날 행사였을지 모른다. 그런데 한복으로 의관을 정제하니 더욱 숙연해지고 옷깃이 여미어진다. ‘비로소/한 겨레 안에 서는/그런 느낌이 든다’. 한복을 통해 민족의 피가 뭉클하게 ‘맥박 속에 살아 있는’ 느낌을 받는 것이다. 황금찬 선생님은 현재 한국의 최고령 시인이시다. 그동안 써오신 따뜻하고 순수한 시와 함께 늘 건강하시기를!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40813/65713737/1#csidx70415d2b176cb0faf4128a291796a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