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동아일보 신춘문예 / 김중일
가문비냉장고 / 김중일
내 생의 뒷산 가문비나무 아래, 누가 버리고 간 냉장고 한 대가 있다 그날부터 가문비나무는 잔뜩 독오른 한 마리 산짐승처럼 갸르릉거린다 푸른 털은 안테나처럼 사위를 잡아당긴다 수신되는 이름은 보드랍게 빛나고, 생생불식 꿈틀거린다 가문비나무는 냉장고를 방치하고, 얽매이고, 도망가고, 붙들린다 기억의 먼 곳에서, 썩지 않는 바람이 반짝이며 달려와 냉장고 문고리를 잡고, 비껴간다 사랑했던 한 남자가, 한 여자를 데리고 찾아와서 벼린 칼을 놓고 돌아갔다 매일 오는 무지렁이 중년 남자는 하루에 한 뼘씩 늙어갔다 상처는, 오랜 가뭄 같았다 영영 밝은 나무, 혈관으로 흐르는 고통은 몇 볼트인가 냉장고가 가문비나무 배꼽 아래로 꾸욱 플러그를 꽂아 넣고, 가문비나무는 빙점 아래서 부동액 같은 혈액을 끌어올린다
가까운 곳에, 묘지가 있다고 했다 가문비나무가 냉장고 문열고 타박타박 걸어 들어가 문 닫으면 한 생 부풀어 오르는 무덤, 푸른 봉분 하나가 있다는,
[당선소감]
"알 수 없는 것"들이 나를 살게 한다. 나의 깜냥으로 이해할 수 없었던 일들.
견성, 내가 시(詩)를 짝사랑 할 것이라 누군들 예상했었나.
대학 1년 때 백지상태에서 처음 읽었던 박노해의 '노동의 새벽', 그리고 시작된 남독의 몇 년,
군대 시절 몰래 건빵 주머니에 시집을 넣어 다니면,
읽던 읽지 못하던 내 허벅지는 로보캅처럼 단단해졌었다.
유년 시절, 구로공단 부근 파란대문 집을 생각한다.
염색공장까지 길게 이어지던 개나리담장,
그 길을 따라 출근했다가 얼굴이 노랗게 물들어서 귀가하던 셋방 누나들,
항상 먼 곳으로만 돈 벌러 떠나시던 아버지.
그 모든 아픔에 대해 여전히 나는 겨우 짐작만 할 뿐이다.
"고통스러운 것들은 저마다 빛을 뿜어내고 있다"는 한 시인의 시를 생각한다.
언제나 타인의 고통은, 내게 두 눈뜨고도 읽을 수 없는 점자와 같았다.
그러면서도 나는 만질 수 있는 언어를 갖고 싶어했다.
캄캄하던 시절, 혹 그런 것이 시의 육체가 아닐까 생각했었다.
갓난아이의 꼭 쥔 주먹 같은, 땅바닥에 박혀있는 돌멩이 같은 태초의,
고통의 냄새가 나는 "우리나라 글자"가 나는 좋았다.
그것은 체험의 깊이에서 얻어지는 것임을 차제에 한 번 더 명심해 둔다.
사랑하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얼음벽돌집을 짓고, 그 속에서 숨죽이며 있느라 미처 고백하지 못했을 뿐.
위태로운 내 사랑의 영토. 그곳 성소(聖所)의 주인이신 할머님, 큰 스승이신 할아버님,
부모님과 여동생, 두 분 이모님, 일하 삼촌, 진무, 진서, '북어국을 끓이는 아침'에 동기들,
문학회 식구들에게 특히 고마운 마음을 전한다.
그리고 부족한 글을 뽑으며 망설이셨을, 사숙하던 선생님들께 꼭 좋은 글로써 보답드리고 싶다.
겨우 시작인 것이다.
[심사평]
본심에 오른 작품들은 예년보다 높은 수준을 보여주었다.
거의 모든 투고작에서 일정수준 이상의 언어 구사력과 시상 전개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강한 개성을 보여주는 작품은 많지 않았다.
새로운 시인에게 기대하는 것은, 새로운 언어와 새로운 상상력이다.
기성 시인의 스타일을 알게 모르게 흉내내고 있는 듯한 작품들이 종종 눈에 띄는 것은 유감이다.
또한 신춘문예를 의식한 듯한, 상투적 틀을 보여주는 작품들도 유감이다.
이러한 작품들은 그 시적 완성도가 높다하더라도 바람직한 것이 못된다.
<사냥철>,<글자연습>,<거품>,<나비의 가을>,<암말>,<불화그리는 어머니>,<거울을 품다>,
<가문비냉장고>,<두근거리는 신전> 등의 작품들이 최종적으로 논의되었다.
어느 작품이던지 당선작으로서의 자격이 있다고 판단되었지만, 또한 이러저러한 아쉬움이 있었다.
이 가운데서 <가문비냉장고>와 <두근거리는 신전>가 돋보였다.
당선자는 쉽게 결정되었지만, 어느 작품을 당선작으로 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약간의 망설임이 있었다.
<두근거리는 신전>은 비유적 묘사가 화려했다.
비유적 언어를 구사하는 솜씨가 대단했지만,
오히려 한 작품 속에 인상적인 비유들이 너무 많은 것이 흠이 되었다.
그리고 비유와 언어의 화려함에 파묻혀 버린 주제의 애매함도 문제가 되었다.
결국 개성적인 이미지와 주제가 조화를 잘 이루고 있는 <가문비냉장고>를 당선작으로 결정했다.
당선작 <가문비냉장고>는 매우 흥미로운 상상력을 보여주는 작품이었다.
전혀 이질적인 가문비나무와 냉장고를 연결시켜 하나의 의미 공간을 만들어내는
시적 상상력은 주목을 끌기에 충분하였다.
이 작품은 가문비나무 아래 버려진 냉장고의 이미지를 빌어 와서,
치유할 수 없는 상처 또는 고통의 아우라를 개성적으로 환기시킨다.
나무라는 유기체 이미지와 냉장고라는 무기체 이미지 사이의 단절을 역으로 이용하여 의미를 생성한다.
그리고 왜 하필 가문비나무이고 왜 하필 냉장고인가를 시적으로 설득시킨다.
시상의 전개도 적절하며, 안정감도 있다.
앞으로도 이런 개성적인 상상력을 적극 살려서 삶의 진실을 충격적인 이미지로 드러내줄 수 있기를 바란다.
당선자에게 큰 축하를 보내며, 앞으로의 대성을 기원한다.
아깝게 탈락한 다른 예비 시인들에게도 격려를 보낸다.
- 심사위원 김혜순(시인·서울예대 교수) , 이남호(문학평론가·고려대 국어교육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