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21) 열두 편의 시와 일곱 가지 이야기 – 둘째, 이야기를 꾸며낸다/ 시인 공광규
열두 편의 시와 일곱 가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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둘째, 이야기를 꾸며낸다
경험을 옮기는 것만으로는 시가 안 됩니다.
인간의 경험은 그렇게 다양하거나 극적이지 않습니다.
경험으로만 시를 쓴다면 일생동안 몇 편뿐 쓰지 못할 것입니다.
그래서 작은 경험의 조각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백일장이나 청탁을 받고 막상 시를 쓰려면 더 이상 시를 쓸게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이미 많은 시인들이 좋은 시를 다 써버린 것 같기 때문입니다.
이는 창작자가 경험에서 상상력을 발전시켜서 이야기를 꾸며낼 줄 모르기 때문입니다.
궁극적으로 시는 춤이나 음악이나 영화처럼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입니다.
‘시인은 단순히 운문의 창조자가 아니라 이야기나 구성을 창조하는 사람입니다’(아리스토텔레스).
시인의 기능은 일어난 일뿐만 아니라 일어날 수 있는 일을 기술하는 것입니다.
시인은 자신의 온갖 경험을 섞고 흔들어 이야기를 새롭게 만들어 낼 줄 알아야 합니다.
이것은 경험의 횟수와는 상관없습니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상상력의 문제입니다.
따라서 연애시를 많이 썼다고 연애를 많이 한 시인은 아닌 것입니다.
여러분의 평생 연애 횟수를 생각해 보기 바랍니다.
시는 실제 경험한 사건으로만 쓰는 것이 아니라 경험에서 발아시킨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꾸며가야 합니다.
상상력은 인간의 가장 위대한 힘입니다.
종교는 물론, 우리가 살고 있는 문자와 도시, 법률, 교육 등 모든 제도는 인간의 상상력이 만든 것입니다.
신이 인간을 창조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신을 상상력으로 창조한 것입니다.
「별국」은 어머니와 함께 했던 몇 개의 흐릿한 경험의 조각들을 상상력을 발휘하여
한 편의 이야기로 엮은 것입니다.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는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히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별국」
1~3연은 경험의 조각을 모은 것이고,
4~7연은 상상력으로 이야기를 만들어 가며 쓴 것입니다.
그러나 이 시는 모두 실제 제가 경험한 사실을 그대로 쓴 것처럼 이지만 아닙니다.
상상력을 발휘하여 이야기로 만든 허구입니다.
이 시에는 몇 개의 심상이 나타납니다.
제 시의 기법적 계보는 정지용으로부터 시작합니다.
대학의 문학개론 시간에 정지용의 시 「유리창」을 배우는 순간,
이렇게 시를 쓰면 되겠다는 생각을 하였습니다.
정지용 시를 만나기 전에는 선배들을 따라다니며 시를 쓰고 낭독회를 여러 번 해보았지만
시를 어떻게 써야 하는지 도대체 감이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정지용의 시를 만나면서 시의 원리를 깨우쳤습니다.
시 창작 방법을 방황을 하다가 멘토를 만난 것입니다. 창작에서도 멘토가 중요합니다.
그래서 제 시는 지금까지도 심상 중심입니다.
‘별국’, ‘별빛 사리’는 상상력을 통해 심상으로 창조한 어휘입니다.
‘멀덕국’은 충청도 사투리인데, 사투리를 시어로 제도권에 진입시킨 사례입니다.
시가 변방의 언어를 중심의 언어로 만든 것입니다.
그래서 시인은 어휘의 창조자라고 하는지 모릅니다.
셰익스피어가 창조한 어휘는 지금 영어를 세계 제일의 공용어로 만드는 발판이 되었다고 합니다.
아래의 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는 실제로 광화문에서 완행버스를 잘 못 타는 바람에
경험한 사례를 이야기로 만들어간 것입니다.
오랜만에 광화문에서
일산 가는 완행버스를 탔다
넓고 빠른 길로
몇 군데 정거장을 거쳐 직행하는 버스를 보내고
완행버스를 탔다
이곳 저곳 좁은 길을 거쳐
사람이 자주 타고 내리는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추어탕 집 앞도 지나고
파주옥 앞도 지나고
전주비빔밥 집 앞도 지나고
스캔들 양주집 간판과
희망맥주집 앞을 지났다
고등학교 앞에서는 탱글탱글한 학생들이
기분 좋게 담뿍 타는 걸 보고 잠깐 졸았다
그러는 사이 버스는 뉴욕제과를 지나서
파리양장점 앞에서
천국부동산을 향해 가고 있었다
천국을 빼고는
이미 내가 다 여행 삼아 다녀본 곳이다
완행버스를 타고 가며
남원, 파주, 전주, 파리, 뉴욕을
다시 한 번 다녀온 것만 같다
고등학교도 다시 다녀보고
스캔들도 다시 일으켜보고
희망을 시원한 맥주처럼 마시고 온 것 같다
직행버스를 타고 갈 수 없는 곳을
느릿느릿한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완행버스로 다녀왔다」
< ‘유쾌한 시학강의(강은교·이승하 외 지음, 아인북스, 2015)’에서 옮겨 적음. (2021. 4. 6.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21) 열두 편의 시와 일곱 가지 이야기 – 둘째, 이야기를 꾸며낸다/ 시인 공광규|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