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경의 배후에는 흰빛이 있다 /김길나(산문) 시창고
풍경의 배후에는 흰빛이 있다 /김길나 (시인)
볼 것이 많아지고 눈이 자주 피로해진다. 눈을 들어 하늘과 나무를 바라본다. 푸르름이 눈을 씻어주기 때문이다. 잠시 눈을 감는다. 그런데 불현듯 망막 속에 갇힌 영상 한 쪽이 열리고 마치 무슨 예언의 징후처럼 초록부재草綠不在의 황막한 사막이 일렁이다 사라진다. 또 초록지대를 덮는 흰빛 설경雪景이 일순 하얗게 펼쳐지기도 한다.
첫눈이 내리는 겨울날 서설瑞雪의 풍경은 그 흰빛으로 하여 아름다웠다. 온갖 빛깔의 풍경을 감싸 안은 흰빛 포용과 보채는 색상들의 소란을 평정하는 흰빛 고요로 설경은 언제나 눈부시지 않던가! 이제 설경은 사라졌다. 설경 속의 흰빛도 어디론가 떠나가고 없다. 그러나 모든 풍경의 배후에는 흰빛이 있고 그 흰빛의 유전流轉하는 보행이 지금은 생명의 원색인 초록빛을 통과하고 있는 중이다.
나는 몇 번 흰옷을 입은 적이 있다. 가족을 이 세상 밖으로 떠나보내고 돌아서는 저녁나절의 희디흰 적막! 그때의 흰빛은 생의 마지막 경계에서 나부끼는 슬픈 깃발과도 같은 것이었다. 그러나 그 흰빛의 슬픔에서 빠져나와 새롭게 입게 된 또 한 번의 흰옷! 그때 흰옷 차림의 나는 촛불을 받쳐 들고 신神의 제단에서 울었던가, 웃었던가. 아니 침묵 속에서 너울대는 촛불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던 것도 같다. 그날도 음악처럼 눈이 내렸고, 현란하고도 불온한 색色의 울긋불긋한 아우성을 잠재우며 그렇게 흰눈이 내려 쌓였고, 흰빛을 향해 불꽃을 피워 올린 촛불, 그 촛불의 일렁임 아래로 뚝뚝 듣는 눈물방울로 내 흰옷은 얼룩졌었다. 나는 굳어진 눈물자국으로 얼룩진 자리를 찬찬히 들여다보았다. 그때, 흰빛과 촛불의 만남 속에서 삶과 죽음의 화해를, 아니, 이분화二分化의 대립적 구도에서 벗어나 생生과 사死가 둘이 아닌 하나임을 살짝 엿보았던 것. 그 후로 겨우 작은 평화를 건져 올릴 수 있게 되었다고는 하지만, 정화淨化의 눈물을 감당하는데 있어 두려움이 먼저 앞을 가리는 것은 무슨 까닭일까?
나는 창문을 열고 풍경들을 바라본다. 여러 빛깔로 덧칠된 풍경의 배후에, 또 풍경 넘어 저 편에 아득히 번지는 흰빛을 본다. 흰빛이 내장內藏하고 있는 이 두 세계, 즉 출발과 당도當到, 시작과 완숙은 그 간극만큼 서로 상이한 변별성으로 구별되는 것을. 그러므로 처음의 흰빛과 마지막 흰빛 사이에서 존재 안팎으로 여러 색태色態의 분열이 발생하고, 여러 색류色類의 경계가 그어져서 그 분열과 경계에 갇혀 부단히 휘청이고 배회하는 지상 삶의 고달픔은 차라리 인간 숙명의 본령일 터. 그러니 어찌할 것인가. 온갖 색과 소요를 넘어 흰빛에 가 닿기, 혹은 그 소요와 환락 속에 흥건히 잠기기, 또는 욕망의 꽃밭에 여러 빛깔의 꽃을 피워내어 색을 증식시키기, 증식된 빛깔과 빛깔의 충돌, 그로 인한 문제와 문제의 마찰, 힘과 힘의 대결로 폭발되는 폭죽놀이 즐기기 등으로 우리의 세상은 소란하고 또 소란하다.
오늘은 하늘이 푸르고 바람도 맑다. 베란다 창가에서 햇볕을 쬔 영산홍 꽃이 환하게 웃고 있다. 겨울 동굴 속에서 길어 올린 화초들의 초록빛이 작은 잎마다에서 반짝인다. 이런 날엔 확 트인 들녘으로 마냥 뛰쳐나가고 싶어진다. 그러고 보니, 오월의 어느 야유회 생각이 난다.
그때 나는 어느 한 사람을 만났는데, 뜻밖에도 초록빛에 넌더리가 나 있는 사람이었다. 그는 멀리 태평양을 건너온 이국인이었다. 대초원으로 에워싸인 그의 고향이 사철 초록빛 바다에 갇힌 작은 섬과 같은 외진 마을이어서 초록빛에 의한 단절과 고독감이 그로 하여금 초록에의 심한 멀미증을 갖게 했다는 후일담을 들었지만, 그러나 그때는 초록에의 그의 반감反感이 생生 자체에 대한 불순한 저항처럼 내게는 다가왔다.
우리는 그때 풍광이 수려한 산자락 아래서 오월의 온갖 빛깔과 향기에 취해 있었다. 겨울을 지나 봄을 거쳐 오면서 천지에 넘쳐나는 온갖 빛깔들이 들판을 지나 사람 사는 집 마당까지 흘러가는 소리, 꽃들이 나무 가지로 올라와 활짝 제 꽃잎을 터트리는 소리, 나무마다 철철 초록샘물이 흘러넘치는 소리가 온 땅에 가득했다. 자연 안에서 누리는 순수한 기쁨을 서로의 눈빛으로 나누며 우리는 모처럼만에 평화로운 휴식을 즐기고 있었다. 그런데, 이게 웬 일이야! 평화가 깨지는 것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는 듯이 삽시간에 분위기는 돌변하고 말았다. 여기저기서 비명 소리가 들려오고, 일행 중의 몇 사람은 벌써 저만치 달아나고, 나는 뒤늦게야 우리 가운데서 살생殺生을 위한 한 사건(?)이 일어난 걸 알았다. 숲 속 일을 훤히 꿰뚫고 있는, 소위 ‘안티초록’인 그가 눈 깜짝할 사이에 풀숲에서 뱀을 맨손으로 사로잡아 높이 쳐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마치, 아득히 먼 수렵시대에서 불쑥 한 남자가 걸어 나와 숲 속에 우뚝 서 있는 듯한 착각에 정신이 아찔한데, 산 뱀의 모가지를 틀어잡고 이쪽으로 다가오는 것이었다. 버틸 재간이 없는 우리는 질겁해 도망치고, 짓궂게 쫒아오고, 꿈틀거리는, 그것도 맹독이 있는 뱀을 와락 코앞으로 들이밀기까지 하며 그가 신나게 웃어재끼고, 그러는 사이, 뱀을 징그러워하는 몇몇 아가씨들은 이미 얼이 빠져나가 ‘얼짱’이 아닌 얼빠진 ‘얼빠짱’이 되어 자리에 풀썩 주저앉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 것이다. 단 한순간에 글쎄, 살아 있는 뱀 껍질을 익숙한 솜씨로 통째로 주르륵 벗겨낸 것이다. 그러자 입이 딱 벌어지고,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해 ‘얼빠짱’들의 그 벌어진 입으로 남은 얼마저 빠져나가버려 비틀비틀 얼얼해 하고 있는 사이, 뱀의 허연 속살이 물커덩 빠져나오는데, 몸보신 할 사람은 이 앞으로 얼른 나와 이 영양덩어리를 얼른 가져가라고, 머뭇거리면 놓친다고 그가 재촉하고, 그러나 몸보신을 위해 얼을 챙겨 담고 일어나 얼른 앞으로 나서는 ‘얼든짱’은 없었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우리 일행 중에도 얼이 안 빠진 실속파가 있긴 있어 뱀의 알맹이 살을 아무도 모르게 챙겨 가져가는 걸 누가 보았다는구먼. 실속 없는 견자見者 곁에 그래도 알맹이를 챙겨갖는 알찬 ‘알짱’들이 있어 세상은 또 활기차게 돌아가니 천만 다행이랄 수밖에)
그는 갑자기 허리에서 혁대를 풀어내었다. 우리가 영문을 몰라 의아해 하는 순간, 뱀가죽의 입구로 혁대를 죽죽 끼워 넣는 게 아닌가! 금방 고가高價의 명품인 뱀가죽 혁대 하나가 뱀이 떠난 자리에서 탄생되는 희귀한 순간을 목격한 것이다. 혁대 사이즈에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딱 들어맞은 사피蛇皮, 신기에 가까운 그의 눈 설미에 또 한번 놀라 눈이란 눈들이 동전만큼 휘둥글 해졌으나 겨우 정신을 가다듬고 가까이 다가가 보니, 혁대에서 빛나는 뱀의 기하학적 무늬의 무지개 빛깔이 황홀하기 그지없었다.
죄성罪性은 무릇, 찬란하고 황홀한 색 속에 깃들어 있는 것일까. 아름다운 색을 몸에 눈부시게 두르고 분열된 두 혀를 날름대며 땅을 향해 땅으로만 기어 다니는 뱀, 그 뱀에게서 옛 사람들은 일직이 색들의 뒤엉김으로 인한 색의 카오스, 그 비극적 미학을 보아버린 것이리라. 또한 뫼비우스의 띠를 소재로 조각한 막스 빌의 ‘끝없는 표면’처럼 처음과 끝을 교묘히 감추는 뱀의 또아리 속에서 끝없이 순환하는 죄성의 슬픈 띠를 읽게도 되는 것이리라. 나는 혁대와 뱀 사이에서 원죄 탄생의 설화(창세기 3장)를 떠올리며, 그렇게 한동안 망연히 서 있었다.
생명의 원초적 푸르름을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그의 ‘안티초록’! 그러나 좀더 넓게 보면 그것은, 초록지대에서 빚어지는 정글의 법칙, 그 약육강식弱肉强食의 비극성을 혐오하는 그의 의식의 한 단면일 수도 있겠으나, 아이러니하게도 그 비극성을 즐기는 모순을 탁월한 능력으로 뱀 사냥을 통해 보여준 셈이다. 그때 나는 그의 안티초록의 이중성에 오버랩 되는 한 염원念願의 목소리를 들었던 것 같다. 색의 카오스가 아무리 현란할지라도 빛에서 나온 모든 빛깔들은 생명의 원색인 초록을 통과하여 흰빛에 닿고자 한다.’라는 염원 말이다. 염원의 울림이 생생할수록 초록은 내 눈앞에서 더욱 싱싱한 빛으로 펄럭거렸다. 존재 안과 밖에서 들끓는 색상들의 갖가지 현상으로써의 집합과 분열, 그로 인한 희열과 허무, 비애와 상처를 다독여 품어 안고 걸러내며 정화하는 흰빛의 법력法力 한 가닥이 그래도 우리 내부의 깊은 곳에 영원처럼 깃들어 있음을 나는 펄럭이는 초록빛을 통해 보았다. 살의 비극이 끝없이 연출되는 이 초록지대에서 초록지대를 통과하고 있는 우리의 행보가 그렇게 무상한 것만은 아니어서 이제, 겨울이 오면 옷 벗은 나무들의 누드 앞으로 다가가 악수를 청하여 손을 내미는 일도 즐거우리라
정신과 표현 2004년 5,6월호
[출처] 풍경의 배후에는 흰빛이 있다 /김길나(산문) |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