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달 장애를 지닌 어린이들은 대부분 의지의 결합과 관계합니다(특수교육학 강의, 2008, 32)."
슈타이너는 생전 한번 특수교육에 관해서 강의를 했다(1924. 06.25 - 1924.07.07). 특수교육 관계자들의 요청으로 외부인사는 없이 모두 관계자들만 모인 곳에서 하였다(속기사 한 사람만 외부사람). 슈타이너가 1925년 3월 30일 영면했으니 거의 말년에 한 강의이다. 그 전 강의도 그렇지만, 특히 특수교육 강의는 여러 번 읽어도 거의 이해하지 못한다. 짧은 시간에 구체적으로 전달해야 했으므로 관계자들만 참석할 것을 요구한 슈타이너가 이해는 된다. 하지만 특수교육을 받는 아이들을 보면 많이 안타까워서 계속 읽게 된다는 것이 필자의 솔직한 심정이다.
공교육에서 하는 특수 교육은 이 아이들이 부족한 부분(과목)은 특수반에서 교육을 받고, 다른 과목은 일반 교실에서 받는다. 통상 국어, 수학과 같은 과목은 특수반에서 받고 예체능 과목을 일반 교실에서 받는 것이다. 그런데 국어, 수학과 같은 과목이 다른 교과의 바탕이 되는 지라, 특수아이들은 다른 교과에서도 거의 따라오지 못한다. 그래서 그 아이들을 보면서 드는 생각이, 학교만 왔다 갔다 해서 시간만 버리는 것이 아닌가. 그 아이에게 맞는 교육방법이 없을까하는 생각, 고민이다.
필자는 어느 해 초등 5학년 남학생을 만났는데 특수아이였다. 특수아이의 상태는 가르치는 선생님에게도 통상 잘 말해주지 않는다. '피그말리온 효과'인가하는 아이를 낙인 찍으면 교육에 해롭다는 인식이 있어서인지, 필자가 아는 정보는 아이가 약간의 자폐아라는 것이다. 축 쳐진 어깨로 걷는 어머니의 뒷모습을 보면서, 부모님은 정상범위 안에 드는데, 왜 특수아이가 태어났는지 안타깝다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그래서 필자가 슈타이너의 『특수교육학 강의』 책을 소개해 주기도 하였다.
슈타이너가 자폐아 교육에 관해서 한 말이다. 자신의 몸을 영혼이 인지하지 못해서 그러므로 자신의 몸을 영혼이 인지하게 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방법이 아령을 들고 하는 운동방법이다. 먼저 오른손에 아령을 들고 운동을 하고, 다음 왼손 반복, 그리고 양손에 들고 운동하는 것이다. 또 발을 사용하는 방법도 있다. 발을 사용해서 물건을 들어올리거나, 발가락에 연필을 끼워서 쓰게 하는 방법이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자폐아이가 재미있게 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재미있지 않으면 영혼-아스트랄체가 반응하지 않기 때문에 영혼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이것은 일반 아이도 마찬가지이다.
슈타이너의 이러한 방법을 듣고 만약 그 방법을 개별로 기억해서 한다면, 이런 교육은 하지 못한다. 일일이 기억하지도 못할뿐 아니라, 전도몽상이 될 위험이 크기 때문이다. 그래서 슈타이너가 이런 이야기를 '왜 했을까'하고 생각해 보아야 한다. 영혼이 인지하지 못하면, 영혼이 하는 작업을 못할 것이므로 발달이 안되는 것이다. 그것이 의지의 교육, 의지의 결합이다.
우리는 인간을 그 하는 일로 보아서 세 부분으로 나눈다. '머리- 신경체계', '가슴- 리듬체계', '사지- 의지체계'이다. 사지에서 의지 작업이 이루어지니, 영혼이 사지를 인지하지 못한다면 의지 작업이 안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영혼이 하는 의지 작업은 무엇인가란 의문이 든다. 머리- 신경체계는 사고하는 기능으로, 상으로서 기능이다. 상으로서의 기능은 거울을 치우고 나면 상이 없어지는 것처럼 인간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즉 발달이 일어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의지 기능이 나와야 어떤 발달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영혼이 사지를 인지하도록 사지를 사용하는 것이다. 예컨대 다리를 다쳐서 다리를 자르면, 그 곳의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는 것과 의미가 같다.
나아가 우리가 어떤 일을 할려고 한다면 반드시 의지가 나와야 한다를 생각해 보면, 그 일 역시 영혼이 의지작업을 하기 때문에 가능하다. 자폐아는 이런 영혼의 기능이 없기 때문에, 몸의 발달뿐만 아니라 학습면에서도 늦어지는 것이다. 그래서 발달장애아 대부분이 의지의 결합에 문제가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장애아이들에게 중요한 정보가 있다. 슈타이너에 따르면 장애아이들은 사춘기 전에 교육을 받아야 효과가 있지, 사춘기가 지나면 더 이상 장애를 고치기가 어렵다고 하였다. 그 이유가 사춘기 전 아이들은 인간을 구성하는 세 부분이 통합적으로 움직이고, 사춘기가 지나면 분리가 되기 때문이다. 통합적으로 작용하면, 예컨대 다리 부분에 작용을 하면, 이 작용이 다른 두 부분에도 영향을 미쳐서 발달이 이루어진다. 반면 분리가 되면 그 부분에만 작용을 할 것이므로 고치기가 어려운 것이다. 그래서 장애아이들에게 시간은 매우 중요하다. 사춘기 전에 도움을 받아야 조금이라도 장애를 고치기 때문이다.
당시 필자는 그 아이가 이런 교육을 받고 있는지 알 길이 없어서 안타까웠고, 필자 역시도 당시에는 이런 사실을 알지 못했기 떄문에 도움은 주지 못했다. 막연하게 아이를 바라만 봤다. 하지만 공교육에서 이루어지는 특수교육은 과학적인 데이터에 나온 결과로 구성되어서, 예컨대 보이는 부분, 바깥 부분을 중심으로 교육을 한다. 한글을 모르면 한글을 열번 쓰도록 하는 것이다. 물론 반복은 효과가 있지만, 영혼의 발달 차원에서 하는 교육이 아니기 때문에, 영혼 발달이 이루어지는 데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영혼 발달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의지 결합은 이루어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결과 효과는 없는 것이다. 어떻게 하면 영혼의 기능인 의지를 발현시킬까가 관건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음은 여담으로 필자가 필자의 영혼 기능을 향상 시킨 경험이다. 먼저 말하면 가슴- 리듬체계를 통해서 발달시켰다. 슈타이너는 어떤 곳에 문제가 있으면 영혼이 제 기능을 못하기 떄문에, 영혼이 제 기능을 하도록 도와주어야 한다고 했다. 예컨대 몸을 통해서 영혼으로 들어가서 영혼이 제 기능을 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하기야 몸을 통해서 들어가는 방법외에 다른 방법이 없기는 하다.
가슴- 리듬체계는 인간의 두 부분을 가운데에서 리듬으로 조정해 주는 역할을 한다. 리듬으로 조정이 되는 이유는 "깨어있는 상태에서 '나'는 이 리듬 안에 그리고 이 리듬에 포함되어있는 물질의 신진대사 과정 안에 살고 있기 때문이다(철학 우주론 종교, 2018, 26). 아스트랄체도 '나'와 같다. 여기에서 산다는 말은 따로 따로 사는 것이 아니라, 온전히 하나가 되어있다는 말이다. 요컨대 이것은 화학변화의 개념이다. 가슴- 리듬체계 안에 '나'와 아스트랄체가 살고 있으므로 리듬을 통해서 우리는 '나'와 아스트랄체를 만날 수가 있는 것이다. 비약해서 말하면, 만나면 치료는 가능하다는 것이다.
다음은 슈타이너가 장애아 교육에서 한 말이다. "중요한 점은 리듬에 맞춰서 어떤 것이 바깥으로부터 어린이에게로 파고 든다는 점입니다. <......> 어린이의 리듬적인 본성을 고려하고 항상 반복해서 우리를 통해서 바깥으로부터 어떤 것이 가르쳐진다면, 우리는 그런 어린이들에게서 많은 것을 이룰 수 있습니다(특수교육학 강의, 2008, 131)." 즉 리듬을 통해서 아이들의 '나'와 아스트랄체에게 접근할 수가 있다는 말이다. 따라서 올바른 리듬을 적용한다면 '나'와 아스트랄체는 발달할 것이다. 이는 장애를 해소할 수 있다는 말이다. 리듬 교육은 학교에서 많이 하지만, 그외에 우리는 음악을 통해서도 접할 수가 있다. 그런데 치료를 하기 위해서는 좀더 적극적으로 접근해야 한다. 늘 음악을 들어야 한다는 말이다.
필자는 클래식 음악 중에서도 베토벤 교향곡을 거의 매일 반복해서 2- 3시간을 들었다. 요컨대 힘들거나 어려우면 음악을 들었다. 여러 음악을 들어봤지만 그 중에서도 카라얀의 지휘가 가장 와 닿았다. 필자가 생각하기에 음악은 잘 모르지만, 카라얀이 지휘한 음악은 마치 수학처럼 정확하게 딱딱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 표현이 조금 우스울 수도 있지만, 사실이 그랬다. 또 카라얀이 지휘한 다른 음악도 들었지만, 베토벤 교향곡이 가장 편안하고 행복했다. 마치 필자가 우주 어느 곳을 걷는듯 했다는 표현도 가능할 정도이다. 음악이 정신세계의 창일 뿐만 아니라 정신세계에서 노닐게도 해준다. 정신세계의 창이면 정신세계에 들어가서 노닐수가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필자의 영혼의 기능이 향상된 것을 필자는 어떻게 알았을까? 어느 날 노래(가곡)를 부르는데 그 노래의 정서가 그대로 표현되었다. 필자도 깜짝 놀라 '무슨 일이지'하고 살펴보니, 영혼이 그 노래의 정서를 감지하고 표현하고 있었다. 예컨대 비목을 부르면 비목의 정서, 포연이 가시지 않은 어느 산에 홀로 있는 국군의 무덤에 얹힌 국군의 철모가 떠오르고 그 감성을 영혼이 표현하는 것이다. 통상은 그런 감정을 느끼기도 어렵다는 생각이 들고, 필자 역시 그런 감정을 예전에는 느끼지 못했다. 이 말은 영혼이 못 느낀다는 말이다. 그런데 영혼이 느끼면 그 정서가 표현되는 것이다. 이것이 영혼 기능이 향상되었다는 말이다.
그래서 다른 노래도 실험을 해봤다. 물론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노래의 정서를 영혼이 표현한다. 그래서 영혼의 기능이 향상되었구나라고 생각한 것이다. 영혼의 기능이 느끼고, 사고하고, 행동하기이기 때문에, 누구라도 이렇게 영혼의 기능을 향상시킬 수가 있다. 우리가 지금도 하는 사고하기, 느끼기, 행동하기를 함으로써 우리 모두는 영혼의 기능을 향상시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향상되었는데도 모를 수도 있을 것이다. 또 문제는 이렇게 인지하기까지는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에도 있다 그래서 도중에 포기할 수도 있을 듯하다.
정신은 드러나지 않기 때문에 알지 못하고 또 드러나기까지에도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 어쩌면 한 생이 지나고 다음 생까지 걸릴 수도 있다. 따라서 발달장애아이들이라도 꾸준히 한다면 발달할 수가 있다. 단 지치지 말고 꾸준히 그리고 재미있게 해야 한다. "영적으로 진화하는 사람은 자신의 진보가 방해받더라도 결코 한탄하거나 하지 않습니다(교육은 치료다, 2017, 27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