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룩과 하나님 나라 마태복음 13장 33절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를 누룩에 비유하십니다. 예수님이 가르치시는 삶 지혜는 다 일상안에 있는 평범한 것들입니다. 씨, 밭, 상인, 고기잡는 일, 누룩, 가시밭 돌짝 밭, 공중의 나는 새... 이런 예수님의 비유에 등장하는 소재들은 일상에서 너무도 쉽게 만나는 소재들입니다. 그런 걸 보면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의 보물들을 / 지혜들을 / 깨달음들을 어디 특별한데서가 아니라 매일같이 만나고 매일같이 부딪히고 매일같이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 일상에서 발견하십니다. 때때로 무료할 수 있고 식상할 수 있고 기계적으로 반복되어 매너리즘에 빠질 수 있는 마치 그 어떤 신비도 기적도 품고 있지 않을 것만 같은 그 평범한 일상 안에서 어떤 사람은 그 권태로움에 무기력해지고 어떤 사람은 작은 떨림을 찾아내 오늘의 기적을 살아갑니다. 여러분들은 어떠십니까?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예수님에게만 특별한 매직과 은사가 있어서 이런 삶을 사셨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감리교안에서는 웃기지도 않은 일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매년 여선교회 속회 공과가 나오는데 그 안에 기후위기시대이다 보니 시대의 흐름에 따라 생태적인 담론들을 담은 이야기를 몇 편 실은 듯합니다. 인간과 동물, 자연의 생명이 모두 연결되어있기 때문에 창조신학의 관점에서 자연의 생명 하다못해 미물까지도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돌보아야한다는 이야기가 있었나 봅니다. 그랬더니 성경에 없는 내용을 다루었다고 구원은 인간 전용인데 그걸 자연, 사물에 까지 다룬다고 이단성이 있다고 공격을 합니다.
이런 비정상적인 사고가 일어나는 이유가 신앙을 삶 속에서 길러내는 것이 아니라 교리적으로 이해해서 그렇습니다. 오늘 교리적 선언에서도 볼 수 있듯이 하나님 나라, 구원이라는게 이땅의 일이 아니라 죽으면 천국에 가는 그런 개념으로 이해하다 보니 그런 천국에 자연이나 사물은 없는 개념으로 이해하다보니 이런 이상하게 말도 안되는 비상식적인 이해가 도출되는 겁니다. 성서 특히 복음서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신앙의 담론들, 하나님 나라, 구원, 영생(교리적 선언 의의 영생) 이런 모든 담론들은 죽음 이후의 담론들이 아닙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죽음 이후의 담론을 피하셨습니다. 복음서에 보면 죽음 이후의 부활을 믿지 않는 사두개파 사람들이 예수님께 와서 짓궂게 물어보는 장면이 있습니다. 형이 죽으면 대를 잇기 위해 둘째와 결혼하고 둘째도 죽으면 셋째와 결혼해 대를 잇고 이래야하는데 나중에 부활 때 그럼 그 사람은 누구의 아내이겠냐는 거죠. 그러니까 예수님 슬그머니 하나님은 죽은 자의 하나님이 아니라 산자의 하나님이라고 하시면서 담론을 바꾸십니다. 예수님도 모르시는 거죠. 성경에 나오는 대부분의 신앙의 담론은 지금 여기서의 삶에 대한 담론들입니다. 기독교는 삶의 종교입니다. 기도도 예배도 모임도 종교예식도 모두 지금 여기에서의 충만한 삶을 위한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닙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고 설교하고 예배하고 공동체를 만들어 하나님 나라를 향해 나아가고 하는 모든 이유가 하나님이 주신 지금 여기에서의 삶을 보다 의미있고 아름답고 풍요롭게 가꾸어가기 위한 것이죠.
그런 측면에서 보면 예수님은 매순간의 삶에 충실하셨던 것 같습니다. 내 앞에 있는 사람, 자연을 보다 온전히 만나시려했고 그것들이 주는 삶의 깨달음을 온전히 자기 것으로 가져가기 위해 최선을 다하며 사셨던 것 같습니다. 몸의 건강을 위해 모두가 평범하게 다 아는 기본적인 것들이 있습니다. 걸어야죠. 움직여야죠. 그런 것들을 외면한 채 용하다는데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내 집 앞에 온 봄을 무시한 채 산과 들로 봄을 찾아다니는 꼴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사람앞에 온전히 마음을 다하지 못하면 어디 배우러 다니면서 특별한 삶의 해결책을 찾아다니지 마십시오. 다 허상입니다. 지금 내 앞에 있는 내 아이를 놓치고 있는데 그 어떤 해결책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하나님 나라의 풍요로운 이야기를 자신의 평범한 일상에서 깨닫고 길러내시고 살아내시고 가꾸어가셨습니다. 그걸 잊지 마십시오.
오늘은 누룩이야기입니다. 이 누룩이야기에서의 방점은 누룩과 밀가루의 절묘한 조합입니다. 잘 보면 사실 누룩은 그 자체로는 별 매력이 없습니다. 그저 곰팡이 균입니다. 그런데 그것이 밀을 만나 빵이 되고 술이 되고 그러는 겁니다. 그것이 콩과 만나면 된장이 되고 간장이 되고 그러는 겁니다. 정말 신비로운 세상입니다. 그 자체로는 별거 아닌데 그것이 밀가루 전체에 스며들어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내고 있습니다.
빵과 술과 된장도 마찬가집니다. 이것들이 그 자체로만 머물다보면 그냥 썩어 자연으로 돌아가겠지요. 된장과 간장도 10년 20년 지나면 더 숙성된 맛을 내는 음식이 되겠지만 천년만년이 되면 결국 자연의 한 조각으로 사라질 겁니다. 그런데 이 다양한 장종류들이 지난주처럼 서로의 길을 격려하고 위로하는 식탁에 맛난 음식에 스며들어서 서로의 길을 축복하고 응원하는 양념으로 쓰여 서로의 신명난 에너지를 업시키는데 선용되면 그것이 곧 하나님 나라의 기쁨이요 축제인 겁니다. 제가 지난주에 메일 막국수를 먹었는데 그 메일이 100%로다 보니까 뚝뚝 끊어져요. 그런데 국물은 동치미 국물이예요. 거기에 간장과 고춧가루로 만든 양념장이 나오는데 독특한 맛이 하루의 피로를 다 풀어줘요. 이 장들이 음식에 스며들어 제대로된 맛을 내면 거기가 천국인 겁니다. 술도 그냥 그자체로 있으면 그냥 술일뿐입니다. 그런데 성서에 보면 예수님의 이야기가 술에서 시작해서 술로 끝나잖아요. 가나의 혼인잔치처럼 가난한 청춘 남녀가 만나 서로 힘들지만 잘 살아보겠다고 하는 그런 잔치에 흥을 돋우는 것으로 쓰였을 때 젊은이들의 앞길을 응원하는 축복주인 겁니다. 그런데 최후의 만찬처럼 점점 조여오는 권력자들의 죽임의 공포속에서 마지막 남은 양심을 팔고 싶지 않았던 예수공동체의 당당한 삶을 위로하는 위로와 결단의 잔이 되었을 때 그것이야말로 그 술은 새날을 여는 도구인셈이죠.
이번에 설악산에 다녀오면서도 10여명이 가셨는데 얼마나 절묘하게 자기 쓸모를 발휘했는지 예술이었습니다. 어느 누가 뭐라고 하지도 않았는데 기가막히게 적재적소에서 자신들의 일을 담당하셨어요. 어떤 분은 운전을 하시고 어떤 분은 회계를 보시고 어떤 분은 전체 기획을 하시고 어떤 분은 가장 힘들고 어려운 분들을 챙기시고 어떤 분은 맛집을 안내하시고 누가 누구에게 뭐를 맡으라고 예기한 것도 아닌데 정말로 황금분할의 법칙이었어요. 우도성 집사님이 공무원을 하셨기 때문에 얼마나 꼼꼼하게 여행계획을 짜시는지 정확한 동선과 시간과 예약과 거의 1분도 틀리지 않고 계획된 스케줄에 따라 일이 척척 진행되셨어요. 맛집은 또 우리 강원도의 사나이 조성길 집사님께서 손수 손으로 다 빚고 갈고 담근 요리들로만 손님을 맞이하는 맛집을 안내하셨어요.(갓김치, 만두, 곰국, 메밀막국수) 각각의 독특한 재능이 그 재능 자체로만은 사실 아무것도 아닐 수 있습니다. 그것이 관계에 스며들고 삶에 스며들어서 뭔가의 보람을 만들어내고 따뜻함을 창조해내고 판 자체를 질적으로 전혀 다른 예기치 못한 아름다운 삶의 반전들을 일구어낼 때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의 신비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저마다의 독특한 아름다움이 누구나에게 있는데 그것이 그 사람의 잘남으로만 자랑되지 않고 상호간에 관계 안에 녹아들고 스며들어가 서로를 살려가고 회복시켜가고 바울의 고백처럼 의롭고 평화롭고 기쁜 삶을 일구어가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절묘한 결합에 있어서 누룩이 아무리 발효식품이고 독특한 아름다움이 있어도 적절한 온도를 만나지 못하면 썩거나 다 죽어버립니다. 누룩이 발효되기 가장 적절한 온도는 30도 전후입니다. 너무 차가워도 발효가 안되거나 썩고 너무 뜨거워도 죽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상호적이라는 것입니다. 제아무리 잘난 독특한 아름다움도 따뜻한 시선안에서 자란다는 사실입니다.
어제 파주시민합창단 공연에 다녀왔습니다. 2부에 걸쳐서 시민합창단외에도 여러 단체들이 찬조 출연해서 성황리에 공연을 끝냈습니다. 특이한 점이 있었는데 공연팀중에 놀잇다라는 발달 장애인 사회적 협동조합에서 운영하는 합창단도 있었습니다. 발달 장애인 친구들이 많이 와서 공연내내 함께 참여했습니다. 공연이 어땠을 것 같습니까? 누군가가 보기에는 공연내내 어수선했을 거라고 생각했을 겁니다. 수시로 소리를 지르고 공연하러 앞에 나갔는데도 공연을 안하고 소리만 지르고 이런 일들이 계속 반복되었어요. 그런데 신기한 건 어느 누구도 그걸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아요. 공연내내 여기저기서 소리가 났지만 사람들은 그 소리를 느끼면서도 누구도 제지하지 않아요. 오히려 즐기는듯해요. 덩달아 박수도 치고 춤도 추고소리도 지르고... 세종문화회관과 같은 세련된 공연 분위기속에서는 느낄 수 없는 묘한 분위기였습니다. 뭔가 시장바닥처럼 어수선한데 흥이 있고 다양한 것들을 있는 그대로 바라봐주는 따뜻함이 있고 완벽하지 않은 어설픈이 있지만 그렇지만 생동감있게 살아있는 뭔가의 사람냄새를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아이들의 다양한 시선을 있는 그대로 함께 따뜻하게 바라봐주는 마음의 공감대가 만들어낸 세상입니다.
아무리 잘난 사람도 따뜻한 시선이 없으면 못 큽니다. 한때 야구계를 주름잡았던 최동원이란 투수가 있습니다. 그가 전성기 때는 롯데를 한국시리즈로 이끌면서 한국시리즈 총 7경기중에 5번이나 등판해서 4번이나 완투를 했던 적도 있었습니다. 수년동안 20승 투수였구요. 그런 그를 그의 인생전성기인 1989년에 선수들 노조(선수회)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삼성으로 트레이트를 시킵니다. 영원한 롯데맨이었던 그가 삼성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을까요? 시즌 5승도 못채우고 2년만에 은퇴를 선언합니다. 따뜻한 시선으로 보호되지 않는 선수는 그 어떤 선수라도 살아남지를 못합니다.
하느님 나라는 상호작용입니다. 저마다 가지고 있는 독특함이 저마다의 마음으로 삶으로 관계로 공동체로 스며들어가 마침내 서로를 아름답게 살려갈 수 있는 신비의 세상입니다. 그리고 그 독특함 때로는 불편하게 느껴지는 독특함까지도 생명의 기운의 한조각으로 승화시켜나갈 수 있는 따뜻하고도 온유한 시선 이 시선의 상호작용으로 만들어가는 신비로운 세상입니다. 독특함은 자랑이 아니라 스며듦으로 그리고 그 스며듦은 따스하게 열린 서로의 시선안에서 하나님 나라의 신비로 자라난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신비로움이 여러분들의 일상을 더욱더 아름답게 꽃피우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