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이제 아슬아슬 살아가기로 했다. 정확히 표현하자면 아슬아슬 살아갈 수 밖에 없다고 해야 맞겠다.
누군가 어떻게 살기로 결심했다고 한들, 그 인생이 그의 결심대로 살아지는건 극히 소수일 뿐 대다수 사람들은 시간의 씨줄과 날줄에서 생겨나는 사건과 사건으로 결심한 인생과는 안녕하는 일이 많다.
내가 결심한 인생과 안녕하고 나는 또 다른 결심과 마주했다.
아슬아슬 살아가자.
누가 아슬아슬한 인생을 좋아하겠는가
나는 어쩌면 결심을 당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지난 12월에 처음 난소암 판정을 받고 그래도 초기에 발견된걸 다행이라고 여기라는 의사선생님의 말한마디에 위로를 얻으며
수술과 6개월간의 항암치료를 견디고 이제 막 자유인이 된 참이다. 결국 진정한 자유는 얻지 못했다. 마지막 항암이후 CT 검사에서
폐에 이상소견이 발견되었다. 이 병변은 아무것도 아닐수 있거나, 유방암 전력이 있기 때문에 생긴 또다른 암이거나, 난소암 재발이거나.... 부디 아무것도 아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지만 좀처럼 자유인이 될 수가 없다.
순간순간, 시시때때로, 순식간에 나는 감옥에 갇힌다. 스스로.
그래도 이번엔 1박2일만에 감옥에서 나왔다. 그냥 아슬아슬 살자. 오늘 하루 살고, 또 오늘 하루 살고.
미래, 희망 그딴거 없어도 그냥 오늘 살아보자. 마치 미래와 희망이 있는 사람처럼
다행인건 내일 정도는 약속을 할 수 있다는 것.
어제 저녁 먹고 갑자기 냉장고가 돌아가셨다.
이 더위에 뭔일인가.
일단 녹으면 약간의 큰일이 발생하는(?) 아이스크림통과 각얼음들은 1층 서브 냉장고로 옮겨두고 벌레난쌀과 김장때 쓴다고 얻어오신 황태대가리를 비워낸 김치냉장고로 나머지는 이사했다. 뭐가 그리 많은지... 그동안 소홀히 여기긴 했지만 도통 기억나지도 않는 여러가지 액체와 청, 정체를 알수없는 음식-이제 음식이라고 하기엔 무섭다-들, 버리고 버리고 그래도 미련이 남는 아이들만 이사했는데도 역시나 아기코끼리 냉장고에 넣기....
같이 밥을 먹던 교회 자매들이 (우리는 작은 교회를 섬기고 있는 10년지기들이다. 매일은 아니지만 주3회정도는 당번을 정해 저녁식사를 같이 하고있다. 이 이야기는 나중에 풀어보자) 앉은 자리에서 검색을 하더니 100만원이 훌쩍 넘는 냉장고를 12개월 할부로 질러 버렸다.
예고도 없이 돌아가신 냉장고를 애도할 틈도 없이 뭐가 녹을까 상할까 분주한 시간을 보내고 나니 금새 내일이면 아기코끼리만한 냉장고가 들어온다.
나는 오늘 10년이상 우리와 함께 했던 냉장고를 애도하고 잘 보내줄것이다. 너도 역시 아슬 아슬 살았을까? 하루하루 주어진 날까지 냉장고의 소임을 다했겠지, 하지만 음식을 차갑게 하는 너의 부단한 노력에 마땅한 보상보다는 당연함으로 치부한 시간들이 더 많았겠지...
고마웠다, 그대! 함께 한 날들이 하루하루 소중했었네...
추신
한바탕 난리가 지나간후 냉장고는 다시 돌아왔다.
이미 주문해 버린 냉장고, 이미 이별을 마친 냉장고, 실은 얘보다 더 오래살고 있는 얘가 있는데 이아이도 언제 가실지 몰라 ...
삶은 선택의 연속이라지만 참 알 수 없는 일이 계속 되기도 한다.
계획한 삶은 아니지만 그런대로 괜찮았다고 할 수 있겠다.
언제나 길은 길로 이어지고 하늘은 넓으니까
그리고 또다른 문이 인도하는 계획하지 않았던, 아니 계획할 수 없었던 삶이 주어지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