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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의 문학성-에세이문학(2018년 가을호)을 읽고
方 旻
1. 문학성이란?
‘수필은 문학이다’라고 하면, 이 진술은 너무 당연해서 하나마나한 말인가? 그렇지 않다. 문학의 한 식구인 수필에서 그 정체가 무엇인지를 따지는 일은 결코 만만하거나 당연한 일은 아니다. 우리는 인간이지만 그 정체성을 따지는 인간성 여부에 관해서는 인문학 전체가 해당될 정도로 폭과 깊이가 끝도 없다. 문학성 역시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어떤 것을 문학으로 볼 것인가에 대한 논의는 인간성 논의와 인생론처럼 해도 해도 끝이 없다. 이 자리에서 수필의 문학성을, 그 정체성을 살피는 일 역시 이와 유사한 과제다. 구체 사물이든 추론 대상이든 어떠한 것의 정체를 따지는 일은 여러 방식이 있을 수 있다. 그 중 하나로 그 부분적 속성과 요건을 살피는 일 또한 유용한 방식이다. 인간성을 살필 때도, 인간성을 구성하는 부분 속성을 하나씩 살펴서 그것을 모아 종합한 것으로 판정할 수 있다. 특히 전체를 하나로 포괄해서 보기 어려운 것은 부분으로 쪼개서 다루는 것이 일반적이다. 마치 큰 소를 잡아서 부분을 해체하여 그릇에 담는 것처럼, 그 역으로 부분을 모아서 전체를 파악하는 것도, 논리학에선 연역과 귀납을 구분하듯, 문학성도 몇 개 부분 요건 관점에서 분할하여 문학성의 정체를 파악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의 문학성을 판정하기 위해 요건별로 분리 구분해 살펴보려고 한다. 물론 이와 다른 방법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이 방법이 유일한 것도 아니고 반드시 정확한 것도 아니지만 쓸모 있는 한 방법임은 분명하다. 이는 작가가 중심인 주제 관점, 사회를 반영한 제재 관점, 작품의 미학적 완성도를 재는 문장과 구성 관점, 끝으로 공익 면에서 독자 관점의 넷이다. 첫째로 작가 편에서 보려는 것은 주제가 가진 그 속성이다. 누누이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는 것은 어떠한 글이라도 반드시 주제가 있어야 하고 이것도 또렷할수록 좋다는 점이다. 다만 문학 작품은 일반 산문과 달리 외면으로 명시적이지 않고 내면에 잠재하여 주제를 암시할 수 있다. 독자가 추정하거나 다양하게 판단하고 수용하도록 열린 상태를 인정하여 의도적으로 주제를 확정하지 않는 경우가 적지 않다는 사실이다. 강조할 점은 주제가 표면화하지 않았을 뿐 주제가 없는 것은 아니란 것. 다만 작가에 따라서 개방적 자세로 폭넓게 열어 놓기를 즐기는 경우와, 명확히 주제를 표명하는 걸 고수하는 작가별 개성이 다를 뿐이다. 또한 이점은 문학의 수용미학 관점에서 보면 작가가 설정한 주제일지라도 독자 나름의 창의적 해석도 충분히 허용하는 만큼 주제 추출과 해석자의 자유 폭은 그만큼 넓다고 하겠다. 어쨌든 설혹 하나만의 고정된 주제는 아니라도 반드시 주제는 있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주제 설정에서 지향할 으뜸 요건은 진실성 여부다. 이것은 다른 글과 구별되는 독특한 개성적 주제를 강조하는 것이지만 최종 종착점은 진실성이다. 인간 삶은 보편성이 편재遍在하니 실상 새로운 주제를 작품마다 다르게 설정하는 것이 그리 용이한 것은 아니다. 하지만 기성 작품과는 다른 최대한 독특한 주제를 내세울 수 있어야 하되 진실에 기반基盤한 주제, 진실을 목표로 삼는 주제를 설정하여 제시할 때 수필 문학성의 제일 요건을 충족한다.
2. 주제 요건
서장원의 <장원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 노년의 삶이 어떠해야하는지를 묻는다. 다시 말하자면 노년 삶의 진실한 자세에 대해 진지하게 묻고 답한다. 작가 자문과 자답 방식을 선택하여 수필 일반의 자전류 방식을 비튼다. 이 시도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화자는 내면 자아를 객으로 불러 대화하면서 자전류 일반의 고백 경직성을 완화시킨다. 이 대화방식의 간접 진술은 진실한 삶에 대한 작가의 진정성을 강화시킨다. 나이가 한둘 들어갈수록 인생을 진실하게 살려는 사람은 누구나 과거 자기 삶과 현재, 미래에 어떤 삶이 바람직한가 묻게 마련이다. 함부로 되는 대로 살려고 한다면 모르지만 쌀알만큼이라도 생의 오연傲然함을 인식한 사람은 이런 질문이 꽤 자연스럽고 진정성이 그득하다. 몇 가지 정리하고 싶은 것, 행복은 무엇인가? 몇 살까지 살 수 있을까? 하직 시에 남기고 싶은 것, 죽음에 직면해서 취할 행동 따위, 그야말로 노년에게 절실한 것에 대한 진지함이 묻어난다. 수필로 다루기 적합한 제재를 파고들어 노년이 맞닥뜨리는 삶의 진실을 묻는다. 이것을 간접 고백 형식을 빌어서 자아를 객체화하여 대화함으로써 거부감을 덜어낸다. 문학에서만이, 특히 수필에서는 이처럼 가상 인물과 대화하면서 자신의 속생각을 진정성 가득 풀어낼 수 있다. 자신의 진솔한 내면 실상을 수필 문학이 아닌 어느 글에서 펼쳐볼 수 있겠는가.
서숙의 <기억에게 안부를 묻다>는 남에게 비치는 “진정한 나의 모습”이란 무엇인가를 잔잔하게 묻는다. 그 자신의 모습도 세월 따라 흘러가는 것은 아닌지. 예전에 자신을 기억했던 “기억” 속의 “그녀를 만난다고 한들 서로 알아보지 못할 것이다.”고. “화장을 지운 내 모습이 화장을 한 내 모습보다 더 진실한 내 모습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고 속마음을 내비친다. 진실한 자아상에 대한 탐색은 물론이고 ‘기억’의 진실까지 묻는다. 어떤 소중한 기억도 시간이 흐르면 퇴색하고 변색하여 원래 실상과는 거리가 있다. 그것의 진부를 알고 싶어 ‘안부’라도 물어야 한다. 이 기억의 거리감을 소거하기 위해서 사진을 찍고 녹음하는 동영상을 이 시대는 선호하는지도 모른다. 이처럼 인간의 자아 탐구 욕망은 언제나 진실을 추적하기에 문학의 일등 주제로 손색없다.
동일한 주제 설정은 이혜숙의 <세상을 보는 두 가지 방법>에서도 만난다. 진정한 자아 정체성 파악의 어려움을 토로한 이 글 역시 주제의 진실성에 부합한다. 문학에서 자아상을 파지把持하는 물체로 자주 등장하는 거울이 유리와 함께 동반하여 양면적이다. 그만큼 진실에 가까이 다가설 수 있게 한다. 즉, 하나는 자아 반영체로, 다른 하나는 타인 투시체로 내가 직접 보는 나와, 남을 보는 나. 거울을 통한 자아성찰을 거쳐서 세상을 보는가, 유리를 통한 타인 관찰로 세상을 이해하느냐 차이는 꽤 크다. 자기만을 바라보느냐, 나와 남을 함께 보느냐의 차이는 이기적인가와 이타적이냐를 가른다. 작가는 ‘한의원’에서 일면 칭찬받을 이타적 행위를 하고도 혼란스럽다. 그것은 나와 남을 함께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이 양면 시각은 “선의, 친절, 배려”가 한편으로는 “교만과 무례”의 “다른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기에 이른다. 이것도 온전한 시각이라 단정할 수 없게 의문스럽다. 작가가 “밖을 보려고 했”던 시도는 결국 “시멘트 벽뿐” 진실은 아직도 그 참된 정체를 드러내지 않는다. 그렇다. 진실은 그리 쉽게 우리 앞에 자기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므로 우리는 끊임없이 이 진실의 정체를 탐구하고 추적한다. 여타 문학에서와 같이 수필에서도 주제가 진실해야 하고, 진실한 주제를 설정해야 하는 이유다.
3. 제재 요건
두 번째 문학성 요건은 수필 제재의 문제다. 수필은 작가 체험이 주요 바탕이다. 앞서 풀어 본 주제 설정에서와 같이 제재도 우리네 인생을 대상으로 삼으니 대다수 삶이 유사한 경우가 많다. 우리 집이나 이웃집이나 한국 사람이 사는 것은 따지고 보면 거기서 거기다. 때문에 특이한 다른 체험을 제재로 삼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그러면 유사한 체험 중에서도 독자 흥미를 끌 수 있는 체험, 이를 발굴하여 흥미롭게 해석하여 제재로 건져 올려야 문학성을 담보한다. 체험 실상이 참신할수록 문학성이 풍부한 좋은 제재이다. 이야깃거리 자체가 흥미가 있으면 글은 쉬워지고 독자 공감을 얻기가 수월하기 마련이다. 좋은 체험을 낚아 올리면 그 자체만으로도 글은 반 성공한 셈이다. 최상의 제재는 흥미가 있는 색다른 체험에서 많이 낚는다. 하지만 그런 제재, 특히 수필 작가가 만날 수 있는 기회는 잘 오지 않는다. 사정이 이러하다고 그것을 찾아 나서기도 만만하지 않은 현실이다. 작가 자신이 살아오며 부딪힌 지난 체험이나 현재 살면서 겪는 일에서 새로운 글거리를 찾아내야 하는데, 그렇다고 흥미 있는 사건을 일부러 만들어낼 수도 없다. 이 대목에서 수필가는 소설가를 부러워한다. 그들은 얼마든지 상상으로 주인공을 내세워 다양한 흥미로운 사건과 사연을 허구로 꾸밀 수 있으니 얼마나 좋겠는가. 수필가가 이런 장르적 한계를 한탄할 수만은 없다. 퍽 어려운 일이지만 직접 겪은 생생한 체험을 가지고 그 안에서 흥미롭고 참신한 제재를 원유를 정제하듯, 다이아아몬드 원석을 발굴하듯 해야 한다. 이 일은 결코 쉬운 일도 아니고 자주 있는 일도 아니다. 잔혹하게 말하자면 수필가의 운명이자 업보라 할 만큼 지난하고 험난한 일이다. 이를 돌파하려고 사물을 관찰하여 나름 의미를 발굴하는 우리 고전의 가전체假傳體설화를 발전시킨 관물觀物 수필(최장순)로 나가거나, 내적 사유의 세계를 천착하는 관념 수필(최민자)에 나서기도 한다. 그러나 대부분 작가는 생활 체험을 주요 제재로 하는 일상 수필(정성화)에서 맴돈다. 그만큼 수필이 가는 글은 지난하다. 때문에 수필에서 색다른 체험은 소중하고 귀하다. 이점은 모든 수필가가 새로운 소재원素材源을 찾아나서야 할 필연적 이유이기도 하다.
김계원의 <검표원>은 프랑스 파리에서 아들을 데리고 유학하던 시절에 겪은 일이다. 파리 지하철 검표원의 부정 승차 단속에 걸린 일과 그것을 처리하는 과정에서 만난 담당관의 정확한 업무 처리를 체험하고 정의로운 사회를 실감한 사연이다. 이 제재에서 흥미를 느끼는 것은 우리와 다른 방식으로 업무 처리하는 파리 철도 직원들의 색다름이다. 이 사연은 일반 독자가 쉽게 만날 수 없는 괘 특이한 체험 스토리라서 흥미를 끈다. 그것을 작가가 얼마나 강렬하게 기억하고 있으면 퍽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글로 쓰게 되었는지 짐작해 보면 알 만한 일이다. 이 <검표원>은 프랑스 공기업의 사무가 선진국다운 세련됨에서 비롯한 것임을 알게 한다. 이렇게 특이한 체험에만 수필의 표적을 맞추면 때로는 소재주의에 빠질 위험성이 다분하다. 스토리가 특별한 것만을 찾아서 글을 쓰기는 우리 삶의 시공이 매우 한정적이기 때문이다. 소설 《부초》의 한수산이나, 《만다라》의 김성동처럼 직접 특이 체험의 삶에 의도적으로 들어가 볼 수도 어렵고, 몇 년간 동행 취재하며 자료를 모으기도 불가하다. 남북전쟁을 재구성한 소설을 쓰려고 도서관에서 수년간 살다시피 하여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쓴 마가렛 미첼처럼 따라 하기도 어렵고, 김훈처럼 자전거로 세상 여행 다니며 겪은 체험을 사냥하는 것도, 조정래처럼 《정글 만리》나 《아리랑》을 쓰려고 소설 속 현장을 답사하고 취재하는 일은 아무나 쉽게 따라할 수 있는 게 아니다. 그러므로 일상을 살아가면서 자연스럽게 만나게 된 체험 중에서 일부를 살리는 게 수필가에겐 일반적이다. 어쩌다 만날 수 있는 소재적 특이함을 마냥 기다리거나 그것을 인위적으로 만들려고 할 수도 없는 일. 더구나 억지로 신기한 어떤 것을 쫓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도 않다. <검표원>은 제재의 특이함에 관한 여러 문제를 떠올리게 하면서 이를 수필감으로 잡아와 문학성을 살린다.
최양자 <등> 또한 특이한 제재로 문학성을 품는다. 인체의 등을 탐구하며 낯선 관점으로 관물觀物 수필을 완성한다. 사물 수필로도 불리는 관물 수필은 웬만해선 쉽게 다루기 어려운 제재다. 형상화 하려는 사물 대상에 대한 깊은 관찰을 바탕으로 그에 걸맞은 예리한 해석과 인간적 의미까지 잡아내려면 아무나 선뜻 붓을 대기 어렵다. 이런 점에서도 이 <등>은 가산점을 받을 수 있지만, 신체 부분을, 그것도 자주 주목하는 전면의 소위 이목구비나 안면과 머리 따위가 아니라 등에 날카로운 눈을 들이대는 것은 인간 정신이 사는 집인 몸에 대한 관심의 결과요, 폭넓게 인간을 살피려는 인간 자아 탐구의 한 시도로 보인다. 그가 여기 ‘등’에서 문학으로 건져 올린 것은 “유독 뛰어난” 감각을 넘고 “살갗의 언어”를 건너서 “삶의 거울”을 지나 “인간의 삶과 죽음”에로 귀착하는 경로에서 보여준 천착이다. 평소에 별로 주목하지도 않고 아무런 관심도 기울이지 않는, 앞을 위해 받치고 있는 부분, 볼 수 없는 어떤 부분에서 새롭게 의미를 잡아챈다. 최양자 작가는 등에서 인간사의 제반 사연과 정서를 아우르고 마침내는 “삶과 죽음이 함께하는 곳”이란 생사의 공유지까지 찾아내 도달한다. 그러므로 ‘등’에서 발견한 것은 미지의 신대륙에서 잠복하던 넉넉한 인간적 생사 의미와 풍부한 해석의 광맥을 보여준다. 당연히 문학성을 확보하는 가작이라 하겠다.
4. 구성 요건
세 번째는 제재를 골라들고 설정한 주제를 형상하기 위한 실제 작업 단계인 구성 요건이다. 아무리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란 말이 있다. 구성은 바로 제재를 잇고 꿰어 맞춰서 한 편 글로 만들어 내는 일이다. 앞 속담에서 드러나지만 아무리 좋은 구슬도 제대로 꿰지 않으면 보배가 될 수 없다. 구슬을 어떤 순서로 어떤 크기로 맞춰야 하는지는 상당한 경험과 숙련 기술이 필요하다. 체험 제재의 다양한 토막들을 어떻게 구성하느냐에 따라서 제재를 살린 주제를 잘 드러내는지 여부가 판가름 난다. 이 맥락을 살려야 하는 면에서 가장 주목할 문학성은 충실성이다. 제재 중 상호 관련한 체험을 성글게 연결해서도 안 되며, 또한 여러 조각의 체험 화소 사이에 빈틈을 허용하지 않도록 아주 치밀하게 조직해야 한다. 즉 필요한 내용은 반드시 들어가도록 충실하게 짜야하고, 어떤 화소 하나의 순서를 바꾸거나 제재 내용을 변경했을 때 맥락이 달라지지 않도록 꽉 붙들어 매야 한다. 이를테면 구성 요소가 긴밀한 한 덩어리 구조를 구성하는 것이 최상의 문학 요건이다.
이런 충실성을 갖춘 구성에서 함께 지향할 목표는 바로 효율성이다. 제한된 일반적 수필 요구 분량은 10-15매 정도다. 이를 충족시키려면 최소한 문장으로 효과적 문단 조직을 갖추어 효율적 구성으로 매듭지어야만 비로소 문학성을 담보할 수 있다. 글에서 구성은 작품의 예술성 성취 여부를 가리는 기본 뼈대 몫을 맡는 꽤 막중한 기능이다. 일반적으로 수필가는 체험 제재를 다루면 시간 순차에 따른 구성을 선호한다. 글 서두는 그 일을 떠올리게 된 집필 동기나 계기를 서술하고 이어서 그 기억을 회고하면서 이야기를 풀어낸다. 결미에서는 그에 관한 작가의 최종 정서와 생각을 정리하면서 마무리 짓는 구성 방식이 보통이다. 이렇게 하면 상당히 평면적이고 밋밋한 방식이 된다. 이를 탈피하여 흥미를 유발하기 위해서는 시간 순서를 바꾸고 화소별 인과 구성의 플롯 방식을 쓰는 것이 더욱 바람직하다. 단순한 스토리 전개보다는 플롯을 엮는 것과, 때로 극적 장면을 절정에 두거나 한시적 기승전결로 구성하는 방식도 필요하다. 따라서 어떠한 구성을 선택하느냐가 문학에서 예술성을 강화하는 하나의 척도가 되기도 한다.
구성면에서 특별하게 문학성을 갖춘 글로는 권순옥 <요강 이야기>와 이명선 <각설하자, 어른>을 고를 만하다. <요강 이야기>는 제재도 약간 특이하지만 그것을 수필로 풀어가면서 구성의 효율성을 살린 점이 더욱 이채롭다. 이 글에서 작가 개인 체험의 시간 폭은 무척 넓다. 화자가 “시집오기 전”부터 시작하여 시어머니가 돌아가신 뒤에 이르는 만큼 작가는 이순이 넘고, “아흔다섯” 시아버지가 “카랑카랑한 정신”상태인 “오늘”에까지 이어진다. 한 3-40년의 세월이 한 편에 담겨있다. 이토록 긴 시간에서도 오직 “요강 이야기”로만 집중하여 한 작은 대상에 몰입하는 것도 상찬할 일이다. 그런데 이것을 시간 순에 따른 평면 구성을 버리고 독자가 다소 사연 맥락을 헷갈리게 할 만큼 복잡한 구성으로 주목하게 한다. 이 사연을 크게 둘로 나눈다면, 하나는 요강을 사용하던 시어머니의 죽음과 장례고, 둘은 가신 분이 쓰던 물건인 요강과 생존한 시아버지가 일상 활동하는 일이다. 작가에게는 둘 다 “값진 유산”이란 인식에 도달함으로써 이야기가 모아진다. 좀 더 풀자면 요강과 그것을 시어머니와 함께 사용하시던 시아버님의 “카랑카랑한 정신”과 조만식 선생 일화까지 인용하며, 단순한 요강 사물에서 찾아 새겨야할 의미의 핵심을 전한다. 체험 시간이 교차하면서 요강에 담긴 가족사적 사연과 전래적 의미의 종교적 가치 해석도 여기에 첨가한다. 이것을 위인 일화에 담긴 인생론적 의미로 넓히고, 작가가 그것을 종합하고 일체화시켜 “오늘도 묵묵히 요강을 부신다.”로 자기화 한다. 이런 결미에 이르는 과정이 단순 스토리 제시가 아니라 의미 맥락에 따른 여러 화소를 엮고 플롯화하여 구성한 점에서 이 작품이 생동감 있도록 현재성을 창출한다.
이명선의 <각설하자, 어른>은 MRA를 4분씩 네 차례 도합 20분 동안 찍는 사이에 떠오른 일종의 의식 흐름에 따른 옴니버스omnibus식 구성이다. 작품 서두에서 왜 MRA를 찍게 되었는지, 쵤영 시작의 장면을 간접 인용하여 제시한다. 방사선 기사와 작가인 화자가 대화하는 간접화법의 지문뿐인데, 이것은 실제 말과 그에 대한 마음속 생각을 구분하지 않게 한다. 일반 수필 산문 문법에 비추어 보자면 낯설다. 의식과 그 표현 기호인 말을 구분하지 않고 동일하게 다루는 것은 서로 넘나들면서 자유롭게 교차하고 간섭하며 생각의 흐름과 그 드러냄을 작가 의도대로 펼쳐보겠다는 야심찬 통보다. 5개의 각 장면을 연결하고, 결미에서 이 글 주제 인식인 “어른은 미숙하다”를 드러낸다. 이 결론을 이끌어내기 위해 “겸손하지 않은 사람”을 지적하고 “알아보려는 진지한 노력도 하지 않으면서 아는 체하는 일”을 꼬집는다. 작가는 “천명관 소설 ‘프랭크와 나’에 대한 서평”을 쓸 고민이 실상 오십견 치료를 위한 MRA 촬영보다 더 힘들다. 기사가 물건처럼 취급하는 것에 대한 불평은 소설 속 인물의 행태에 대한 불평과 반론으로 이어진다. 소설 세상과 현실 세상을 대비하며 독설이 이어지고 남편과 자식, 세상에 대한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생각이 뒤죽박죽 이어진다. 만약 이것에 번호를 붙여 문단을 나누지 않고 또 MRA 촬영이란 비일상적 상황에 두지 않고, 한 걸음 더 나아가 소설 스토리를 더불어 거론하면서까지 이렇게 의식이 흐르는 대로 두런거리는 것은 실상 황당한 넋두리일 수 있다. 이 점을 형태는 분리하고 내용은 뒤섞어 묶는 구성의 변화로 자연스레 녹아들게 배치한다. 헤아리자면 이 글 주제는 별로 특이할 것은 없다. 어른은 어른답게 행실을 하자거나 또는 노력이나 준비도 하지 않고 단순히 나이를 먹은 것만으로는 어른이라 할 수 없다는 자기 확인 겸 소위 어른에게 보내는 경고 겸 충고 메시지다. 크게 주목할 거리가 없는데도 구성의 변화로 진지한 말씀으로 전환시키고 색다른 빛깔의 글을 엮어낸다. 구성의 기법적 성취라고 보여 문학성이 높다할 만하다.
5. 문장 또는 예술성 요건
네 번째 문학성 요건은 바로 문장이다. 그 중요성에 대해서도 작가들은 이미 충분하게 인식하므로 글의 문학적 우수성을 평가하는 데 문장이 반드시 중요 요소로 작용한다는 것도 주지한다. 이 문장에서 높이 평가할 일차 척도는 바로 정확성이다. 정확한 문장은 말처럼 청자를 대면하고 의사를 소통할 수 없기에 더욱 필요하다. 일단 문자로 기록(인쇄)하고 나면 수정 불가다. 때문에 몇 번을 퇴고하고 수정하여 빈틈없이 작가가 표현 소통하려는 의미를 정확하게 만들어야 한다. 정확성이 부족한 문장은 예술적 미감美感을 위해서 미사여구를 동원하여 치장하여도 어렵다. 그것은 아무리 화장을 잘해도 원판이 부족하면 결과가 미흡한 것과 같다. 덧붙여 정확한 문장에서 함축성을 가미하면 미적 가치를 훨씬 더 확보할 수 있다. 이 함축성은 말이 가진 한계에서 필요한 요구다. 정해진 분량 글을 쓰자면 사용할 어휘 수도 일정하기 때문에 간결한 문장을 요구한다. 같은 말을 반복해서 쓴다면 모르지만 다양한 어휘를 골라 쓰려면 간결하되 그 효과 면에서 우수한 경제 용어인 가성비價性比를 따져야 한다. 적은 어휘로 많은 의미를 담아서 표현하고 전달하려면 한 단어가 여러 의미를 가져야 한다. 여러 의미를 한 단어가 가진 것이 바로 함축성이다. 이런 함축성을 지닌 단어를 선택하거나 다른 단어를 함축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그 함축성을 문장에서 얼마나 잘 활용하는가를 문학성의 한 기준으로 삼는 것은 무척 당연한 관점이다.
김미옥의 <밥먹자>는 간결한 문장의 모범이다. 이른 바 깔끔한 문장이다. 호흡이 안정된 글로 대부분 문장에서 군더더기가 없다. 이것은 문장 변화를 주려고 종결어미까지도 변화를 시도한 면에서 확인한다. 명사형, 의문형. 연결어미로 종결을 변화시킨 것은 작가가 “~다. ~다. ~다.”의 음운 고정의 답답함과 폐쇄성을 의식했다는 말이다. 몇 예를 보기로 하자. “다가오는 식사 시간.”, “혼자 실컷 먹으라고.”, “시집살이일까.”, “비위도 못 맞추다니.”, “되지 않느냐는 여자.”, “더 바랄 게 없겠는데….” 등이다. 이것은 보통 ‘식사시간이다.’로 ‘먹으라고 한다.’로 쓰는 게 일반적이다. 글을 쓰면서 문장 리듬을 특별하게 생각해 본 사람은 이점을 진즉 인지했을 것이다. 우리 한국어로 쓰는 시에는 엄밀히 말해서 율律은 있으나 운韻은 없다. 모두가 “다, 다, 다”로 끝나니 다른 음운이 문장 말미에 오지 못한다. 자음은 다르고 유성 모음은 유사하거나 같으면서도 뜻까지 다른 낱말이 오며 음운이 어울리는 운을 만들지 못한다. 한시와 영시에 있는 그런 운의 변화는 결코 없으니 낭독, 낭송을 하면 끝에서 “다, 다, 다”가 걸리는 게 얼마나 문제인가. 이걸 인식하는 사람도 매우 소수지만, 한국 시와 산문은 그런 점에서 보면 낭송에 잘 어울리지 않는다. 음성 상징의 청각미를 맛보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것을 탈피하고자 아어체雅語體인 “네, 라, 리, 니, 요” 따위를 써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이를 고려해서 시가 아닌 산문에서 그걸 시도한다는 것은 작가의 문장 탐구 노력이 적잖은 것이고 아주 놀랄 만하다. 시 창작도 겸업하면서 수필 낭송도 연마하는 작가에겐 이런 문제를 남다른 언어 감각 촉수로 일찍이 포착하였을 것이다. 이 촉수를 발전시켜 산문의 다양한 종결 탐색을 계속해 가길 바란다. 한국 수필의 문장 변화는 수필가들이 함께 연구하고 성실하게 실험해 볼 현재와 미래의 중요한 탐구 거리임을 진정 공감한다.
예술은 단순하게 말하자면 기술적 완성도를 뜻한다. 인공적 기교를 최고도로 발휘하여 성취한 것이 자연물과 대비할 수 있는 예술이다. 본 《에세이문학》이 예술성을 지향한다면, 이것은 문장의 기술적 완성도를 목표로 하는 수필을 지향한다는 말이다. 문학을 예술로서 본다면 이것은 내용에 있는 게 아니라 형태인 문장에 주로 해당한다. 예술의 적장자嫡長子 주인공인 음악과 회화를 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소위 예술엔 의미 내용이랄 게 없다. 오직 시청각으로 감지하고 감각할 수 있는 무형적이건 유형적이건 형태만이 두드러진다. 그런데 문학은 의미 내용이 핵심이다. 곧 언어 의미가 여타 예술의 형태상 기술성技術性 혹은 기교성과 거리가 멀다. 여기서 문학이 오직 내세울 게 있다면 문장뿐이다. 그런데 문장 예술성은 따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반드시 내용인 글의 주제와 직결한다. 글의 핵인 주제와 의미에만 집중하여 글을 쓴다면 예술성을 품기 어렵다. 일부 수필가들은 문장에 대한 충분한 인식 없이 내용의 주제 성향만 문제 삼는데 이를 문장의 기교로 감싸 안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을 미처 인지하지 못하고 글을 쓰는 작가가 적지 않은 게 안타까운 오늘날 우리 수필계 현실이다. 그 역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즉 아름다운 미사여구만을 늘어놓는 미문만을 우대하는 ‘미문주의美文主義’도 주제와 조응하지 못하면 휘황한 말소리만 요란할 뿐이다. 어울리지 않게 진한 화장으로 교태가 넘치는 거리의 여자를 보는 것 마냥 역겹거나 불쾌하다. 당연히 글 주제와 의미가 우선적으로 중요하다. 하지만 이것의 형태화, 곧 지각 대상인 문장으로, 또는 의미체인 바람직한 형상으로 형상화되지 않는다면 그냥 의미 덩어리가 있을 뿐이다. 이 지점에서 문학 예술성, 즉 문장의 기술적 완성도가 요구된다. 누가 뭐라 한다 해도 이 내용과 형태의 조화가 바람직한 문학 모습이다. 두 요소가 따로 논다면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 특히 시에서는 문장의 염결성을, 내용과 형태의 합체를 지향한다. 소월의 ‘산유화’나 미당의 ‘국화 옆에서’, 윤동주의 ‘자화상’에서 어디 한 단어, 문장 부호 하나 다르게 바꿀 수 있는가. 이처럼 완벽한 일치와 조화가 바람직한 예술성을 갖춘 문학의 실상이다. 산문 수필도 이런 시적 지향을 추동해야 한다. 이점을 수필가도 염두에 두고 글을 써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점에서 김미옥의 <밥 먹자>가 주목에 제 값한다. 물론 완벽하거나 보탤 게 없다는 말은 아니다. 그런 시도와 의식만으로도 이미 훌륭한 예술성을 얻었다 할 것이다.
고경서의 <감성어 낚시>를 보자. 이 작가는 말을 제법 잘 다룰 줄 안다. 말이 가진 본래 목적인 의사소통을 위한 의미 표현과 전달 기능을 뒤집고, 색다르게 쓴다. 그녀 이력에 보면 수필에 입문하기 전에 시로도 등단했다. 수필로 시작해서 시로 갔다가 다시 수필로 컴백했다. 알고 보면 시에서 언어를 다루는 솜씨를 가져와 수필에 원용한 셈이다. 말은 의미와 발음의 두 자질이 결합하여 제 기능을 한다. 이 둘을 작가는 교묘하게 또 전격적으로 해체하여 분리 사용한다. 우리말이 가진 동음이의어를 교묘하게 비틀어 쓴다.
언어는 이른 바 발음을 뜻하는 시니피앙과 의미를 담은 시니피에가 결합한 기호 체계이다. 시각 언어 기호인 문자를 발명해 쓰기 전에 언어는 소리가 그대로 의미였다. 단순한 동물 세계도 그들 수준의 의사소통을 소리로 한다. 즉 동물의 언어인 셈이다. 먼 옛날에는 동물과 인간의 삶이 많이 다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뒤에 인간은 시각언어인 문자를 발명해 쓰기 시작하면서 의미를 담은 시니피에와 그것의 소리인 시니피앙으로 분화하여 별도 기능을 담당하였고, 급속 발전해서 인간 문명을 이루었으리라. 여기서 언어의 실질 핵심은 바로 의미를 맡는 시니피에다. 의미가 없는 소리는 그저 잡음일 뿐이다. 잡음 상태인 소리를 인간 언어로 전환하는 것은 바로 이 소리에 담은 의미다. 세상에 의미가 없는 소리, 혹은 의미를 알 수 없는 소리는 별도로 존재할 수 있다. 하지만 의미가 없는 소리만의 언어(의태어 의성어에도 의미를 붙인다)는 없다. 반드시 의미를 동반하지 않는 소리는 그저 잡음에 그친다. 즉 언어의 실체는 소리지만 껍데기 형태이고 그 핵은 의미란 말이다, 마치 인간의 몸과 정신과 같은 구조다. 소리와 뜻을 분리한다는 것은 원론적으로 언어의 기능적 본질을 깨뜨리는 일이다.
그런데 고경서 작가는 그것을 한다. ‘감성어’의 발음에 따른 의미는 지금껏 ‘물고기“뿐이었다. 이것을 그는 ’감성어感性語‘로 새로 창출했다. 지금껏 우리가 알던 감성어에서 발음만을 떼어 와서, 즉 기존 언어의 시니피에와 시니피앙을 분리하고 시니피앙을 가져와 여기에 새로운 의미를 감나무 접붙이듯 덜컥 붙여 새 말(의미)을 만들었다. 이런 기막힌 언어 창출이라니! 감성어라는 어류의 이름에 감성어라는 문학 언어를 만든 것은 언어의 한 특징인 동음이의어가 있기에 가능했다. 즉 같은 소리에 다른 뜻을 가진 말의 이중성을 이용하여 역으로 새로운 말, 즉 연상 작용으로 새 낱말을 만들어 ’감성어‘의 동음이어同音異語를 만든 셈이다. 말에는 동음이의어同音異義語는 있어도 동의이음어同義異音語는 없다. 같은 뜻의 다른 소리 말이 없다는 것은 언어의 두 자질 중에 의미가 본질적인 핵심 자질이란 말이다. 말소리가 언어 근원으로 바라보는 한글전용론자의 서양 언어관식 표음중심 문자 표기를 강조하는 것은 실상 언어의 본질을 오해하고 있는 것이다. 발음은 같되 의미가 다른 말은 있어도, 뜻은 같으나 소리가 다른 것은 없다. 이것은 의미에 맞게 소리는 바꾸어 쓸 수 있지만, 같은 소리를 다른 의미로 쓸 수 없다는 말이다. 이것은 동양권의 한자문화권에서 같은 의미의 한자를 나라마다 달리 발음하는 것에서 확인한다. 그 중에는 소리가 달라지면서 그에 따라 의미까지 바뀌어 따라가는 경우는 있다. 같은 한자인데 나라마다 의미가 다르게 쓰인 것이 그렇다. 어찌되었든 말은 뜻과 소리가 하나로 합체하는 것인데 고경서 작가는 이것을 분리해 사용하고 있다. 이 발음을 그대로 빌어 와서 감성어感性語로 전환시켰다. 당연히 사전에 없는 말이다. 물고기 감성어의 ‘감성’은 ‘감성돔’이라서 한자가 아니다. 하지만 ‘어’는 물고기 어魚이야 옳다. 독자는 들어보지 못한 말을 보고 더구나 고기를 낚시한다고 했으니 쉽게 ‘감성어’에서 ‘感性語’를 떠올리지 못했을 것이다. 이 돌올한 전환은 언어가 가진 이중성, 발음과 의미의 합체를 따로 분리하여 사용한 것이다.
어느 나라 말이나 적건 많건 동음이의어는 있다. 그것을 강세나 장단음, 고저의 언어 자질을 이용해 발음으로 구별해서 사용한다. 물론 구두 언어는 그렇게 해결하지만 문장은 이런 언어 자질을 이용할 수 없다. 겨우 문맥으로 어느 정도 구별하지만 모두 그렇지는 않다. 이것을 해소하기 위한 것이 구별할 수 있는 문자를 함께 쓰는 것이다. 우리나라 경우에는 한자어가 전체 단어의 70%내외이므로 한자를 일본처럼 혼용하거나, 아니면 병기하여 사용하면 이 혼란을 막을 수 있다. 일부 인사는 영어 혼용과 병기는 인정하고 사용하면서 한자 혼용과 병기에는 극도의 알레르기 반응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이 <감성어 낚시>의 언어적 창출은 바로 한자가 있기에 가능했다. 아니라면 상당한 혼란이 있거나 이런 시도는 아예 꿈꿀 수도 없는 일이다. 한자어가 없는 고유어만을 쓰는 경우는 문맥만으로 해결하기에 일정 부분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며, 그것은 문학에서 표현의 부족을 불러오고, 결국 우리 한국어의 협소한 표현만으로는 문장, 혹은 문학의 쇠퇴를 야기할 가능성이 필연이다.
이런 일종의 언어적 자질을 응용한 말놀이는 펀pun이라는 것으로 시에서는 가끔 쓰이는 기법의 하나다. 엄정한 의미 전달을 주요 지향으로 삼는 수필 산문에선 잘 쓰지 않는다. 의미 혼란을 불러올 수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의도적으로 모호한 애매성을 즐기는 양가적 의미의 모호성(ambiguity)은 형식주의 시인들이 즐겨 사용한 시 창작 기법이다. 이것도 저것도 아니나 둘의 대비를 통해 새로운 의미와 분위기, 정조를 만들어내기도 한다. 난해시의 길로 안내하던 한 창문이기도 하다. 이런 모호성을 고경서 수필가는 이 글에서 시도한 것이다. 그리고 나름 성공한다. 이 글의 문학적 예술성은 바로 이 지점에 있다. 본래 목적과 다른 것, 그것을 뒤집어 색다르게 다르게 쓰는 것, 이 말을 누군가는 ‘낯설게 하기’라 했고, 또는 ‘전경화’라 말하기도 한다. 기존의 익숙한 것을 비틀고 뒤집어서 그간에 쌓인 때와 인식을 벗겨 새롭게 옷을 입히려는 시도, 상투성과의 대결 또는 그러한 결과물이 예술이 추구하는 한 방향이다. 그것은 상식적으로 말하자면 새로운 것을 창조하는 셈이다. 화장실 용품인 변기를 전시해서 설치미술로 치환한 미술가도 있다. 화장실의 변기와 전시장의 변기는 서로 짝을 이룬다. 대응하는 두 상대는 자연 또는 일상과 인공 또는 예술의 짝이다. 강가의 돌은 자연이지만, 그것을 집안 장식장 나무 좌대에 올려놓으면 수석 예술품으로 둔갑한다. 눈으로 보는 풍경은 자연이나, 사진 찍어 사각형 프레임에 가두면 예술이다. 둘은 짝지어 대응한다. <감성어 낚시>에서 이런 대응 짝을 들어보자. 물고기 감성어 대 언어 감성어, 낚시 대 창작, 바다 대 대뇌, 미끼 대 상상력, 이것을 대입하면 단어에 있던 사전적 의미를 새롭게 해석하고 비유하여 새 의미를 덧씌우는 행위, 이게 바로 예술적 시도다.
6. 문학에서 예술성이란?
여기서 한 걸음 더 나가보자. 문학에서 예술성을 어떻게 확보하는가. 문학의 질료는 언어다. 그림의 색과 음악의 소리에 견준다. 흔히 문학을 예술의 하위 종으로 보아 언어 예술이라 말한다. 잘못된 정의요, 단순한 대입이다. 문학이 언어 예술이란 것을 풀이하면서 앞에서처럼 언어를 색과 소리처럼 쓰는 표현 수단인 질료 면에서만 비교한다. 이것은 틀렸다. 문학은 예술이 아니라, 일부 예술성을 그 속성으로만 가진다. 다만 작품에 따라서 예술성 포함 분량에서 차이가 날 뿐이다. 소설과 수필보다 시가 대체적으로 예술성 지분이 많다. 이것은 남성이 여성적 속성을 일부 가진다 해서 그녀를 남자로 부르거나 대우하지 않는 것과 같다. 남녀 공통으로 이성적異性的 성향을 서로 부분적으로 갖는다. 사람에 따라서 그것의 정도에서 차이를 보일 뿐이다.
문학에서 예술성이 차지하는 기능도 이와 같다. 언어와 달리 색과 소리는 고정된 의미가 없다. 그것을 감각하는 사람에 따라서 천차만별로 수용한다. 그러나 언어는 사전에 의미가 고정되어 있다. 새롭게 창의적으로 단어를 맘대로 의미화 하여 쓸 수 없다. 소리나 색과 근본적으로 다른 질료의 성질을 고려하지 않고, 표현 수단으로서만 언어를 보고 문학이 예술이라 섣불리 정의한다. 그림과 음악은 어떤 고정된 의미를 담으려하지도 않거나 담을 수도 없다. 화가와 음악가는 물론 개별 의미를 담으려 하고 담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에는 언어의 사전辭典 단어처럼 단일하거나 확정이지 않다. 향수자가 작품을 대하는 제 나름으로 찾을 뿐이다. 문학은 어떠한가. 맘대로 사전의 단어 뜻과 달리, 특히 수필에서 일상 언어 의미와 다르게 읽을 수 있는가. 문맥에 따른 의미 변주는 가능하지만, 근본적 단어 의미에서 자유롭게 뜻을 독자 맘대로 해석 창출할 수 없다. 그림과 음악은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려는 게 아니다. 근본적으로 그것은 아름다움을 만들려고 한다.
아름다움이란 또 무엇인가. 그것은 그것을 대하는 사람에게 심적 쾌감을 맛보게 하는 어떤 것이다. 쾌감을 줄 수 있게 하는 인공적 산물이 바로 예술품이다. 이것은 의미의 표현 없이도 전달 가능한 감성적인 것이다. 해서 예술은 설명이 안 되거나 설명할 필요가 없다. 예술가는 나름 즐거운 유희로 창작한다. 철학자 칸트는 예술의 기원이 인간의 유희 본능으로부터 연유한다 했다. 스페인 바르셀로나에서 가우디의 걸작 ‘꾸엘 공원’에 가보면 진정 ‘예술은 작가의 유희’라는 걸 실감한다. 그것을 보고 나서 비로소 건축물도 예술일 수 있구나 하는 걸 필자는 깨우쳤다. 어린 아이들이 펼치는 흙장난 모래 놀이, 낙서 행위가 원천적 유희 본능에서 비롯하여 예술 활동으로 이어진다. 이 유희적 본능에 의해 만들어놓은 예술품을 감상자는 그냥 감각으로 대하면서 심적 쾌감을 맛보면 된다. 그것은 당연히 예술품 창조자와 향수자의 개별적 만남이다. 일대 일로 예술품과 인간 사이 감각 접촉이다.
그림 중에서 작품 제목 없이 번호만 있는 경우와 음악도 곡명 없이 작품 번호만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음악곡이건 그림 작품이건 그것에 단어로 제목을 다는 순간, 단어 의미에 일정 부분 갇히거나 그에 영향을 받는다. 이것을 거부하는 것은, 또는 기피하는 것은 예술 본질에 맞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부터 그 예술품에 이름을 붙인다는 것, 의미를 단다는 것은 예술 본연의 무의미성, 혹은 의미 개방성에 부합하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예술에서도 공통적인 감각과 보편적으로 일치하는 것이 있다. 자연의 멋진 장면을 그림틀에 담아서, 재현한 것을 보고서 아름답게 느낀다. 즉 심적 쾌감을 맛본다. 음악이 의식곡이 되거나 그림이 포스터처럼 어떤 것을 표현하여 전달하려는 의도를 가질 때 그것은 예술의 범주에서 일단 벗어난다. 즉 예술적 표현 수단을 빌려서 포스터에 담은 ‘불조심’의 의미를 표현한다. 예식이나 장례에 쓰이는 악곡 역시 마찬가지다. 국민의례에서 부르는 ‘애국가’를 예술가곡으로 볼 수는 없다. 전도를 목적으로 하는 종교음악 역시 예술이 아니다. 예술로 애국심을 고취하기 위해서, 의미를 담은 언어, 곧 가사에 선율을 입혀 표현 수단으로 사용한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에 대입하면 원초적으로 의미를 가진 언어는 기본적으로 포스터와 행사 의식곡처럼 의도적인 의미를 표현하고 전달하고자 한다. 이 관점에서 가사가 붙은 가곡은 순수 예술, 순 음악이 아닌 것이다. 동일하게 사회주의 국가의 이념을 전파하기 위한 선전화나 특정 이념을 표현하는 소위 민중 미술은 예술이 아니다. 예술의 본질은 특정한 의미를 담으려는 순간 그 의미에 포획되어 예술의 자율성, 개방성, 유희성이 증발하거나 축소된다. 단지 수단으로 그 의미 표현과 전달에 복종하여 순수성은 휘발한다.
왜 문학 작가와 예술가들이 표현의 자유를 그토록 신앙처럼 매달리는가. 표현의 자유를 억압하거나 제한하려는 쪽은 예술을 의미의 집합 전달체로 유용한 수단적 기능으로 이용하려하기 때문이다. 소위 예술 본질을 망각한 일부 위장 예술가들이 자신의 순수한 유희적 예술 활동에 이념의 색깔과 의미 덩어리를 밀수품처럼 들여보냈기에 그렇다. 정치적 수단으로 예술 활동을 오염시키는 위장 예술가들은 꾸엘 공원에 가서 가우디의 즐거운 놀이 결과물을 직관하고 대오각성할 필요가 있다. 이에 비해서 문학은 언어를 단지 예술적으로만 사용하려고 할 뿐이다. 때문에 문학은 예술이라는 미적 쾌감 창출 행위에 좁게 가둘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 의미의 효과적인 표현과 전달을 위해서 언어를 ‘예술적(기술적)’으로 사용하는 것이다.
언어의 예술적 사용이 두드러진 대표 주자는 잘 알다시피 시다. 시에서 대표적으로 쓰는 예술적 언어 사용은 어느 것인가. 한시와 영시에선 소리의 어울림, 곧 압운 또는 각운을 사용한다. 자음은 다르되 모음은 같거나 어울리는 유사한 음을 배치하여 청각적 쾌감을 얻으려 한다. 한국어는 안타깝게 그렇지 못하다. 앞의 ‘김미옥’의 글에서 언급한 것처럼, 시행의 종결부에는 ‘다, 다, 다’를 벗어나기 어렵다. 이게 각운을 형성하려면 ‘가, 나, 다, 라’식으로 자음은 다르고 모음은 같이 어울려야 한다. 하지만 이렇게 어울리는 단어를 찾으면 말이 되지 않는다. 즉 의미가 통하지 않는다. 의미가 통하면서 운을 맞추는 것은 한국어로는 불가능하다. 이것에 진즉 절망한 시인으로 이상과 김춘수, 일부 시도한 시인으로 김영랑이 있었다. 언어에서 색과 소리처럼 의미를 무시하거나 소거하려고 해서, 이상은 기호와 부호를 가져와 시어로 쓰기도 했고, 김춘수 시인은 아예 그의 시에서는 의미가 없다는 ‘무의미 시론’을 공표하고 시작詩作 활동을 했다. 그러나 그런 의도는 이해하지만 당초에 불가능한 시도요 실험이었다. 이런 예술의 본질이 무의미에 잇닿은 것을 인식한 시인으로 김영랑이 있다. 원래 그의 시집(1935년 시문학사 판, 1949년 중앙문화협회 판)에는 제목을 달지 않고 대신 번호로만 구별해 놓았다. 시에 제목을 달아서 의미 제한을 두지 않는 예술품이 되게 하려는 순수문학파, 혹은 예술지상파(문학사에서 부르는 명칭)로서의 자각적 시도였다. 그러나 그리되면 그것을 가리키는 기호가 없으니 곤란하다. 해서 그 뒤에 출판한 책에서는 시의 첫줄이나 시어를 골라 가제假題로 달아서 유통시킨 것이 진짜 제목으로 알려져 행세한다. 이 시인들에게 공통적 인식은 참 예술에는 진정한 의미가 없다, 또는 언어에서 예술 본질에 부합하도록 한정된 의미를 떼어내 보자는 인식의 결과들이다. 잘 알다시피 그들의 예술 지향 의도는 이해하지만 성공할 수 없다. 언어를 쓰면 어찌되었든 누구도 고유한 의미망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말에서 의미를 빼면 소리만 남는다. 글자에서 의미를 빼면 형태만 남는다. 문자 의미와 상관없는 문자를 형태만의 시각성을 살린 디자인에서, 또는 의미는 무시한 채 타국 문자를 도안에 사용하는 경우가 바로 그것이다. 한글의 자모 부호는 의미가 없다. 이것을 도안에서 사용하여 여러 시각디자인에 쓰기도 한다. 표음문자라서 가능하다. 한자는 표의문자라 그럴 수 없다. 그래도 도안에 쓴다면 문자 의미와 무관한 형태만을 시각적으로 수단화 한 것일 뿐이다.
문학에서는 고경서 작가처럼 언어의 예술적 기교를 좀 더 적극적으로 사용하기도 한다. 그것은 수사법의 비유법적 인식에 따른 두 대상의 대응 짝짓기로 작품을 구성하는 것이다. 물고기 ‘감성어’와 언어 ‘감성어’의 비유법적 대응 짝짓기가 그것인데, 배면에는 언어의 예술적 사용인 비유법적 인식이 자리한다. 비유법에서 직유든 은유든 두 대상의 유사성에 주목한다. 서로 다른 차별적 존재에서 유사성을 발견하여 연결하는 것이 비유법의 기본 인식 패러다임이다. 한국어를 예술적으로 사용하는데, 소리의 대응 짝을 이용하는 운韻이 불가한 것을 앞에서 확인한 바, 의미의 인위적 대응 연결 쌍을 이용한다. 이것은 대응하는 구상물 대 추상 개념을 짝짓는 것으로 고급 비유법의 하나다. 예컨대, 키가 큰 사람을 ‘전봇대’, 미련해 보이는 사람을 ‘곰’이라고 비유하는 것은 일상에서 일반적으로 쓰는 언어의 비유적 사용이다. 시에서 바위를 의지로 짝 짓거나, 깃발을 애수로 대응시키는 따위다. 알게 모르게 우리는 언어를 일상에서도 예술적으로, 달리 말해 인위적이거나 기술적으로 사용한다. 다만 그것은 비의도적이거나 우연에 의한 것인 경우가 많지만 문학에선 의도적으로 그것을 사용하는 점에서 더욱 예술적이다.
신문 기사나 사설 또는 칼럼은 사실 정보와 주장하려는 의미 전달이 주목적이지만, 거기에도 표현의 전달 효과를 위해서 비유를 쓴다. 하지만 그것이 문학처럼 의도적이거나 주요한 내용이 아니어서 예술성을 갖춘 문학으로 다루지 않을 뿐이다. 신문 칼럼 글에서도 문학 수필보다 뛰어난 언어의 예술적 사용을 만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사설과 칼럼보다 못한 수필의 예술적 언어 사용을 만나는 것도 역시 흔하다. 문학에서 언어의 예술적 사용은 하나의 속성이지, 또는 지향할 가치이지 절대적인 필수 요소는 아니다. 예술성을 지닌 문학이 그렇지 못한 문학보다 바람직한 것은 인정하지만 반드시 문학에서 예술성이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란 말이다. 물론 지금 어떤 독자가 이런 글을 읽으며 예술적 쾌감을 느낄 수는 있다. 어디까지나 예술성 수용 감각은 극히 개인적이란 얘기다.
서로 구별이 되지만 함께 잘 어울리게 만드는 것, 미술에선 이것을 보색 관계, 음악에선 화음이 그렇다. 서로 다른데, 함께 어울려 새로운 것을 만든다. 이렇게 예전 의미(감각)와 새롭게 만든 의미(감각) 사이의 대응 짝짓기 긴장을 즐기고, 이 긴장이 창출하는 맛을 즐기려고 하는 것, 그것을 제시하는 것이 바로 예술적 행위다. 작가가 물고기 ‘감성어’를 감성적 ‘감성어’로 바꾸어 의미를 만든 것이 바로 그렇다. 이것 하나로도 작가가 새로운 단어를 만들어서 할 것을 다한 셈이다. 그러나 이것을 물고기 낚듯이 낚시로 일상 현실감을 주기 위해서 낚시와 대비하여 상호 조응시키고 대조하면서 우리를 낯선 의미에서 익숙한 세상, 즉 낚시의 현실 세계로 부른다. 이 글은 수필을 쓰려는 작가가 고심하는 것, 어떤 수필을 쓸지 고뇌하면서 지향하려는 바를 밝히는 메타 수필, 수필에 대해 쓴 수필이다. 그녀는 한마디로 감성이 풍부한 글을 쓰고 싶다. 그를 위하여 상상력을 동원하고 “인생이라는 대양”에서 대물(대작)을 쓰고자 한다.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넘어서 기다리고 관조하고 성찰하면서 “감성어”를 낚아 올리려 한다. 하지만 쉽게 낚이지 않는다. 낚았는가 했더니, 대물을 놓친 낭패감에 젖는다. 그는 스스로 자평하기를 “초보 낚시꾼”으로 여전히 “빈 가두리 양식장”인 “원고지 칸칸”에 매여 있다고 쓴다. 이러한 개념은 매우 추상적이다. 이것을 감성을 동원한 비유를 써가며 구상으로 넘고자 한다. 작가가 초보 낚시꾼을 벗어나 아무쪼록 감성어 대물을 낚기 바란다. 그건 수필계를 위해서도 퍽 환영할 만한 일이다.
7. 효용성 요건
다섯째 문학성 판단 기준은 글의 효용성 또는 사회적 의미다. 앞에서 다룬 것은 작가와 작품 관점에서 세운 기준이라면 이는 독자를 배려하는 관점에서 바라본 항목이다. 문학의 사회적 책무라 물어도 되는, 왜 작가가 글을 쓰고 어떤 쓸모가 있는지를 따지는 일이다. 작가가 집필하는 것은 표현 욕구의 본능 충족과 치유의 기능을 갖게 하지만, 독자에게는 글이 무슨 효용이 있는지를 묻는 일이다. 독자에게 읽을 만한 가치를 따져보는 일이다. 작가는 독자를 의식해야 하나 이것이 지나치면 때로는 통속성이나 대중성에 빠질 수는 있다.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독립적 생명체와 같아서 독자가 어떻게 활용하고 수용하며 공감하는 지는 그야말로 정답이 없다. 독자를 지나치게 의식하는 것도 문제나, 독자를 전혀 의식하지 않는 것 또한 문제가 많다. 글을 써서 발표하는 것은 누군가 독자를 향한 말 걸기에 해당한다. 말을 걸면서 청자, 글에선 독자를 적정한 수준에서 의식하고 배려하는 것이 필요하다. 통상적 대화라고 생각하면 이해 가능한 일이다. 우리가 대화할 때 상대 눈을 맞추거나 반응을 살피며, 말하는 내용이나 필요한 말투와 태도를 조정하는 것, 소위 초인지를 작동시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문학은 원론적으로 독자에게 오락적 흥미나 지적 쓸모를 제공해야 한다. 즉, 글이 재미있거나 무언가 남는 것, 인생을 사는데 도움이 될 영양가 덩어리를 내놓아야 한다. 그것도 둘이 이상적으로 합체하여, 맛있으면서도 영양가가 풍부한 음식처럼. 양자의 조화는 쉽지 않지만 그것을 추구하고 지향하고 시도해야 한다. 그것의 세부적인 것은 작가나 독자나 각자 기준은 서로 다르나 원론에선 그렇다.
먼저 노현희의 <문외한이지만>을 보자. 문외한은 “어떤 분야에 대한 전문적 지식이나 조예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는 누구나 문외한의 범주에 속한다. 문외한을 벗어나는 경우도 어느 한쪽이지 그것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은 문외한이다. 그렇지만 반드시 전문가가 있고, 그들이 맡아야 할 일이 있다. 국가를 경영하거나 기업을 운영하는 일은 아마도 전문가가 나서야 할 일이다. 그런데 우리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고 작가는 사회 세태를 전하며 간접 진단한다. “뉴스에는 공공기관에 낙하산 인사를 전하는 기사가 떴다. 지난 정권들보다 많은 숫자라 했다.” 또 “지도자와 이념이 같은 정당인들이 싹쓸이하듯 단체장과 기초의원 자리를 꿰찼다. 그들을 지지한 사람들은 세상이 달라질 거라며 응원을 보냈다.” 그녀가 바라보는 지금 세상은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시대”이다. 이런 서술은 작가가 뉴스를 보고서 취사선택한 내용이다. 여기에 작가의 생각이 드러난다. 이런 결과는 바로 ‘문외한’이 관여한 때문이라는 것을 말하려 한다. 말은 어떤 분야의 문외한이라 하면서도 자리는 차지하고 있어서 비롯한 결과라고 본다. 그러면서 이러한 세상의 비뚤어진 행태를, 미술관에서 비유적으로 제시하여 건너가는 지혜를 제시한다. 이를테면 문외한으로 살아가는 나름의 비법을 터득하여 글로 풀어낸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정말 짜증이 나. 크크크.”에서 느끼는 쾌감이다. “문외한으로서의 동질감”이다. 문외한으로서 사회의 일그러진 세태를 들어내어 간접으로 비판하면서, 한 편으로는 문외한이면서도 그들의 처지인 “경쟁 사회의 생존 본능”으로 보는 한 편엔 “생존 본능이 아닌 신의 영역을 탐하는 인간의 욕망인”것으로도 판단한다. 인간 세상에서 다양하게 벌어지는 모든 문외한의 형태는 결국 인간 욕망에서 비롯한다는 어쩌면 인생 문제의 비의秘義를 발견한 것이라 하겠다. 어느 한 분야의 전문가도 되지 못한 많은 독자에게 숨통을 틔워주고 그나마 문외한으로 살아갈 수 있는 깨달음 한 도막을 전한다. “문외한이라서 조심스럽게, 좀 더 신중히, 조금의 여유를 갖고 세상에 발걸음을 내딛다 보면, 문외한이지만 그나마 살아가게”될 테니까 말이다.
정해경 <두 번째 생은 온전히 꽃으로>가 다음으로 눈길 끈다. 아파트 베란다에 던져 둔 상자에서 우연히 싹튼 고구마를 보고 수반에 옮겨 뿌리가 내린 뒤에 화분으로 옮겨 심었고, 그게 시간이 지나 새로운 고구마를 얻게 너무 놀란 나머지 그 감동을 한 편 글에 담았다. 헤아려보면 이런 일은 아주 흔치 않지만 간혹 일어나는 일이다. 글감으로 보면 약간의 신기한 면은 있으나 이걸 글로 엮으며 주제를 무엇으로 잡아낼까 여러모로 생각할 수 있다. 놀라운 생명력의 확인, 끈질긴 식물의 성장 따위가 일반적으로 생각해볼 수 있는 주제 유형이다. 이걸 작가는 환생으로 주제를 설정했다. 이런 소재는 식물 생태를 놀라운 눈으로 지켜본 것을 담담하게 그려내서, 작가가 이런 신기한 일을 겪었다는 이야기를 전달하는 것이 수필에서 볼 수 있는 일반적 사례다. 그런데 작가는 이걸 환생으로 새롭게 그려내면서 “당신 덕에 두 번째 생은 온전히 꽃으로 살았습니다.”라는 고구마의 독백을 상상한다. 밭이 아니라 화분에 담겨서 고구마를 결실하였으니 그렇게 볼 만하다. 인간의 생명 욕망은 장수와 환생으로 대표한다. 식물을 빌어서 인생의 환생을 간접 제시한다. 재미나다. 고구마를 의인화해서 작중 화자로 설정한 것도 재미있지만 그 고구마가 작가에게 감사함을 표시하는 독백까지 만들어낸 것은 더욱 재미나다. 이것은 결국 화자가 자신에게 던지는 위로요 보상이다. 엎드려 절 받기의 일종이다. 작가는 고구마에게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 왜냐하면 그대로 시들어 죽어갈 고구마를 살려서 새로운 고구마를 생산해내도록 자신이 공을 들인 것을 자랑하고 싶은 속마음을 드러낸 것이기에 아주 재미지다. 화초를 기르는 사람과 농사를 짓는 사람 대부분은 그 식물로부터 키워주어서 고맙다는 인사말 들을 생각을 안 한다. 그런데 작가는 아파트에서 고구마 한 뿌리를 살려서 고구마를 얻은 자신의 노력과 정성에 대해서 고구마로부터 감사하다는 말을 듣고 싶다. 그런 자신의 공에 대하여 치사를 듣고 싶어 하는 마음이 얼마나 재미있는 발상인가. 또 얼마나 웃음 짓게 하는가. 마치 어린아이가 별 것 아닌 일을 해놓고서 제 깐에는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주위 어른에게 칭찬을 받고 싶어 하는 상황과 그 기저 심리에서 얼마나 유사한가. 바로 이점을 재미나게 읽게 한다.
8. 문학성 판정
문학, 특히 수필이 갖춰야할 제반 요건을 얼마나 지녔나 판별하기 위해 문학성의 요소를 정량적으로 세고 그 정도를 질적으로 따지는 것은 실상 무척 지난하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런 시도마저 포기할 수는 없고 가능한 접근하기 위한 노력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다만 그 시도와 노력의 결과에 대한 적절성 판단은 수필을 사랑하는 독자의 몫으로 남겨두어야 옳다. 한 발짝 더 나가자면 시대성과 사상성을 품고 예술성이 조화를 이룰 때 문학성이 더 높지만 이 판단은 상당히 추상적이고 주관에 치우치기 쉬워 객관성을 얻기 어려운 항목이다. 수필 작품은 여타 문학이 그렇듯 창작 주체인 작가가 주제를 설정하여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한다. 이것은 작가가 사회에서 시대를 호흡하며 체험한 것, 작가가 살아왔고 살고 있는 시대와 몸소 교섭하며 시류와 사회상이 일정 부분 반영된 체험에서 비롯한다. 이 주제를 담아내기 위해서 문장으로 쓰고 문단을 연결하여 구성하고 한 편 글로 엮어내어 유통(독해)할 수 있는 작품으로 만든다. 이를 소비자인 독자에게 전달하여 유용한 오락과 가치를 제공하려 한다. 이런 과정으로 탄생한 수필마다 각 부분별로 또는 전체를 통합해 볼 때 제반 요건을 얼마나 품고 있는지를 문학성 판별의 기준으로 삼아 본 것이다. 결국 수필의 문학성은 이상 내세운 몇 개 요건의 충족성 여부를 판정해본 결과라 할 수 있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