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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장순
딜레탕티즘을 극복하는 작가의식
-최장순 수필론
여세주
1.작가로서의 자세
한국 수필문학의 역사가 100년에 이르렀다. 그러나 수필은 아직도 문학의 변방에서 주눅이 든 채 웅크리고 있다. 아무나 얼렁뚱땅 쉽게 쓸 수 있는 글로써 어설프고 엉성한 수준 미달의 문학이라는 폄하를 떨쳐내지 못한 탓이다. 수필에 대한 편견이며 오해라고 억울해 할 수만은 없다. 수필이 걸어온 어제와 오늘의 실상이 그런 평가의 빌미를 제공해 왔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1920년대나 1930년대의 수필이 시인이나 소설가나 학자 등에 의한 여기餘技의 문학 또는 여가餘暇의 문학으로 출발한 것도 사실이다. 근대수필은 대부분 신문사나 잡지사의 요구에 따라 생활 주변에서 일어난 소소한 경험을 붓 가는 대로 써서 발표한 산문들이 대부분이었다. 특별히 수련을 쌓아 일정 자질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만 먹으면 누구나 수필을 쓸 수 있다고 여겼다. 이렇게 출발한 수필은 그동안 많은 진화를 거듭했으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수필 쓰기를 딜레탕티즘 정도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다. 문학에 대한 지식이나 열정 없이 취미 삼아 덤벼든 이들이 수필가라고 자처하며 수준 미달의 글을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포장해 내는 경우가 허다하다. 수필 문단 내부의 실태가 이러하니, 수필 문단 밖에서 바라보는 시선이 호의적일 수 없다. 그러고 보면, 아이러니하게도 수필의 스펙트럼이 매우 넓다는 생각이 든다. 심미적 열정으로 문학성을 갖춘 문학적 수필을 비롯하여 관념 중심의 철학적 수필, 자신의 경험을 단순히 기록하는 수준에 머문 자전적 수필, 병약한 정신을 치유하려는 목적으로 쓰는 치유적 수필에 이르기까지 모두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포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저급한 글쓰기에서 벗어나 고급한 수필을 쓰기 위해서는, 수필 장르에 대한 전문성은 차치하더라도 투철한 작가적 태도부터 갖추어야 한다.
내 평생 일자리는 다름 아닌 ‘수필가’라는 자리이다. …(중략)… 등단 후 내겐 새로운 버릇이 생겼다. 바깥출입이 없는 날은, 예전에 출근할 때처럼 단정한 모습으로 내 일터인 서재에 8시에 들어가 점심시간을 제외하고는 오후 5시에 서재를 나오는 일정한 생활패턴을 유지하고 있다.
-<나도 518>에서
작가 최장순의 수필 쓰기를 위한 노력과 열정을 다짐한 말이다. 이는 작가로서 마땅히 갖추어야 할 기본자세이다. 수필을 그저 심심풀이로 써보겠다는 태도를 가지고는 고급스러운 작품을 기대할 수 없다. 열정적인 창작 태도는 작가의식의 기본에 해당한다.
최장순은 총 3권의 수필집을 출간한 중견작가이다. 《이별연습》(2009)・《유리새》(2013)・《유쾌한 사물들》(2018)이 그것이다. 《이별연습》과 《유리새》에 묶인 수필들이 흔히 접할 수 있는 자아 중심 또는 사람 중심의 수필이라면, 《유쾌한 사물들》에 엮어놓은 수필들은 대상 중심 또는 사물 중심의 수필이다. 이 두 부류의 수필은 매우 다른 세계관을 바탕으로 삼고 있다. 사람 중심의 수필에서는 자아의 주체의식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으며, 사물 중심의 수필에서는 주체로서의 자아를 해체해 버린다. 한 작가의 작품세계가 이처럼 색다른 인식 체계로 이루어져 있는 경우는 드물다. 최장순의 수필세계가 뚜렷하게 보여주는 이러한 특징만으로도 그의 작가의식은 예사롭지 않다.
2.성찰, 동화, 비판하는 주체적 자아
한 작가의 작품세계를 이해하기 위해서, 작품 속에 나타나 있는 작가의식을 살펴보는 것은 매우 유용하다. 어떤 대상에 대하여 어떠한 의식, 즉 어떤 감정이나 견해를 가지고 자각하고 판단하는가에 주목해 보는 것은 작가의 의식 성향과 함께 작품의 성격을 규명하는 문학 연구 방법의 하나이다.
《이별연습》・《유리새》의 수필들에서는 일상의 경험들을 다루고 있다. 일상생활은 의식의 차원에서 이루어진다. 의식이란 자기 자신이나 사물을 지각하고 판단하는 깨어있는 정신으로, 결국 대상을 바라보는 감정이나 견해이다. 수필가는 작품 속에 의식을 가진 주체적 자아로 등장하려 애쓴다. 이는 결국 주체로서의 자아정체성을 확립해 가는 과정이기도 하다. ‘진정한 나’를 찾는 것은 영원히 유토피아적인 꿈일 뿐이라 하더라도, 수필가는 의식 활동을 통해 진정한 주체적 자아를 확립하려는 의도를 포기하지 않는다. 최장순의 수필세계에서 주체적 자아는 크게 세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자기 자신과 대면할 때의 자아, 어머니를 상기하거나 자연을 마주할 때의 자아, 사회 현실을 대상화할 때의 자아의 의식이 각기 다르다.
첫째로, 자기 자신과의 대면에서는 작가의 의식이 성찰을 지향한다. 성찰은 주체적 자아와 대상화된 자아의 거리에서 생겨난다. 하나의 자아와 또 다른 자아 사이에서 의식의 괴리를 지각하는 데서 성찰은 시작된다. 자신의 의식적 지향성마저 성찰의 대상이 되므로, 성찰적 자아는 의식적 자아로서 항상 초월적이다. 따라서 자아 성찰적 수필은 기존의 지각과 판단에 대한 새로운 지각과 판단이 이루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구조를 취한다. 달리 말하자면, 의식의 전환으로 자아정체성이 재확립되는 구조를 지닌다.
<탈군인화 일일학습>은 삶의 방식이나 행동 양식에서 성찰이 이루어지는 작품이다. 30여 년에 이르는 오랜 군인 생활에서 형성된 자아를 새로운 사회 현실에 던져진 자아가 성찰하는 형식이다. <초가을의 남자>에서는 명예와 절도와 권위가 체질화된 가부장적인 의식, 그리고 속도와 능률을 훌륭한 미덕으로 간주하며 오직 성공을 위해 애써 온 삶을 성찰한다. <나도 518>에서는 새로운 삶의 양식에 대한 미래적 성찰이 이루어진다. ‘오십대에 일자리가 있는 사람은 팔자가 좋은 사람’이라는 의미의 ‘518’, 직업군인으로서의 삶을 지병 때문에 부득이 청산하고 ‘수필가’라는 ‘평생의 일자리’를 찾겠다는 의지를 담아내고 있다. 그런데 이 작품들은 외적 환경의 변화에 따른 의식의 전환을 말해 줄 뿐이다.
진정한 내면적 성찰은 <위층 여자>, <아내의 힘>, <벌거벗은 남자>, <여자라는 문> 등에서 이루어진다. <위층 여자>는 서사적 형상을 통해 긴장감을 조성하는 작품으로 발견과 반전의 구성을 취하고 있다. 시도 때도 없이 노래를 불러 대는 위층 여자에 대해 혐오하던 자아가 위층 여자의 이상행동이 치매 때문이라는 사실을 알고 오히려 연민을 느끼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자아의 성찰을 매우 흥미로운 구조로 형상화했다. <아내의 힘>에서는 오랜 기간 체질화되어 있던 가부장적 권위의식의 허구, <벌거벗은 남자>에서는 남성들의 시대착오적 성모랄, <여자의 문>에서는 여성처럼 포용력을 갖추지 못한 남성 우월주의의 허상을 깨닫는 과정에서 성찰적 의식 작용이 일어난다.
둘째로, 어머니에 대한 기억을 상기할 때나 자연현상과 마주할 때에는 자아와 대상의 동일화가 이루어진다. 어머니에 관한 서사는 꾀 여러 편이다. <어머니는 죽지 않는다>, <마중길의 호롱불>, <취떡이 먹고 싶다>, <대쪽 같은, 목화솜 같은>, <나의 새끼손가락>, <어머니의 시간>, <어머니의 보따리>, <시느미> 등이 그것이다. 어머니의 생활철학, 고달픈 삶을 이겨낸 어머니의 억척스러움, 어머니의 손맛에 대한 그리움, 자식에 대한 어머니의 애틋한 사랑, 노년의 어머니에 대한 안타까움 등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머니를 지속적으로 기억해내며 감정적 연대를 유지한다. 이와 같은 동일화의 감정은 <산을 오르다>, <가장 아름다운 숲길>, <비 방금 그친 숲>, <봄눈 속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등의 자연현상에서도 나타난다. 자연에서 영혼을 정화시키고 삶의 철학을 배우는가 하면, 자연현상의 아름다움에 동화된다.
셋째, 최장순은 사회 비판적 수필 쓰기에도 상당한 관심을 보이고 있다. 서정수필이 풍미한 수필 문단에 휩쓸리지 않고 비판 의식을 가지고 사회 현실을 진단하는 것도 수필문학이 담당해야 할 중요한 책무이다. 진정한 삶을 가능하게 해 줄 수 있는 공공적 지평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것은 수필의 사회적인 역할이다. 그런 점에서 균형 잡힌 사회 비판 의식을 보여주는 수필작품을 만나는 것 자체가 흥미로운 일이다. <낯선 것과 익숙한 것>에서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때로는 비굴할 줄도 알아야 한다는 속물적 통념에 저항한다. <스포츠와 선거>에서는 정정당당한 대결이 아니라 치졸한 승부에 매달린 후보자와 그들을 비난하는 유권자들의 도덕적 수준을 문제 삼는다. 이상적인 대통령상을 제시한 작품 <대통령과 골프>, <이런 대통령>, <어떤 귀향>은 일종의 정치적 비판과 제안이라 할 만하다. <어떤 반란>에서는 불타버린 숭례문 방화 사건을 언급하면서 사회적 욕구 불만을 방치하는 사회적 모순을 꼬집는다. <우환>은 광우병에 걸린 미국 소고기 수입 반대를 위한 촛불시위를 바라보면서, 우환牛患이 우환憂患을 불러왔다는 언어유희로 소고기 수입을 풍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순수한 촛불시위를 부추기는 언론이나 촛불시위에 대응하는 정치적 무능을 비판하기도 한다.
그런데 사회 현실에 대한 더욱 성숙한 통찰은 대립적 가치들에 대한 지각에서 이루어진다. 그런 점에서 <광인들의 세상>이나 <비엔나의 초콜릿>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광인들의 세상>에서는 보수진영과 진보진영이 건전한 정책 논쟁보다는 감정적 상호 비방에만 빠져 있는 극단주의를 비판한다. <비엔나의 초콜릿>은 한 편의 영화를 토대로 ‘올바른 신앙적 태도’에 대하여 말하면서, 궁극적으로는 인간의 진정한 존재에 대하여 성찰하는 작품이다. 종교적인 율법에 고착된 이성적 절제와 초콜릿으로 상징되는 감성적 욕망, 즉 이성적 가치와 감성적 가치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모순을 포착하고, 인간다운 모습은 어떠해야 하는지에 대한 사유를 펼친다.
수필을 흔히 성찰의 문학이라고 한다. 수필은 윤리적 성찰보다는 인간 존재나 삶에 대한 인식론적 성찰에 이르러야 한다. 그러고 보면, 자연이나 어머니에 대한 의식적 동화나 현실사회에 대한 비판의식을 드러내는 수필도 성찰적 수필에 해당한다. 자아를 지탱하는 삶의 조건인 사회 현실이나 타자에 대해 성찰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에서는 물론이고 세계에는 대립적 가치들이 항존 한다. 서로 대립되는 가치를 발견하고 역동적으로 결합시키려고 고뇌하는 자아가 진정한 성찰적 주체이다.
이상과 공상에서 벗어나 현실에 눈을 뜨게 되는 돈키호테와, 인간이 꿈꾸어야 할 이상세계도 있다고 알게 되는 우직했던 산쵸처럼 상생의 조화점을 찾기는 어려운 일인가? 어느 국가나 사회를 막론하고 이념적 성향은 양분되게 마련이고 원하든 원치 않든 인정할 수밖에 없는 것이 냉엄한 현실이기도 하다. 문제는 어느 쪽이든 막가파식이 통하는 철없는 정신병자적 형태는 없어졌으면 좋겠다.
어쩌면 유일한 왼손잡이나 유일한 오른손잡이가 아니라 왼손을 잘 쓰는 오른손잡이, 오른손을 잘 쓰는 왼손잡이가 이 시대에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
-<광인들의 세상>에서
성찰의 과정에서 고뇌하는 자아를 통해 독자는 진정성을 느낀다. 그것에서 진실한 삶의 모습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주체로서의 자아는 성찰의 능력을 가지고 있다. 진정한 자아를 욕망하고 생성하는 것은 개인의 의식인데, 그 내면을 수필만큼 효과적으로 그려낼 수 있는 장르는 없다. 수필은 투명한 마음을 보여주는 서술기법을 갖추고 있으므로 진정한 삶에 다가갈 특권을 지니고 있는 셈이다.
3.사물의 화용론적 의미 해석
최장순은 세 번째 수필집 《유쾌한 사물들》(bookin, 2018) ‘머리말’에서 “사물을 새롭게 해석하는” 글쓰기를 시도한다고 당당히 선언하고 있다. 사물이란 ‘물질세계에 있는 모든 구체적이며 개별적인 존재를 통틀어 이르는 말’이다. 동물과 식물, 그리고 기타 일정한 형체를 지닌 물질적 대상들을 총칭한다. 사물을 해석해 내는 수필을 ‘사물수필’이라고 할 수 있다. 사물의 본질이나 의미를 해석해 내는 사물수필은 화자의 판단을 중지시킨 채 사물의 객관적 이미지만을 재현하는 사물시事物詩와는 창작 방법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사물을 제재로 삼았다고 해서 모두 사물수필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물수필을 명확히 범주화하는 것이 간단하고 쉬운 문제는 아니다. 사물을 제재로 다루고 있더라도 그 심급이 매우 다르기 때문이다. 사물에 얽힌 삶의 그림자를 이끌어내는 단순 기제機制로서 사물을 끌어들인 경우, 어떤 삶이나 인간에 대한 유비類比로 사물을 활용한 경우, 사물의 본질적 속성이나 사회・문화적 의미를 해석하여 인간 존재의 인식에 이르고자 하는 경우 등 다양한 글쓰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삶을 온전히 배제한 채 사물 자체를 인식의 목적으로 삼고 있는 작품은 존재할 수 없다. 문면에서는 오직 사물만 언급하더라도 그러한 표상을 인간의 삶에 대한 비의比擬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느 경우까지 사물수필이라는 이름표를 달아줄 것인가에 대한 문제는 학문적 논의와 합의를 좀 더 기다려야 할 것이다.
최장순은 “체험의 기록만으로 글이 되지 않는다”라고 한다. 경험 중심의 수필 쓰기에 매몰되어 있는 작가 자신의 글쓰기나 수필 문단의 현실을 비판하고 있다. 이는 자아의 경험, 즉 사람을 대상으로 삼는 수필 쓰기가 아니라 사물을 대상으로 삼는 수필을 쓰겠다는 의지 표현이기도 하다. 사람이 주체가 되지 않고 사물을 주체로 하는 수필 쓰기를 실험하겠다는 것이다. 경험의 기록에 머물고 있는 수필의 안티테제로 사물수필 쓰기를 시도하고 있는 셈이다.
모든 사물은 수필가 최장순에게 유의미한 존재들이다. 인간이 지배하고 소유하는 하찮은 존재가 아니다. 최장순은 “보잘것없는 나의 우월적 지위를 내려놓았을 때, 그들은 자신의 숨겨진 모습을 드러내곤 했다.”(머리말)고 인식하고 있다. 그래서 그의 사물수필에는 인간이든 사물이든 세계를 구성하는 동등한 존재일 뿐이라는 인식이 깔려 있다. 인간은 수많은 사물의 개체처럼 하나의 존재에 불과하다. 이는 작가 최장순이 의식적으로 지각하고 판단하는 인간학이며 세계관이고 우주론이다.
내가 소지한 것들. 생각해 보면 내가 그들에게 소지당한 것이 아닐까. 안경이 나를 쓰고, 스마트폰이 제 가고 싶은 곳으로 나를 데려가고, 가방이 비밀스런 내 속을 수시로 열어본다. 혹 사물에도 감정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나를 소지한 것들>에서
작가가 사물을 사유하고 느끼는 방식이 잘 드러나 있다. 사물은 더 이상 인간의 종속물이 아니다. 그러한 의식이 그의 수필세계에 널리 깔려 있다. 자아가 언제나 주체이고 사물은 항상 객체라는 시각이 초월되어 있다. 자아가 주체가 되기도 하고 사물이 주체가 되기도 한다. 자아가 주체일 때 사물은 대상이 되고, 사물이 주체일 때 자아는 대상이 된다. <공구학 개론>에서도 공구함을 여는 자아가 주체였다가, 일제히 눈을 맞추는 공구들이 주체가 되기도 한다. ‘나’와 ‘우물’을 유비관계에 놓고 있는 <우물>에서도 우물에게 ‘나’가 동원된 것인지, 나에게 ‘우물’이 동원된 것인지 확정할 수 없게 한다.
<Y의 하루>에서는 사물과 인간이 별개의 존재가 아니라 특별한 관계성을 지니고 있다는 생각이 전제되어 있다. Y로 명명된 넥타이 ‘나’와 ‘그’로 명명된 자아 또는 인간의 관계가 유난히 각별한데, 이 둘은 감정적 연대의 관계를 이루는 존재들이다. 하루의 심리적 기상도에 따라 넥타이도 형체를 바꾼다. 골라지고 추켜올려지고 느슨하게 늘여놓고 풀리고 구겨진 채 쓰러지면서, ‘그의 존재를 드러내는 기분’이 된다. 넥타이는 엄숙할 때의 ‘나’인 Y, 경쾌한 기분의 ‘나’인 y로 표시되어 있는데, 이들이 작품의 의미구조에 특별히 기능하지는 않는다. 작품의 첫 단락에서 이 둘의 감정적 연대 관계를 지각시켜 주고 있을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넥타이와 함께하는 샐러리맨의 일상을 매우 정치하게 그려내어 작품의 완성도를 높이고 있다. 샐러리맨이 겪는 하루 일과의 경험을 날줄로 놓고, 근엄한 의지・비굴한 순종・분노나 억압의 해소・자존심의 회복이라는 심리적 기상 변화를 씨줄로 짜내는 형상화가 진정성 있게 다가온다. 샐러리맨이 겪는 하루의 삶을 객관적으로 보여주기 위한 서술방식도 진정성을 드러내는 데에 큰 보탬이 되고 있다. 넥타이의 목소리로 샐러리맨의 하루를 이야기하는 서술방식이 그것이다. 넥타이의 시각에서, 넥타이의 목소리로 샐러리맨의 삶을 바라보고 전달한다. 이러한 서술방식은 감정적 거리를 두고 샐러리맨으로 대표되는 소시민의 일상적 삶을 보다 객관적인 위치에서 바라보게 함으로써 진정한 인식에 이르도록 한다.
사물과 사물 사이에서도 주체와 객체가 따로 없다. 몇몇 작품에서 각기 독자적인 존재 가치를 지니면서도 의존적 관계에 놓여 있는 사물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문학평론가 오민석이 이 수필집 ‘해설’에서 적시했듯이, 최장순은 차이와 의존에 주목한다. 톱과 줄, 망치와 드라이버, 끌과 대패, 네모와 동그라미, 구석과 모퉁이, 어금니와 송곳니 같은 것들을 통해, 배타적이고 상충적인 관계가 아니라 상호보족적인 관계의 사회학을 말하고 있다.
하지만 생각하기 나름, 송곳니와 어금니의 협업은 부부처럼, 동지처럼 불가분의 관계를 갖는다. 아래턱이 옆으로 움직일 때 송곳니는 턱이 움직이는 방향을 유도하면서 어금니가 닳지 않도록 한다. 송곳니가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면 어금니가 빨리 상실되고, 어금니가 상실되면 다른 이들도 쉽게 흔들린다. 또한 송곳니가 없으면 얼굴 골격이 변형된다. 잘게 찢어주는 수고가 있어 어금니는 씹고 갈고 으깰 수 있다.
-<어금니와 송곳니>에서
최장순의 사물수필들은 사물의 본질적 원형이나 속성을 찾아내기보다는 사물에 내재되어 있는 사회‧문화적 의미를 해석해 낸 작품들이다. 그 의미들을 추상적인 언어로만 설명하지 않고, 경험적 사실들을 끌어들여 의미화에 설득력을 부여한다. 사물과 인간, 사물과 사물은 관계 속에서 존재하므로, 그들이 지닌 의미는 사회‧문화적 연대 관계 속에서 생성된다. 사회적‧문화적 맥락에 따라 사물이 드러내는 존재 의미는 매우 다양하다. 사물들은 작가에 의해 호명되는 순간, 다면적 의미와 존재 가치를 부여받는다. 사물의 의미를 이토록 깊고 세밀하고 집요하게 파고든 작가는 흔치 않다. 작가의 풍부한 지식, 치밀한 통찰, 기민한 상상력은 사물의 다양한 해석을 가능케 하는 동력으로 작용한다.
<모자에 대한 담론>에서 ‘모자’는 머릿수건이면서 세수수건으로도 사용되었던 쓰개이고, 모양의 차이에 따라 신분이다. 그리고 일제강점기 순사들에 대한 두려움이었으며, 특정 단체를 표시하는 획일화된 군중심리이다. 또한 헤어스타일을 감추기 위한 위장이거나 예의나 패션이기도 하다. 이처럼 모자는 다양한 사회‧문화적 의미들을 함유하고 있는 존재로 새롭게 창조된다. <그림자 액자>에서의 제재는 북한강변의 ‘물의 정원’에 설치되어 있는 조형물이다. 바닥에 단을 놓고 그 위에 세운 액자형의 사각 테두리, 작가는 그 허공의 액자 안에 들어 있는 여러 풍경화뿐 아니라 그 조형물의 그림자 속에 담긴 풍경화까지 관람한다. 바라보는 방향과 자세를 바꾸어 가면서 사각 틀과 그 그림자 안에 그려지는 풍경들을 신명나게 읽어낸다. 그런 과정을 통해 액자형 조형물은 새로운 존재 가치와 의미로 거듭나고 있다.
최장순에게 사물은 인간이 살아가는 이치와 다르지 않다. <낙지>에서 말한바, “산다는 것은 낙지처럼 세상의 바닥을 치열하고 간절하게 건너가는 것”이다. 여러 종류의 그릇들 각각이 지닌 성격에 이어 그릇 일반이 지닌 의미를 해석하고 있는 <그릇의 철학>에서도 사람들의 세상살이는 그릇과 다르지 않다는 인식에 이른다.
사람도 그릇처럼 크기도 성향도 다르다. 다 제만큼의 크기에 알맞은 자신을 담는다. 다만 때와 장소에 따라 도자기나 사기그릇이 되기도 하고, 질그릇이 되기도 하며, 플라스틱이나 일회용 그릇이 되지 않는가. 의미 없이 태어나는 존재가 없듯, 각기 다름을 인정하면서 서로 소통하고 어우러지는 그릇에서 사람 사는 세상을 본다.
-<그릇의 철학>에서
<네모와 동그라미>에서 네모는 삶의 공간이며 동그라미는 탄생과 죽음의 공간으로 둘 다 인간과 언제나 함께하는 공간이라고 해석함으로써, 인간의 삶을 사물에 귀속시킨다. <구석과 모퉁이>에서는 모든 사물이 구석과 모퉁이를 지니고 있다는 것에 주목하면서 그 양면이 지닌 다양한 성질과 의미를 들춰내고, 양면을 다 알아야 사물의 진면목을 볼 수 있다는 인식에 이른다. 궁극적으로는 숨은 공간이면서 어둠의 공간인 구석과, 열린 공간이면서 밝음의 공간인 모퉁이를 오가는 것이 삶의 이치라 해석한다.
최장순의 사물수필에서는 인간의 삶을 이야기하기 위해 사물이 불려오는 게 아니라 사물의 다양한 의미를 탐구하는 과정에 인간이 소환되기 일쑤다. <모자에 대한 담론>의 마지막 대목에서 사람이 모자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모자가 사람을 만든다’는 화가 막스 에른스트의 말을 인용한 것은 의미심장하다. 어떤 모자를 쓰느냐에 따라 그 사람이 규정됨으로써 사람이 사물의 피조물이 될 뿐이다. 이 작품에서뿐 아니라, <네모와 동그라미>에서도 사람이 사물에 종속되어 있는 존재라고 의식한다.
네모에 갇혔다가 네모와 함께 일상을 보내고 다시 네모로 돌아가는 생이다. 하지만 네모는 생명의 원초적 이미지인 동그라미와 함께일 때 마무리된다. 생명의 시작과 끝에는 원형의 반복적 순환을 따른다. 둥근 공간에서 창조된 삶을 다하면, 못질한 네모의 목판에서 네모진 화덕을 거쳐 원형의 무덤이나 항아리에 안치된다. 그것은 종말이 아니라 네모와 원형이 함께 만든 또 다른 세계로의 귀향이다.
-<네모와 동그라미>에서
최장순은 사물을 불러오되, 문학적 구성미학의 울타리에 애써 가두려 하지 않는다. 사물을 언어의 풀밭에 마음껏 뛰놀도록 방목한다. 사물이 발산하는 자유분방한 음성들을 존중한다. 바꾸어 말하자면, 하나의 작품 속에서 사물의 다양한 의미들을 해석해 내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의 주제를 산출하기 위해 집약적 구성 체계를 갖추지 않는다. 그럴 필요도 없고 그럴 수밖에 없다. 어떤 사물이 지닌 절대적이고 원형적인 의미를 찾으려고 하지 않고 사회‧문화적 맥락에 따라 다양한 기의를 드러내는 화용론적 의미 해석에 작가의식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4.장르를 해체하는 장르의식
최장순의 사물수필은 수필의 일반적인 장르 규약을 해체하는 글쓰기이다. 자아를 성찰하는 글쓰기, 자아가 주체가 되어 있는 글쓰기라는 수필의 장르적 본질을 그의 사물수필에서 완전히 무너뜨린다. 사물수필 쓰기는 매우 낯선 실험이다. 아직 일반화된 스타일이 아니기 때문이다.
최장순의 실험적 장르의식은 수필의 길이에서도 감지할 수 있다. 그는 수필의 길이에 구애받지 않고 수필을 쓴다. 알다시피, 수필의 길이는 200자 원고지 15매 내외로 일반화되어 있다. 이러한 규약은 작품 내적 필연성에 의해 정해진 것이 아니다. 매체의 요구에 따라 우연스럽게 굳어진 관습이다. 최장순은 이러한 장르적 관습을 따르지 않고, 꽤 긴 작품도 쓰고 상당히 짧은 작품도 쓴다. <시느미> <오부뎅이> <여자라는 문>, <단추> 등은 짧은 수필이고, <위층 여자>, <하늘로 쏘아올린 성적표>, <그해 장마철>, <말년 병장과 신병 중대장> 등의 서사적 수필들은 긴 수필이다. 아직까지도 많은 수필 잡지들이 일정한 길이를 요구하고 있는 상황에서 작품 내적 요구에 따라 작품의 길이를 결정하는 것은 바람직한 지향이다.
작품의 유기적인 구성 체계를 구축하기보다는 부분의 독자성을 중시하여 여러 의미를 분산・확산시키는 방식들도 중심을 해체하는 포스트모던적 글쓰기의 시도로 볼 수 있다. 대부분의 수필에서 이러한 장르적 의도를 발견할 수 있다. 특히 <탈 군인화 일일학습>, <1908, 신약젼셔의 감회>, <시화호의 삶과 죽음>, <공구학 개론>, <나를 소지한 것들>, <대쪽 같은, 목화 솜 같은> 등, 중간제목을 달아놓은 작품들은 장면(상황) 중심의 글쓰기 방식을 표면화시켜 놓은 수필이다. 작품의 전체성보다는 부분성을 중시하는 작가 나름대로의 장르의식이 작동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이러한 글쓰기에서 보여주는, 작가의 예리하고 심도 있는 통찰력이나 풍부한 지식의 활용 등이 돋보인다.
열린 장르의식을 가지고 글쓰기를 하고 있는 최장순의 고뇌와 실험은 아마도 한동안 지속될 것이다.
-《수필미학》, 통권23호, 2019 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