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 경상도(慶尙道) 함창현(咸昌縣)
樂民 장달수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9권 / 경상도(慶尙道) 함창현(咸昌縣)
동쪽은 상주의 경계까지 8리, 남쪽은 같은 주의 경계까지 17리, 서쪽은 같은 주의 경계까지 23리, 북쪽은 문경현의 경계까지 7리, 서울과의 거리는 4백 37리다.
【건치연혁】 본래 고령가야국(古寧伽倻國)이었는데, 자세한 것은 김해부 산천 조를 보라. 신라가 빼앗아 고동람군(古冬攬郡)으로 하였다가 고릉(古陵)이라고도 한다. 경덕왕 때에 고령으로 고쳤다. 고려 광종(光宗) 때에는 함녕(咸寧)으로, 현종 때에는 상주에 소속되어 지금의 이름으로 고쳤으며, 명종 때에는 감무를 두었고, 본조 태종 때에는 규례에 따라 현감으로 고쳤다.
【관원】 현감ㆍ훈도 각 1인.
【군명】 고령(古寧)ㆍ함녕(咸寧)ㆍ고동람(古冬攬)ㆍ고릉(古陵).
【성씨】 본현 김(金)ㆍ오(吳)ㆍ임(任) 덕봉(德峯) 김(金) 이안(利安) 구(仇), 김(金)ㆍ오(吳) 모두 촌성(村姓)이다.
【산천】 재악산(宰嶽山) 현의 서쪽 13리에 있는 진산이다. 황령산(黃嶺山) 현의 서쪽 37리에 있다. 고산(孤山) 현의 동쪽 9리에 있다. 큰 들 가운데에 있어 바라보면 섬과 같다. 관천(串川)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문경현 견탄(犬灘)의 하류로서, 남쪽으로 흘러 용궁현(龍宮縣)의 하풍진(河豐津)과 합쳐진다. 남지(南池) 객관이 작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으며, 못을 파서 이 언덕을 둘렀다. 저곡천(猪谷川) 현의 남쪽 7리에 있다. 공검지(恭檢池) 현의 남쪽 13리에 있다. 자세한 것은 상주 조를 보라. 『신증』 홍귀달(洪貴達)의 기문에, “방죽[陂澤]이 많기로는 남방이 제일이요, 그 크기로는 공검지에 비길 만한 것이 없다. 처음 둑을 쌓은 것이 언제인지 모르나, 전설에 의하면, ‘처음 쌓을 때에 물이 너무 많아서 공사가 진행되지 않았으므로 사람을 넣어 함께 쌓았는데, 둑이 다 이루어진 뒤에 그 둑 속에 넣은 사람의 이름을 붙여 못의 이름으로 삼았다.’라고 하나, 그 이야기가 허황하여 믿을 수 없다. 그 못을 보면 넓은 것이 그득하게 출렁이고, 구불구불 둘러 싸인 것은 마치 거울을 닦아 놓은 것같이 편평하다.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큰 비에도 넘치지 않으니, 여러 가는 냇물들이 모여드는 것뿐으로 그와 같을 수 있겠는가. 은하수가 땅에 흘러 통하는 것을 땅이 새지 않게 하여 백성들에게 관개의 이익을 주고, 나머지로 술을 빚어내어 영주(瀛洲 신선 있는 곳)의 항아리 속 물건이 되게 하여(술이 되게 하였다는 말) 인간세상에서 구경하고 노는 자에게 주게 한 것인가. 그러나 관개의 이익은 상주 백성들만이 누리고, 함창(咸昌) 백성들은 땅을 내어주고 그 물을 모아서 남에게 줄 뿐이니, 이해의 치우침이 어찌 이러하랴. 내가 보건대, 함창의 모든 산들이 서북쪽으로부터 물을 바라보고 달려가다가 물에 다다라서, 머무르는 것이 마치 뱀이 긴 강으로 기어가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 하수(河水)에서 물 마시는 것 같기도 하며, 비녀다리나 자라 등 같은 것들이 잇달아 늘어서서 사람이 유람하고 관상함을 맞이하는 것 같으니, 어찌 하늘이 베풀고 땅이 내어놓아 함창 백성들에게 보답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그 가운데서도 내가 가장 사랑하는 것은 맨 서쪽에 있는 오산(鰲山)이다. 전에 헌납(獻納) 김이상(金履祥)의 무덤이 있었는데, 뒤에 이장하여 지금은 빈터가 되었다. 조금 동쪽에 있는 것은 그 고장 사람 무쌍(無雙)의 집 정자요, 그 동쪽 1리에 있는 것은 노경신(盧敬信) 공의 송정(松亭)이다. 노공은 죽고 그의 손자가 주관하고 있다. 이 모두가 아담하고 시원스러워서 특별히 빼어났다는 말이 있는 것들이다. 그런데도 시인 묵객이 여기에서 노닌 일이 없었으므로 정자의 이름 지은 자가 없으니, 이 어찌 고장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내가 이 고을에서 자라나 이제 흰 털이 희끗희끗하게 되도록 한번도 여기에서 조용히 놀아본 일이 없으니, 또한 나의 불행이 아니겠는가. 경술년 여름에 일이 있어 지나가다가 해가 저물어 머문 곳이 마침 오산(鰲山)의 옛터다. 말에서 내려 거닐면서 올라가 사면을 바라보니, 심신이 시원하고 흐뭇해졌다. 이것이 이른바 천년에 한번 맛보는 상쾌감이라는 것이리라. 조금 있다가 무쌍(無雙)의 집에서 자게 되었는데, 밤비가 개고 밝은 달이 하늘에 걸려 있었다. 같이 자던 두 사람과 걸어서 정자 언덕으로 나가 천지사방을 살펴보니, 1만 구렁에 바람이 없었고 물과 하늘은 고요하고 잠겨 있었다. 내가 말하기를, ‘이 정자의 기이함이 그 주인의 이름과 꼭 들어맞는다.’ 하니, 두 사람이 말하기를, ‘동쪽에도 한 정자가 있는데 그것 또한 경치가 기이하여 올라가 보면, 티끌 묻은 가슴을 씻을 만하다. 이른바 노씨네 정자[盧家亭]다. 모두 이름이 없는데 어찌 이름을 지어주지 않는가.’ 하여 가장 서쪽에 있는 것을 광신(曠神)이라 하였는데, 내가 올라가 보고 그렇게 느꼈기 때문이요, 동쪽에 있는 것을 무쌍(無雙)이라 하였으니, 그 주인의 이름을 딴 것이요, 또 그 동쪽에 있는 것을 세심(洗心)이라 했으니, 두 사람의 말을 따른 것이다. 아, 수많은 어진 선비가 조정에 가득하나, 나 같은 것은 내 스스로 알기에 호락(濩落)하여 쓰일 곳이 없는데, 여기에 이런 땅이 있건만 지금까지 붉은 먼지 속에서 분주하는 것은 무엇 때문이냐. 이제라도 오산(鰲山) 뒤에 띠집을 짓고 거기에서 늙고 싶다. 비록 늦기는 했으나 이제부터라도 3년 동안 쑥을 묵혀 두면, 혹시 7년의 병을 고칠 수 있을 것이다. 돌아온 뒤에 그 말을 적어 같이 있던 두 사람에게 보내었다. 두 사람이란 누구인가. 김국로(金國老) 공과 조계형(曹繼衡) 공인데 모두 문인으로서 나와 뜻을 같이하는 이들이다.” 하였다.
【토산】 은어[銀口魚]ㆍ송이[松蕈]ㆍ산무애뱀[白花蛇]ㆍ지황ㆍ꿀[蜂蜜].
【봉수】 성산(城山) 봉수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남쪽으로 상주의 소산(所山)에, 북쪽으로 문경현의 선암산(禪巖山)에 응한다.
『신증』 【궁실】 동헌 정은(鄭垠)의 시에, “함녕(咸寧) 옛 고을이 동쪽 바다[東瀛]에 가까운데, 관우를 새로 중수하여 그림인양 잘 되었구나. 꽃은 이슬을 담뿍 머금어 붉기가 비단 같고, 나무는 연기가 깊이 끼어 푸르기가 무우 같도다. 누각은 멀리서 보면 구름과 가지런히 솟은 듯하고, 대나무는 바람을 받아 흔들리니 옥 갈리는 소리처럼 맑기도 하다. 성주에 힘입어 경치 좋은 고장이 되었으니, 이제부터 영원히 이름 전할 줄을 알겠도다.” 하였다. 우련당(友蓮堂) 객관 서쪽에 있다.
【누정】 함녕루(咸寧樓) 객관 동쪽에 있다. 『신증』 조위(曺偉)가 광원(廣遠)이라 고치고 기문에 쓰기를, “당제(堂弟 사촌 아우) 존신(存愼)이 함녕의 원이 된 지 2년 만에 나에게 말하기를, ‘함녕 고을은 경상도의 요충지여서 갓 쓰고, 일산 받고 수레 타고, 말을 타고 오고 가는 자가 폭주하므로, 관우(館宇)와 누각은 급히 서둘러야 하겠습니다. 예전에 누각이 객관 동쪽에 있어 함녕(咸寧)이라 하였으나, 규모가 좁고 작은데 상주 목사 이전수(李全粹) 공이 그 이름이 평범하다 하여 청신(淸新)이라 고쳤고, 그 후로 거의 30년이 되었으니, 대들보는 휘고 기둥은 기울어져 사람이 올라갈 수가 없게 되었습니다. 관찰사 김군량(金君諒) 공이 이 누각이 쓰러지려는 것을 개탄하였으나, 본현이 피폐하여 물자가 없음을 돌보아 영포(營布) 약간을 내어, 현감 이자(李滋)에게 위촉하여 고쳐 짓게 하였습니다. 이자가 재목을 모아 계획했으나 진행하지 못한 채 병으로 세상을 떠났으므로 제가 지금 그것을 이어 받았습니다. 전공(前功)을 중단해서는 안 되겠기에 목수를 불러 계획을 세우고, 몸소 아전들을 지휘하여 전보다 조금 늘려 4칸을 기공하여 한 달을 많이 넘기지 않고 끝마쳤습니다. 높고 밝고 시원하며, 널따랗고 탁 트여서 올라가서 바라보기에 좋습니다. 주흘(主屹)의 빼어난 봉우리와 사불(四佛)의 푸른 숲이 나는 듯 춤추는 듯, 일어선 듯, 엎드린 듯 동북쪽에서 읍을 하고, 서남쪽에는 모든 산들이 이어 있어 가까운 것은 초록을 발라 놓은 듯하고 먼 것은 푸른 빛이 모인 듯한 것이 책상 앞에 둘러서니, 실로 모든 현에서 가장 뛰어난 경치입니다. 이 기이하고 웅장하고 아름다운 경치는 청신(淸新)의 두 글자로써는 다 할 수가 없으므로, 청컨대 옛 이름을 바꾸고 아울러 중수한 연월을 적어서 후세 사람으로 하여금 상고하게 하여 주기 바랍니다.’ 하였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기를, ‘나라가 백년토록 태평하여 백성들이 편안히 살아가며, 조야가 평안하고 조용하니, 영남에서는 다투어 단청(丹靑)을 칠한 훌륭한 누각들이 서로 바라보며, 지붕을 높이 하고 난간을 널따랗게 하지 않은 곳이 없으니, 이름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비록 옛 관례에 따른 것이지만 함녕이라고 한 것도 무방하다. 청신도 괜찮다. 하물며, 고을을 다스리는 데 있어 건물을 짓고 수리하는 것은 다만 여사(餘事)일 뿐인데, 어찌 한 누각을 위하는 것이랴.’ 하고, 오랫동안 응하지 아니하였다. 조금 뒤에 존신의 글월이 다시 와서 간청하기를 더욱 근간하게 하므로 내가 들은 바에 의하여 이름 짓기를 광원(廣遠)이라 하였다. 자세가 평탄하고 넓어서 거칠 것이 없어야 안계(眼界 시야)가 넓게 트이고, 안계에 막히는 것이 없어야 마음이 넓고 커져서 옹색함이 없는 법이다. 군자가 높고 밝은 곳에 사는 것을 귀히 여기는 것이 어찌 부질없는 일이겠는가. 오늘날 누각을 짓되, 혹은 산을 등지고 물을 향하여 다만 경치의 좋은 것만을 취하고, 안계를 고려하지 않은 것이 많다. 이런 것은 막힌 생각을 풀고 번거롭고 답답한 마음을 가시게 할 수가 없으니, 올라와 구경한들 무엇이 유익하겠는가. 그런데 이 누각은 비록 가까이 산수의 훌륭한 경치는 없으나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면 훤히 트이고 막히는 것이 없어, 마음이 넓어지는 것이 바로 천지와 함께 그 광원(廣遠)함을 함께하니 그 기상이 어떠하겠는가. 이것이 내가 이름을 광원(廣遠)이라고 지은 취지이다. 존신이 회답하기를, ‘광원의 뜻은 우리 함영루의 모습을 거의 다 나타냈지만, 내 마음의 본체(本體)와 정치로 백성에 임할 때에도, 그것을 미루어 실행하면 좋지 않겠습니까. 지극히 크고 지극히 넓은 것[至大至廣]은 내 마음의 본체인데, 거기에 사심이 어지럽히고 외물(外物)이 침삭하여 본체를 굶주리게 만드는 것입니다. 만약 이에 힘써서 밝은 거울에 먼지나 때가 침식하지 못하고 맑은 물에 진흙이나 모래가 앙금지지 못하게 한다면, 지극히 크고 지극히 넓은 본체는 조금도 이지러지고 손상된 것이 없이 천지 사이에 꽉 차 있어서 마음에 벽이 없고, 물(物)에 피차(彼此)가 없어서 환한 세상[八荒]이 모두 내 울안에 있게 됩니다. 그러므로 작게는 한 읍의 원이 되고, 크게는 한 주에 임할 제, 백성들은 나의 적자(赤子)요, 형제[同胞]와 같이 보게 될 것이니, 무슨 틈새가 있겠습니까. 그렇게 된 뒤에라야 내 마음의 본체를 온전히 하여, 정치의 도리에 다함으로써 광원한 경지에 도달할 수 있겠습니다.’ 하였다. 존신은 힘썼도다. 군량(君諒)은 창건, 중수를 계획하고, 존신은 마침내 앞 사람의 공을 이루어 놓았으니, 모두 기록할 만하므로 내가 마침내 쓰기를 거절하지 못하였다. 군량의 휘는 심(諶)이며, 나와 같은 해에 과거한 벗이다. 존신의 이름은 척(倜)이며, 기미년 봄에 사헌 감찰(司憲監察)로부터 나와서 함창의 원이 되었다고 한다.” 하였다.
『신증』 명은루(明隱樓) 곧 객관의 문루이다. ○ 홍귀달(洪貴達)의 기문에, “우리 읍의 원 우석손(禹碩孫) 공은 문무를 겸하고 관리로서 재질이 뛰어난 사람이다. 수레에서 내리자(부임하자) 개연히 황폐하고 퇴락 한 것을 일으키고, 보수하는 것을 일삼아 몇 해 안 가서 온갖 황폐한 것이 다 흥하게 되었다. 밭과 들을 개척하고 관우(館宇)를 중수하여 모습이 완연히 일신되었다. 이리하여 전에는 낮고 좁던 대문이 잠깐 사이에 변하여 백척 높은 누각이 되어 객관 남쪽에 우뚝 섰으니, 어떻게 그렇게 백성의 힘을 괴롭히지 않고 속히 준공했는가. 지나는 나그네가 말하기를, ‘고을에 훌륭한 누각이 있다고 해서 정치에 보탬이 되는 것도 아니요, 더욱이 함창은 작은 고을인데 누각이 좋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하기에 내가 말하기를, ‘그런 것이 아니다. 무릇, 사람이 막힌 데서 살면 생각이 정체(停滯)되고, 높은 데에 있으면 마음이 넓어지는 법인데, 정치를 하는 사람이라고 해서 그렇지 않을 수 있겠는가. 생각이 정체되었는데 정치가 달통(達通)하고, 마음이 넓지 못한데 능히 사람을 널리 용납하는 이를 나는 아직 보지 못하였다. 하물며, 백성에게 원노릇을 함에 있어서랴. 비록 백성을 아들과 같이 보아도 백성은 그를 바라보기를 군신과 같이 엄하게 한다. 그러므로 그들에게 슬프고 답답한 사정이 있는 것을 원된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이 있고, 시름하고 탄식하는 소리가 있어도 원된 사람이 듣지 못하는 것이 있고, 눈살을 찌푸리는 기색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있는 것은 그 무엇 때문이냐. 원과 백성 사이가 서로 막히는 것이 있음은 사정이 서로 막혀 있는 까닭이다. 내가 보니 세상의 백성을 대하는 자가 듣고 다스림이 대개 큰 집의 깊고 엄한 데에서 하거나, 그렇지 않으면 청사(廳舍)와 곳간이 막혀 있는 곳에서 아전들에게 둘러싸이고, 장부와 문서와 쌀과 소금 사이에 정신이 빠져 있고, 문지기는 안타까이 들어오려는 사람을 억누르고, 뜰지기는 함부로 소송한다고 꾸짖으니, 앞에 이른바 민망하고 억울하고 답답하고 찌푸리고서 원통한 것을 펴보려는 사람은, 남의 손을 빌려서 그 억울한 가슴속을 써 가지고 10분의 1의 효과를 걸어 보고, 한 치는 나아가고 한 자를 물러나곤 하여서 그 문을 들어갈 수 있는 사람도 적거늘, 뜰 안으로 들어가 송사할 수 있겠는가! 원을 만나보기도 힘들거늘, 그 실정을 상달(上達)할 수 있겠는가! 이런 사실을 안다면 그 고장의 관리되는 사람은 그 거처가 낮고 비좁으면 안 된다. 우공 같은 이는 이런 점에 보는 바가 있었던 것이 아닌가. 내 생각에는, 우리 우공이 누각에 의지하는 것은 멀리 환하게 보고, 숨어 있는 자세한 것을 밝히어, 관내에 혹시 슬프고 답답한 자, 시름하고 탄식하는 자, 눈살을 찌푸리는 자, 입으로 하소연하는 자, 글로 써 올리는 자들 모두 접견하여 굽은 것을 펴고 소원을 들어주며, 한 사람도 뜻을 이루지 못하는 백성이 없을 것이다. 그런 뒤에는 옷깃을 열고 앉아서 순(舜) 임금의 남풍가(南風歌)를 듣고, 백성의 재물이 푸짐하고[可以阜吾民之財兮] 백성의 시름을 푸는[可以解吾民之慍兮] 노래를 읊어 우리의 마음을 즐겁게 해 주고, 노래와 춤이 누각 밖에까지 들리게 될 것이니, 누가 고을에 누각이 있는 것이 정치에 보탬이 되지 못한다고 하겠는가. 밀양의 영남루, 진주의 촉석루(矗石樓), 울산의 대화루(大和褸), 안동의 영호루(映湖樓)가 다만 기생을 모아 놓고 노래와 춤을 간직하여 손님을 즐겁게 하며, 음란하고 요사한 풍조를 기르는 데 쓰인다. 어느 것이 쓸데 없고, 어느 것이 쓸데 있는가.’ 하였더니, 손[客]이 말하기를, ‘오직 선생이 아니면 무용지용(無用之用)을 누가 알리오.’ 하였다. 이리하여, 우공에게 알려서 명은(明隱)이란 편액(扁額)을 걸도록 하였다. 대개 백성들의 감추고 있는 것을 밝힌다는 뜻을 취한 것이다. 아, 우공의 뒤를 이어 원이 되는 이가 앞으로 그치지 않을 것이니, 이 편액을 보고 그 뜻을 생각하여 자신을 반성하게 된다면 우리 고을 백성의 행복은 이미 얻어진 것이 아니냐.” 하였다.
쾌재정(快哉亭) 이안부곡(利安部曲)의 서쪽인데, 채수(蔡壽)의 별장이 있다. 자신의 기문에 이르기를, “냇물이 동쪽으로 달려 무지개를 드리운 것 같고 산이 냇물에 임하여 마치 누에의 머리같이 된 곳에 정자가 있어 나는 듯하니 이름은 쾌재정이다. 동쪽으로는 학가(鶴駕 산 이름)를 서쪽으로는 속리(俗離)를 바라본다. 남쪽으로는 갑장(甲長)을 바라보고 북쪽으로는 대승(大乘)을 바라본다. 강산이 서리고 얽혀서 발 밑에 벌여 서 있다. 그 주인은 누구인가. 채기지(蔡耆之 채수의 자)로다. 그는 젊어서 과거 보아 용두(龍頭 장원)를 차지한 사람이다. 지위가 봉군(封君)에 이르렀으니 영광이 분에 넘친다. 늙어 벼슬을 그만두고 고향에 돌아왔다. 입고 먹는 것이 겨우 족하니 다른 욕망은 없다. 거문고와 바둑, 시와 술로 즐기니 한 한인(閑人)이다. 시비와 영욕을 도무지 알지 못한다. 좋고도 좋다. 이렇게 해서 여생을 한가로이 끝마칠 것이다.” 하였다. ○ 앞사람의 시에, “늙은 내 나이 이제 예순 일곱, 지난 일 돌이켜 생각하니 아득하기만 하구나. 젊었을 때는 재주가 겨룰 이 없기를 기약했고, 중년의 공명 또한 홀로 잘난 체하였네. 세월은 흘러 노끈으로도 잡아매기 어렵고, 산길은 멀고 멀어 말이 나가지 못하는구나. 무슨 방법으로 세상일 다 버리고, 봉래산 꼭대기에서 신선의 벗이 될까.” 하였다. 기정(岐亭) 공검못의 북쪽에 있는데 권민수(權敏手)가 지었다.
【학교】 향교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역원】 덕통역(德通驛) 현의 동쪽 7리에 있다. 다방원(茶方院) 현의 동쪽 8리에 있다. 함제원(咸濟院) 현의 남쪽 13리에 있다. 당교원(唐橋院) 당교 곁에 있다. 관천원(串川院) 관천 기슭에 있다.
【교량】 당교(唐橋) 현의 북쪽 6리에 있다. 신라 고기(古記)에, “소정방(蘇定方)이 이미 고구려와 백제를 치고 또 신라를 치려고 여기에 머물렀을 때, 김유신(金庾信)이 그 계획을 알고, 당 나라 군사에게 잔치를 베풀어 취하게 하고 모두 여기에 묻어 죽였다. 뒷날 사람들이 그것으로 당교라고 이름 지었다.” 하였다.
【불우】 상안사(詳安寺)ㆍ안룡사(安龍寺)ㆍ개원사(開元寺)ㆍ보제사(普提寺)ㆍ상원사(上元寺) 모두 재악산에 있다. 황령사(黃嶺寺) 현의 서쪽 황령산에 있다.
【사묘】 사직단 현의 서쪽에 있다. 문묘 향교에 있다. 성황사 현의 북쪽 3리에 있다. 여단 현의 북쪽에 있다.
【고적】 이안 부곡(利安部曲) 현의 서쪽 5리에 있다. 덕봉 부곡(德峯部曲) 현의 동쪽 10리에 있다. 금천소(金川所) 현의 동쪽 5리에 있다. 남산고성(南山古城) 현의 남쪽 10리에 있다. 돌로 쌓았으며, 둘레가 4천 5백 30자며 안에 우물이 하나 있었는데 지금은 폐지되었다.
『신증』 【명환】 본조 신소(辛紹).
【인물】 고려 김택(金澤) 이곡(李穀)이 젊어서 영해(寧海)에 놀았을 때, 택이 향교의 대현(大賢)으로서 곡이 반드시 귀하게 될 것을 알고, 자기 딸을 곡의 아내로 주어 낳은 아들이 색(穡)이다. 대현은 생도로서 나이가 많은 사람의 일컬음이다. 김요(金饒) 택의 아들인데, 과거에 올라 벼슬이 중대광 함녕군(重大匡咸寧君)에 이르렀다.
【제영】 유풍래세세(柳風來細細) 김계창(金季昌)의 시에, “조그만 누각 하나 산기슭에 서 있으니, 올라가서 좋은 경치를 찾는다. 버들을 스치는 바람은 솔솔 불어오고, 꽃잎은 비처럼 펄펄 떨어진다. 태수의 시에 겨룰 자 없고, 나그네는 술이 거나하구나. 붓을 잡고 해[歲月]를 적어 놓으니, 천순(天順) 3년이로다.” 하였다.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연혁】 고종 32년에 군으로 고쳤다.
《대동지지(大東地志)》
【토산】 대[竹]ㆍ감ㆍ호두[胡桃]ㆍ연실(蓮實)ㆍ붕어[鯽魚].
【성지】 남산성(南山城) 남쪽으로 10리에 있는데, 둘레가 4천 5백 30척이며, 우물이 1개 있다.
【누정】 명은루(明隱樓) 읍내에 있다.
【방면】 현내(縣內) 끝이 7리다. 북면(北面) 처음이 3리, 끝이 7리다. 동면 처음이 7리, 끝이 15리다. 남면 처음이 7리, 끝이 10리다. 상서(上西) 처음이 7리, 끝이 15리다. 하서(下西) 처음이 5리, 끝이 25리다. ○ 이안(利安) 부곡은 5리, 덕봉(德峯) 부곡은 동쪽으로 10리, 금천(金川) 소재지는 동쪽으로 5리다.
【창고】 읍창 읍내에 있다. 산창(山倉) 문경의 조령산성에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