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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형기의 귀가를 가장 반긴 사람은 할머니였다. 외아들이 직장을 따라 객지에서 오랜 세월을 보내는 동안 할머니에게는 형기가 아들 같았다. 형기도 일 년에 한두 차례 보는 어머니보다 가까이서 그를 돌봐주시는 할머니가 더 좋았다. 형기가 입대한 후 고향교회 사람들은 사방으로 흩어지고 아들과 합가한 할머니는 한동안 교회에 나갈 수 없었다. 어머니는 지난날 할머니의 불교 신앙을 본받아 매일 새벽녘이면 ‘정구업진언’을 암송하며 불심에 정성을 들이고 있었다. 그러나 요즘은 기독교를 받아들인 시어머니가 별로 반기지 않는 눈치를 채고 불경을 자제하고 있었다. 가족 가운데 할머니를 모시고 주일예배에 참석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할머니는 지난날 송전마을에서 손주와 함께 교회에 다니던 그때를 그리워할 뿐이었다. 집으로 돌아온 형기는 오랜만에 할머니와 한 방에 자면서 많은 얘기를 나누었다. 형기가 교회에 나가는 것으로 인해 한때는 관계가 소원해졌던 아버지도 아들이 신학교에 가고 나서는 모든 것을 인정했다. 이제는 공부하는 아들의 건강회복이 무엇보다 급선무였다.
“형기야, 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한번 받아보자.”
형기가 집에 온 다음 날 아버지가 말했다.
“쉬면서 영양 보충을 하면 서서히 회복된다고 하던데요.”
형기는 의사의 소견을 아버지께 말씀드렸다.
“한방은 치료보다 원기를 돋우는 것이야. 양방과 한방치료를 겸하면 회복이 더 속할 거야.”
형기는 아버지가 잘 아는 서울한의원에 가서 진맥을 받고 보약을 한 재 지어왔다. 몸이 아픈 아들에게 전복죽이나 쇠고기로 영양식을 해주는 어머니, 한방진료로 보약을 먹게 해주신 아버지를 대하면서 형기는 부모님의 변함없는 사랑을 모처럼 느끼고 있었다. 처음에는 신학 공부를 중단하고 집으로 내려오는 것이 마음에 큰 부담으로 작용했으나 몸이 불편한 것이 부모님의 사랑을 되찾는 계기가 된 것 같아 감사의 기도를 올렸다. 형기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하나님의 섭리 안에 있는 것을 굳게 믿었다. 병약한 몸으로 집을 찾게 된 것도 하나님의 뜻이 있는 것 같았다.
“할머니, 오는 주일에는 저와 함께 교회에 나갑시다.”
형기의 이 말은 스러져 가는 할머니의 믿음을 세워주었다. 할머니는 형기가 집을 떠나있는 동안 오래도록 섬기던 불교에서 기독교로 개종한 것이 약간은 후회가 되기도 했다. 다시 옛날로 돌아가 절을 찾고 불공을 드리고 싶은 생각도 없지 않았다. 그런 생각이 일어나면 마음은 안정을 찾지 못하고 불안했다. 할머니에게는 형기가 새벽마다 흘리던 눈물이 보였고 ‘천국’과 ‘지옥’이라는 말이 생생히 되살아났다. 그런 상황에서 형기는 집으로 보냄을 받았다.
호산나교회는 형기와 함께 출석한 할머니를 환영했고 새 가족으로 등록도 하게 되었다. 형기는 수요기도회에도 할머니와 함께 참석하여 같은 구역 식구들과도 인사를 하고 얼굴을 익혔다. 형기는 지난날 송전교회에 다닐 때처럼 날마다 할머니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다. 어머니도 아들의 권유를 따라 그 자리에 함께했다. 아버지와는 달리 어머니는 형기가 하는 말은 무엇이나 수용했다. 그것은 오랜 세월 동안 어린 형기를 홀로 고향에 남겨놓았던 마음의 부담을 조금이나마 덜어보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사실 어머니는 맏아들보다 둘째인 형기가 더 살갑고 다정해서 가슴에 품기가 좋았다. 형기는 요양 기간을 가족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기회로 삼았다. 어릴 적 배가 아프면 “내 손이 약손이다”하시면서 배를 쓰다듬으면 통증이 낫고, 머리가 아프고 열이 날 때도 어머니와 할머니의 손은 효험이 있었다. 환자가 병원을 찾아 의사 앞에 가면 병이 금방 나은 것처럼 느껴지듯 형기는 집에 돌아오자 몸이 한결 좋아졌다.
백형기는 기운을 회복하자 제철단지 조성을 위해 점점 폐허로 변해가는 고향마을을 둘러보고 싶었다. 포항시는 가는 곳마다 어수선했다. 날마다 밀려오는 외지 사람들로 인해 거리와 시장은 붐볐다. 그러나 주거시설들은 아직 개선되지 않았다. 이주민들로 인해 변두리로 주거지역이 확장되었으나 교통은 불편했다. 더욱이 송전마을 쪽으로 나가는 버스는 시간이 일정하지 않았다. 형기는 택시를 타고 송전마을로 향했다. 불과 10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 형산강 다리를 건너 조금만 더 가면 푸른 송림이 둘린 송전마을−초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던 옛 모습은 마치 폭격을 맞은 듯 을씨년스러웠다. 폐허 속에 아직도 남아있는 것은 절 뒤 밭으로 나가던 길에 서 있는 500년 된 팽나무 세 그루뿐이었다. 제철단지 평토 작업이 시작되었으나 어른 세 사람이 함께 팔을 둘러야 손이 잡힐 만큼 거대한 팽나무를 감히 베어내는 것이 두려웠기 때문일까? 송전마을의 사라진 골목들은 지금도 도화지에 그대로 그려낼 수 있을 만큼 형기의 머릿속에 뚜렷이 찍혀있다. 소식이 없는 설자는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할머니가 불공을 드릴 동안 설자와 함께 숙제하며 기다리던 시간이 그리워졌다.
그는 마을 앞에서 택시를 내려 소 먹이러 다니던 들판 길을 따라 앞산까지 걸었다. 지금쯤은 온통 연두색으로 덮여있어야 할 논들엔 벼 그루터기만 남아있고 논두렁엔 잡초만 무성하다. 가슴을 펴고 심호흡을 해보아도 흙냄새조차 낯설었다. 누구라도 한사람 만나보고 싶었으나 그 넓은 들판에 사람 그림자는 보이지 않았다. 앞산 위에 올라 싱그런 솔 내음으로 이마의 땀을 씻으며 멀리 영일만 푸른 바다를 바라보았다. 하얀 파도가 끊임없이 밀려오고 있는 명사십리! 해수욕장 개발을 꿈꾸며 송림 사이로 길을 내던 사람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친구들과 어울려 놀던 모습들이 떠오르지만 가장 뚜렷이 기억에 남아있는 것은 교회생활이었다. 토요일 오후엔 맨 먼저 교회로 달려가 예배당 안팎을 청소하고, 정미와 함께 풍금을 연습했다. 새벽종을 치고 무릎에 동상이 박히는 줄도 모르고 꿇어앉아 기도하던 때가 있었다.
수요예배가 끝나면 청년들은 여 집사들과 함께 여 전도사 댁으로 몰려가 밤이 이슥토록 얘기꽃을 피웠다. 스물네 살에 남편을 사별한 여 전도사는 모태신앙으로 성경학교를 거처 전도사가 되었다. 그녀는 때로 호박죽을 끓여 나누고 청년들을 아들딸처럼 사랑했다. 40대 초반이지만 검정 치마에 흰 저고리를 입고 쪽 진 머리를 한 고운 얼굴은 나이테가 나지 않았다. 때로 형기는 다른 이들이 돌아간 뒤 여 전도사와 나란히 누워 잠을 자고 이튿날은 함께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그는 잠잘 때 한쪽 팔을 이마에 올리고 자는 버릇이 있었다. 한번은 잠결에 따스한 숨결을 얼굴에 느꼈다. 어렴풋이 잠이 깨자 여 전도사는 형기의 잠든 얼굴을 들여다보다 이마 위의 손을 살며시 내려주었다. 형기는 행여 몸부림치다 그녀의 몸에 닿을까 조심하며 다시 깊은 잠에 빠졌다. 지금 생각하면 건장한 청년이 그 예쁜 여 전도사님 옆에서 제대로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지만 어머니 옆에 누운 어린아이처럼 편히 잠들 수 있었다. 그때 깊어진 믿음으로 형기는 주님의 양을 먹이고 돌보기 위해 신학생이 되었다. 형기는 주인 잃은 고향마을 터전에 교회가 서 있던 자리를 가늠하며 흩어진 성도들을 위해 기도했다.
장마철이 시작되는 6월 하순에 접어들었다. 집으로 내려온 지도 벌써 한 달이 지났다. 눈감으면 마음은 창신대 선지 동산에 있었다. 눈뜨면 연약한 몸을 요양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안쓰러웠다. 형기는 저녁 식사를 마치고 학교로 전화를 걸었다. 스피커를 통해 “이광희 전도사님, 전화 왔습니다―” 라는 소리가 수화기에서 들렸다. 잠시 후에 이 전도사가 2층에서 내려와 전화를 받았다.
“이 전도사, 백형기야!”
“오−! 백 전도사. 오랜만이야. 몸은 좀 어때?”
“많이 좋아졌어. 학교 소식이 궁금해서−.”
“응, 1학기는 거의 종강을 했어. 다음 주부터 한 주간 기말시험이 끝나면 바로 방학이 시작되지. 언제쯤 올라올 수 있겠나?”
“곧 방학인데 가면 뭐 하겠어? 시험 끝나고 이 전도사가 우리집에 한번 다녀가면 어떨까?”
“나도 그런 생각을 해보긴 했으나 이번 여름방학 중에는 헬라어 특강을 들어야 할 것 같아. 선배들의 말을 들으면 1학년 여름방학에는 헬라어 학점을 따고, 겨울방학에는 히브리어를 마스터해야 다른 공부가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다는 거야.”
“나는 지금 헬라어 알파벳도 다 까먹은 것 같은데, 어떡하지? 하하하!”
“나도 마찬가지야. 1학년 때는 모두 ‘히히, 헤헤’하다 지나간다는데 백 전도사는 겨울방학을 이용하면 될 거야.”
“어쩔 수 없지, 룸메이트들에게 안부나 전해줘.”
백형기는 학교 소식을 듣고 나서 집에서라도 공부하려고 책을 폈으나 어수선한 분위기에 집중할 수 없었다. 2학기 개학에 따라가려면 학교 공부에도 신경을 써야 하고 무엇보다 성경을 부지런히 읽고 많은 기도를 해야 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가 기도원으로 들어간다면 할머니를 교회에 모시고 갈 사람이 없었다. 어머니는 아직 교회로 발걸음할 만큼 마음이 열리지 않았다. 어느 날 새벽 번개처럼 생각이 떠올랐다. 어머니는 할머니 말씀을 거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자!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전도하도록 말씀을 드리자. 할머니도 며느리가 함께 교회에 나가면 얼마나 좋아하실까. 어느 날 저녁 할머니가 어머니에게 말씀하셨다.
“며늘아, 이제 우리는 모두 예수를 믿어야 하지 않겠나? 형기도 목사가 될라고 신학교에 갔는데, 니도 나와 함께 교회에 가자. 오는 주일 부텀.”
“예, 그렇게 하지요. 어머님이 혼자 교회에 가시는 것을 보면서 저도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할머니가 그런 말씀을 하기를 기다렸다는 듯 쉽게 대답했다. 개학 준비를 위해 기도원에 들어가려고 생각하던 형기에게 큰 문제가 하나 해결된 것이다. 형기는 그다음 주일에 어머니와 함께 할머니를 모시고 교회 예배에 참석하고 여 전도사에게 특별히 안내를 부탁했다. 불심에 젖어 있던 어머니에게는 큰 용단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