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랑시인 김삿갓 (64)
*결코 만만치 않은, 만만집 주모 '하편'
"지금 저 여편네는 술장사를 해먹을망정 사람 하나만은 진국이라오.
인정 많고, 남의 사정 잘 알아주고 돼먹은 계집이지요."
김삿갓은 조금전까지 서로 아옹다옹 다투던 모습과는 달리, 백수건달이 주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는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노형이 주모를 칭찬하는 것은 너무도 뜻밖이구료. 나는 두 사람이 개와 고양이 사이처럼 보였는데."
"주모와 나 사이가 개와 고양이처럼 보인다구요? 근데요 사실은 주모가 나를 아껴주고, 내가 주모의 사정을 알아주고...딱히 뭐랄 것은 없지만 그렇게 지내지요."
"노형이 주모를 이렇게 좋게 말하고 있지만, 외상술을 안주려는 것을 보면 주모는 노형을 별로 탐탁치 않게 생각하고 있는 것 아니오?"
김삿갓은 그들의 관계를 좀더 알아보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비틀어 보았다.
그러자 백수건달은 손을 휘휘 내저으며 다시 한마디 하는데,
"천만의 말씀. 주모가 나에게 외상을 안주면 누구에게 주겠소. 나는 술을 입에 댔다하면 억척스럽게 마시는 버릇이 있어요. 그래서 주모는 술을 안 주겠다고 앙탈을 부리는거죠.
이를테면 나를 생각해서 술을 못 주겠다는 것이죠."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삼 년 동안 술장사 하는 동안 계속 외상술을 마셨다니, 나라도 외상술 주고 싶은 생각이 나겠소?"
"아닌게 아니라 개업 첫날부터 외상술을 먹어 온 것은 사실이지요. 그러나 돈이 생길때 마다 갚아 온 것도 사실이고, 꼬투리가 몇 푼 남아 있을 뿐이지... 사실은 거의 다 갚아, 실상인즉 외상값은 몇 푼 남지 않았다오. 그런데 저 망할놈의 여편네가 나만 보면 삼 년전 외상값을 갚으라고 지랄을 하지 뭐예요."
김삿갓은 그 말을 듣고 박장대소를 하였다.
"하하하, 삼 년 전의 외상값 꼬투리가 그냥 남아서 돌아간다면, 그렇게 말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 아니오? ... 그나저나 나는 궁금한 것이 하나 있소이다."
"뭐가 궁금하단 말씀이오."
"우리에겐 옛날부터 홀아비가 한방중에 과부를 보쌈해 가는 관습이 있지 않소? 이 부근에도 홀아비가 없지 않을 터인데, 이렇게 과부 혼자서 버젓이 술장사를 해오고 있으니 이게 어찌된 일이오?"
이 말을 들은 백수건달은 생각나는 일이 있는지, 들고 있던 술잔을 술상위에 털썩 내려놓으며 말한다."
"아 참... 그 말을 듣고 보니 생각나는 일이 있군...이 집 주모가 한밤중에 홀아비한테 업혀갔던 사건이 두 번씩이나 있었다오."
"엣? ... 홀아비한테 두 번씩이나 업혀 갔던 일이 있었다구?"
이번에는 백수건달이 술 한잔을 단숨에 쭉 들이키고 나서, 비어있는 술잔을 김삿갓에게 건네며 말한다.
"삿갓 선생! 과부 업혀 갔던 얘기도 좋지만 술이나 마셔가면서 애기 합시다.
내가 한잔 따를 테니 기분좋게 쭈욱 들이키시오."
백수건달은 남의 술로 선심을 써가며, 호기롭게 말을 한다.
"이 집 주모가 한밤중에 홀아비한테 업혀 가던 이야기를 들으면 삿갓 선생의 배꼽이 빠질거요."
"배꼽이 빠져도 좋으니 그 애기 좀 들어 봅시다."
"듣고 싶다면 얘기해 드리죠."
그리고 백수 건달은, 주모가 한밤중에 산너머 마을에 홀아비에게 업혀가던 이야기를 다음과 같이 들려주었다.
지금으로 부터 20여 년 전, 주모가 30고개를 막 넘었을 때의 일이다.
그 당시 주모는 결혼한 지 10여 년 만에 남편이 죽고, 딸 하나를 데리고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었다.
그때만 해도 젊고 아름답던 시절이라, 재혼을 시켜주려고 중신 할미들이 꼬리를 물고 찾아 왔다.
그중에는 읍내의 갑부인 최부자가 소실로 데려 가겠다는 유혹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젊은 과부는 일체의 유혹을 뿌리치며, 누구에게나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나는 누가 뭐라해도 재혼은 안 해요. 백년 가약을 맺었던 남편이 비록 죽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편은 남편이에요. 재혼을 했다가 훗날 저승에 가서 남편을 무슨 낯으로 대하겠어요.
그러니까 나는 딸 자식 하나를 데리고 죽는 날까지 혼자 살다가 먼 훗날 저승에 가서 남편을 반갑게 만날 결심이에요."
본인이 이런 각오를 다지고 말을 하니, 중매쟁이들도 더 이상 할 말이 없었다.
그런데 어느 여름날 밤, 커다란 이변이 생겼다. 젊은 과부는 정신없이 잠을 자다가 그만, 포대 자루 속에 갇혀서 누구인지도 모르는 사내 등에 강제로 업혀 가는 신세가 되었던 것이다.
젊은 과부는 업혀 가면서도 포대 속에서 "사람 살리라"는 고함을 고래 고래 지르며, 사지를 결사적으로 버둥 거렸음은 말 할 것도 없었다.
납치범은 그런대로, 포대 자루 속의 젊은 과부를 얼마를 업고갔다.
그러나 포대 속에 든 과부의 몸부림이 어찌나 극성스럽던지, 더 이상 업고 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납치범은 마침내 포대 자루를 길바닥에 내려놓고, 제법 정다운 어조로 이렇게 설득하기 시작했다.
"강제로 업혀가기 싫거든 포대 속에서 내놔 줄테니 아무 소리 말고 따라 오라구. 우리들 같은 과부
홀아비가 이렇게 만난 것도 인연인 줄 알아요.
과부와 홀아비라도 남부럽지 않게 잘살면 될 게 아닌가.
나는 그만한 자신이 있어 임자를 업어가는 것이니 잠자코 따라오면 얼마나 좋겠누 ..."
포대 속에 갇혀 있는 젊은 과부는 그 말을 듣고,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더니 문득 차분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했다.
"나는 죽으면 죽었지, 이렇게 강제로 끌려가서는 못 살아요."
"그럼 포대 속에서 내놔 주면 나를 순순히 따라 오겠지? 우리 둘은 어차피 한번씩 아픔을 겪은 사람들 아닌가. 이제부터라도 새롭게 출발해서 우리도 남부럽지 않게 잘 살아 보자구."
납치범은 일이 순조롭게 풀려 가는 줄로 알고 포대를 끌러 주었다.
그러나 알고 보니 그게 아니었다.
젊은 과부는 포대 속에서 나오기가 무섭게 별안간 표범처럼 사내에게 달려들어, 대뜸 그의 불알을 움켜잡고 늘어지며 소리치는 것이었다.
"이 나쁜 놈아! 짐승만도 못 한 네놈은 아예 뿌리를 뽑아 버리겠다." 사태는 급전 직하로 역전 되었다.
과부를 납치해 가려던 사내는 졸지에 급소를 공격당한 아픔에 기절 초풍을 하였다.
"아야 아야! 아이구 나 죽네 .. 제발 이것 좀 놔주쇼! 아이구 아야!..."
사내는 금방 죽어 갈 듯한 비명을 질러댔다.
그러나 과부의 손아귀에서 빠져 나오려고 요동을 칠수록 고통은 더욱 심해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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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만도 못 한 놈아! 또다시 그럴 테냐 어쩔 테냐,
아예 오늘 여기서 뿌리를 뽑히고 갈테냐."
사태가 이쯤 이르자 제아무리 항우 장사라도 배겨날 길이 없었다.
"다시는 안 그럴테니 제발 사람 살려요." 젊은 과부가 얼마나 납치범의 불알을 세게 쥐었는지,
마침내 젊은 과부가 그것을 놓아 주었을때는,
납치범은 혀를 가로 물고 쓰러져 버렸다.
김삿갓은 거기까지 듣다가, 배꼽을 움켜잡으며 포복 절도를 하였다.
"하하하, 하마터면 하나밖에 없는 귀물을 송두리째 뽑혀 버릴 뻔했구료.
사내의 급소를 사정없이 움켜잡고 늘어졌으니 당사자는 얼마나 아팠을까,
생각만 하여도 남에 일 같지 않구려."
"그러게나 말이에요. 그러니까 삿갓 선생도 행여 그것만은 조심하시오."
"에이 여보시오. 남의 걱정은 말고 노형이나 조심하시오."
"납치 사건이 두 번 있었다고 했는데, 또 한 번의 납치는 어떻게 모면했나요.
그 애기도 들려주시구려."
그러자 백수 건달은 고개를 가로 젓으며,
"삿갓 선생은 술 한잔 사주고 그 좋은 이야기를 죄다 공짜로 듣겠다는 말씀이오.
그건 너무 하시오." 라고 말을 하면서 거절하는 투로 나온다.
"에이... 밑천도 안 들인 얘기를 무얼 그리도 비싸게 구시오.
술은 얼마든지 살 테니 어서 다음 이야기를 들려 주시오."
"어험, 그러면 밑천이 안 들은 이야기니 선심을 쓰기로 할까 ? "
백수 건달은 김삿갓이 이야기에 바짝 흥미를 같자, 잔뜩 뜸을 들인후 ..
"이제부터 하는 이야기는 하늘 아래 하나밖에 없는
희귀한 이야기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그리고 백수건달은 두번째의 납치 사건을 다음과 같이 말해주었다.
달은 발이 없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