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름 과일하면 수박 아닌가요?
제 각자 입맛 나름이겠지만 그래도 무더위를 쫒아내기엔 수박이 그중 낫지 싶다. 동의하시나요? 어릴 때 장에 가서 어머니가 수박 한 덩이를 사오시면 집안이 바빠집니다. 할머니가 얼음 사오거너라. 심부름이야 제 몫이니 바삐 얼음 공장으로 달려가지요. 길죽한 얼음을 새끼줄로 묶어 녹을새라 걸음을 재촉하는데 이거 원, 힘을 쓰니 금새 덥잖아요. 새끼줄을 벗겨내고 얼음을 직접 들고오면 손바닥이 시렵다못해 아파오기까지 하지요. 집에 오면 할머니는 바늘하고 망치를 꺼내드십니다. 왜냐고요? 바늘을 얼음에 대고 망치로 살살 박기 시작하면 얼음이 조각조각 나서 유명한 "제꼴표 수박화채" 만들기 알맞게 되거든요. 제꼴표라니요? 궁금하신가요? 그럼 500원. 울집이 제꼴에 살았으니 그리 부른거지요. 정식 이름은 화성동, 한자로는 花城洞이라 그야말로 꽃동네올시다. 하지만 읍네에서 제법 산다는 사람들이 사는 양반골이라 제골, 법석골 하고 부르더라고요.
뭐 그리 수박 한 덩이를 두고 법석을 떨 건 뭐냐 하시겠지만 우리집 식구가, 그래요 밥 먹는 입이 아홉이어서 그 한 덩이로는 간에 기별도 가질 않아서 수박을 가지고 화채를 만들어야 해요. 그래야 수박을 먹은 듯 배가 한참 부르거든요. 당시 어느집이나 화채를 만들어 먹었어요. 길쭉하니 잘라서 먹으면 좋으련만 식구는 많고 다들 적네마네할까봐 화채를 만들어 먹으면 부피가 커지니 아홉 식구 넉넉하게 먹을 수 있잖을까요. 이제야 돈도 흔하고 먹을 입도, 식구가 단촐해서 애써 부피를 늘릴 필요가 있남요. 그동안 마당 한켠 수도가 있는 곳엔 으례 만들어 두었던 커다란 시멘트 큰 통엘 가보라지요. 수돗물에 담궈놓은 수박을 꺼내 식칼로 쩍 소리나게 수박을 자르겠지요. 잘익은 수박은 칼을 대면 담박에 쩌어~억 하니 소리가 나요. 수박을 잘게 썰어서 얼음 조각을 넣고선 휘젖지요. 그럼 수박에서 흥건하게 나온 물과 얼음이 섞여서 시원해진 화채를 사발 가득 담아서 나눕니다. 단맛 나게 사카린 두어 개를 넣으면 금상첨화일테지요. 할머니가 첫 번째로 받으실거고 다음은 제 몫이랍니다. 아버진 퇴근 전이고 과일을 좋아하시지 않으니 아장아장 걷는 막내까지 푸짐하게 사발로 수박화채를 떠 먹는 걸 어머닌 흐뭇하게 바라보십니다. 당신은 자실 생각도 없으신지 아이들 입에 숫갈 들어갈 때가 제일 배부르다고 하시대요. 먹는 걸 유달리 밝히는 둘째 여동생이 얼른 해치우고는 빈 사발을 내밀겠지요. 안 봐도 뻔합니다.
말 나온김에 이놈 이야기를 더 하고 넘어가야지요. 눈이 동그란 녀석, 먹는 걸 앞에 두면 안절부절하기 시작합니다. 고구마 삶은 거라든가 하다못해 곶감 하나라도 생기면 얼른 사라져요. 광이라든가 누구의 눈길 벗어나는 곳을 찾아서 감추고 오는거지요. 그리고는 제 몫을 또 달라고 해요. 다른 형제들은 먹고 있는데 그녀석만 빈 손이니까 어리숙한 어머니는 한 개를 더 줍니다. 왜 몰랐겠어요. 어머니 입에 들어가야할 먹거리를 채가는 얌채 짓을. 어쩌다 다락방에 올라가거나 광에 우연찮게 가보면 썩어 냄새나는 고구마라든가 홍시, 국화빵이 구석에 박혀 있더라고요. 물어볼 게 뭐예요. 그 녀석 짓이지. 지가 감춘 걸 까먹어서 썩어나자빠진 걸요. 수박화채야말로 아주 공평한 먹거리랍니다, 그걸 어디 감추겠어요. 껌도 그래요. 딸만 넷이니 안방 문지방 아니 문짝 위엔 나란히 껌 네 개가 꼬질꼬질하게 붙어 있어요. 서열대로 붙여 놓으면 싸움도 없을건대 꼭 싸우게 되더라고요. 먹음직한 건 서로 내 꺼라고 먼저 보는 놈이 임자라고 씹어버리거든요. 제가 껌을 씹다가 붙여 둔 곳에 1번 2번하고 표시를 해줘도 말썽이 그치질 않았어요. 하여튼 여동생들은 탈도 많고 금방 헤헤거리고 소꿉장난하는 걸 보면 여자는 요물이라던 어른들 말씀 그른 거 없어요. '꼴에, 니는 남자라고 점잔만 떨었던가?' 어디예, 동생하고 큰판으로 싸웠어요. 방에서 엎어치고 뒹굴다가 어머니한테 뒤지도록 맞기도 했고요. 밖에 나와선 어디 한 놈, 저한테 맞을 놈이 있던가요. 힘이 없는 이 형아는 세 살 터울 동생하고 맨날천날 싸웠답니다. 그놈도 참, 형한테 바득바득 대들게 뭐람. 이런 수박화채가 옆길로 새도 한참을 샜네요. 몇 해 전인가, 제가 냉장고에서 수박을 꺼내다가 문득 옛날 수박화채가 생각나대요. 그래서 수박을 썰고선 참외랑 복숭아도 두어 개 썰어 넣고는 설탕을 찾다가 커피믹스도 두어 개 넣고는 잘 비볐더랬습니다. 참 우유도 넉넉하게 부었고요. 그때 왠일인지 깡통 과일, 아마 칵테일용 캔인가 그것도 있길래 첨가했으니 완전 과일로 범벅을 만든 샘이지요. 한 숫갈 먹어봤더니 환타스틱하더군요. 아내랑 아이들한테 예쁜 화채 유리그릇에다가 담아서 돌렸더니 다들 놀라더라고요. 제 요리(?)에 반한 표정이래서 여름 날 때면 화채를 만들어보라고 무언의 시위를 합디다. 꼼짝 못하고 만들어야지 별 수가 있간대요. 올 여름은 제 처지가 처진지라 대여섯 번이나 만들어 바쳤고요. 칭찬도 받았지요. '참 잘했어요' 라고 아내한테 상장받을 때 인증샷하자고 폰카메라를 들이대는 딸을 겨우 말렸어요. 그래도 공처가 소린 듣기 싫더라고요. 조금 전 만들어서 채곡채곡 김치냉장고에 넣어두었지요. 그리곤 저도 한 숫갈. 칭찬은 고래도 춤추게한다는데 그깐 거 못할게 뭐 있어요? 저도 마누라 칭찬 받는 재미로 사는대요. 바나나도 잘게 썰어서 넣으면 좋지요. 칵테일용 과일켄은 일부러 살 거까지야. 냉장고 뒤져서 이것저것 넣어서 비벼보시구랴. 울 아내가 특별히 칭찬하는 건 커피랍니다. 커피를 넣으니 맛이 색다른가 봐요. 커피. 원두보단 그 유명한 커피믹스가 좋더라고요.
뭐 글 제목 '수박 먹는 방법'하니까 유명한 세프가 색다른 레시피를 알려주는가 하고 제 글 읽는다면 실망이 크시겠내요. 죄송스러워 어쩌지요. 일루 오세요. 제가 화채 드릴 게요. 오시라니까요. 전철표 하나 끊어드리지요. 비행기표까지야.... 사양할래요. 에이~ 돼게도 재미 없네. 수박하면 수박서리 아닌감! 무슨 그런 말씀을. 저도 읍네 사람이라 서리하는 거 몰라요. 아~ 생각나는 게 하나 있내요. 하지만 제게 일어났던 단 한 번의 수박서리 건은 두고두고 트라우마라고나 할까. 고등학생일 때 이야깁니다. 우리 학교는 시내에서 한참을 가다가 낙동강을 가로 질러가는 긴 다리를 건너야 했어요. 그리곤 또 한참을 걸어가야하는 시골에 있었거든요. 이십 리는 훨 넘는 시골이라 포장도 안 된 길을 걸어가다가 버스라도 만나면 이거원 먼지 때문에 앞을 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신작로를 벗어나 논두렁길을 주로 걸어다녔지요. 오가며 저지른 장난이야 오죽이나 많았겠어요. 마을을 지나다 보면 펌프가 있으면 훌러덩 웃옷을 벗고선 목물을 하다가 마을 새댁들을 혼비백산하게 만들었고요. 하루는, 얌전한 동무들인데 교대로 진학했는데 다들 교장 선생님으로 퇴직했더군요. 다들 시골 출신이라 여기는 수박밭이고 저건 감자하며 자꾸만 궁금해서 묻는 나때문에 귀찮아할만도 한데 대답을 잘 해주던 착한 친구였어요. 제가 수박 하나 따가자고 꼬득였지요. 더운데 끝없이 펼쳐진 농장을 건너서 보트장으로 가던 길에서 그랬어요. 집에 돌아가기 보단 낙동강에 가서 보트도 타고 헤엄도 치다가 출출할 때 먹자고 그런 생각을 한 거지 뭐예요. 솔깃해진 동무들이 좌우를 살피더니 먹음직한 놈으로 하날 따고는 살곰살곰 걸어가는데 주인 어른한테 걸린거 아니겠어요. 도망은 어림도 없어요. 그리 무거운 걸 들고선 어떻게 도망 갈 순 있겠어요.
우릴 나란히 세우더니 일장 훈시를 하시더군요. 학교에서 뭘 배웠냐고. 교장선생님한테 가서 따지겠다고. 우린 혼비박산, 그래요 앞이 캄캄해지곤 어쩔 줄 몰랐지요. 이 순둥이 동무 중엔 벌써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놈까지 나왔으니 주인장이 신이 나서 훈시가 마냥 길어지더군요. 나중엔 경찰서까지 들먹이며 겁을 주는데.....저도 맨처음엔 겁을 바짝 집어먹었는데 나중엔 기가 막히더라고요. 이거 너무한 거 아닌가고. 요즘에야 당장 절도죄로 끌려갈 판이지만 그땐 그렇게 험악한 세상이 아니었는데 주인장이 더위 먹어서 오바한거지 뭐겠어요. 주인장이 오바하는 걸 보던 참외밭 주인장이 와서 달래더군요. 그래도 설교에 재미 붙이신 주인장이 "ㅇㅇ학교라면 경상도 일대에선 최곤데 이런 짓을 하다니. 오늘은 특별히 봐준다. 다음에 이따위 짓을 하면 저기 농장 보그라" 가리키는 델 보니 엄청 큰 밭이 펼쳐졌는데 그게 바로 형무소농장이래요. 죄수들, 색이 뱌랠대로 바랜 죄수복을 입은 사람들이 밀짚모자를 쓰곤 뙤약볕에서 콩밭을 메고 있더라고요. 정복을 입은 교도관이 보초를 서고 있는 끔직한 풍경이었어요. 이 양반이, 지금 우릴 형무소, 당시엔 교도소를 그렇게 불렀지요. 농장엘 집어 넣겠다는 거 아닌가요? 세상에 이런 협박이 따로 없었어요. 제가 누굽니까. 얼굴이 벌겋게해서 대들려고하니 동무가 젭싸게 말리더군요. 말을하고보니 주인장도 너무했다고 생각했는지 에헴하고는 우리가 들고 있는 수박을 나눠 먹으라고 인심을 쓰대요. 말리러 온 참외밭 주인도 참외 대여섯 개를 따서 주더라고요. 진이 빠질대로 빠진 우리, 수박은 커녕 들고 있을 힘도 없어서 개울에 처박아버리고 보트놀이에다 수영은 커녕 집으로 돌아왔지요. 수박에다가 참외, 가지랑 도마토밭이 난들난들 불어오는 바람에 나붓기는 끝간데 모르는 밭두렁을 터덜터덜 걸어왔어요. 어느새 해가 지는가 여름해를 등에 지고 내 키보다 더 긴 그림자를 밟으며 돌아오는 길이 왜 그리 길고 멀던지. 어쩌다가 이 사건이 떠오르면 고개를 젓고는 떨쳐버렸지요. 쓰디쓴 기억일랑 개나 줘버리지 어디 쓰겠다고요. 제가 알려둔 수박 레시피 갖고서 시원한 수박화챌 만들어서 맛나게 드세요 오붓하게.
아참 얼마 전에 티브이에 수박 빨간 속보다는 껍질쪽의 하얀 게 양분이 그리 많다고 하대요. 자는둥마는둥 누워 있던 아내 눈빛이 반짝하더라고요. 요즈음 수박 하얀부눈을 잘라서 양념한 거 아주 맛나게 먹고 있습니다. 수박에서 나오는 물 때문에 밥에 비벼 먹어도 좋더라고요. 다들 그리해 자시고 있다고요. 혼자 아는 척 했내 그려. 묘하게 감칠 맛 나고 시원한 수박이 주는 이 맛, 바로 그거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