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산은 예로부터 인재의 고장으로 이름 높다. 일찍이 李重煥의 <擇里志>에서 조선 인재의 반은 영남에서 나고 영남 인재의 반은 선산에서 났다고 했다. 그 맥을 이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등 각 분야에서 빛나는 업적을 쌓아온 분들이 많은 중에 學者로서 존경 받는 분이 慕山 沈載完 선생이다.
선생은 선산군 옥성면 봉곡리 에서 1918년 명문인 靑松 沈氏 가문의 退山 章煥선생의 아들로 태어나 평생을 우리 문학의 고전인 시조문학 연구에 쏟으시어 1973년 학자로서 최고의 영예인 大韓民國 學術院賞을 수상하셨다.
선생은 1933년 선산공립보통학교와 1940년 경성사범학교를 졸업하셨다. 당시 경성사범학교는 전국의 수재들만 입학이 가능했다는 평가이고 보면 선생의 학업 성취는 특출하셨다. 탁월한 경륜으로 영남대 교수와 대학원장, 대구한의대총장을 지내셨고, 여러 학회와 역사 문화단체의 고문과 운영위원 등 중책을 역임하셨다. 이와 함께 학자로서의 선생의 높은 업적이 학계의 각별한 주목을 받았다.
수십 년에 걸쳐 우리 국문학의 숙원인 古時調를 총정리하고 연구하여 1972년에 , <校本歷代時調全書>와 <時調의 文獻的 硏究>가 대한민국 5대 저서로 뽑혔다. 이는 한국문학사를 연구하는 데 없어서는 안 될 불후의 업적으로 남을 것이라는 게 학자들의 평가이다.
선생은 국문학과 함께 국학의 줄기인 金石學과 典籍, 書藝와 韓國畵에도 관심이 높으셨다. 儒學 가문의 명필이셨던 선친으로부터 전수받은 중국 고대 서예대가의 서지와 서법을 연구하여 독창적인 서체로 역사적인 인물과 문화 유적들을 현창하는 일을 하셨고, 전국 서예전 심사 및 운영위원장을 지내셨으며, 釋譜祥節, 月印釋譜 등 보물 典籍과 新羅 最古 碑인 .國寶 <冷水里碑>를 발굴하기도 하는 등 역사 문화 연구 발전에도 빛나는 공적을 쌓으셨다.
선생은 모습 자체도 學者이셨다. 늘 웃음을 잃지 않는 평소의 몸가짐도 그렇고 상대방을 배려하는 말씀은 누가 봐도 가슴을 열게 하셨다. 대화에 장애가 있을 수가 없었다. 설득이나 소통이라는 단어를 떠올리지 않아도 마주 앉은 순간부터 편안힌 분위기가 형성되었다는 생각을 가지게 하셨다. 鶴 같으셨다.
또한, 선생은 선비의 표상으로 인품이 고결하고 순수하셨다. 세속적인 인연이 아니라 후학들이 공통분모로 도출해낸 스승의 모범을 보이셨다.
이러한 선생에 대한 재조명 작업이 있어야 하겠다. 대한민국 학술원상을 수상한 학문 성취를 후학들이 계승할 수 있는 터전 마련
이 필요하다. 명색 인물의 고장 역사의 고장이라는 선산 구미지역에 ‘慕山紀念사업회’ 설립도 한 방편이 아닌가 싶다. 이렇게 할 때 선생의 고결한 인품과 학문적 업적들은 고전으로 남아 길이 전하게 될 것이며, 동시에 선생 또한 萬古常靑한 역사적 인물로 우뚝 서게 될 것이다.
명색 경북의 거점도시인 구미에 내세울 역사 문화적 공간이 무엇이 있는가?
안동이나 영주, 의성까지는 두고, 인근 상주나 김천만 해도 역사나 문화적 인물이나 유적 유물을 보존 전시하는 공간이 한두 곳이 아닌데, 구미에는 박물관, 미술관, 인물관, 문화 전시관 하나 없는 게 현실이다.
바라건대, 우리에겐 과거의 선인들이 현재의 우리를 위해 그러했듯이 현재의 우리들은 미래의 빛나는 문화사를 위해 분명히 해야 할 한 가지 역사적 과업이 있다. 그 하나가 바로 慕山 선생과 같이 훌륭한 분들의 덕행과 학문적인 업적을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그 전모가 굴절 없이 미래의 역사 속에 전해지게 하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