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주, 북방의 고려지명 위치분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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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를 찾는 내몽골 대장정 (서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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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고구려의 최대영토가 평원왕 시절이며
요서동쪽절반-대흥안령-동북평원전체-삼강평원-연해주전체 라고 생각합니다
(단순영향권이 아니라 직접지배 또는 복속된 지역입니다)
그리고 추가적으로 지두우를 간접지배 했을것으로 봅니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577년 평원왕이 북주군을 배산들에서 물리친점 (수성전이 아닙니다)
2. 수서 고려전 - 요서에서 갈석산에 이르는 넓은지역에 고려가 집단농경을 했다고 기록된 점
3. 수서 돌궐전 - 581-2년 평원왕이 돌궐 이계찰대를 물리친 점
4. 내몽골의 적봉진, 파림좌기 등 내몽골 고려성의 배치가 대흥안령산맥을 따라 세워진 점
5. 30만 가량의 병력을 70여년간 유지하기 위해선 500만 이상의 인구가 필요한 점
6. 6세기 중후반에서 멸망까지 두막루의 조공기록이 없는 점
먼저 1번과 2번
요서의 한가운데 남북으로 길게 놓여있는 (지도상 검은선) 산맥을 중심으로
그 동쪽을 점령했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577년 북주의 침입시 소장님이 논증하신대로 유림관 동쪽을 차지했을 수도 있고
단순 요동의 어떤 벌판에서 물리친 것일수도 있습니다
그치만 수서고려전의 요서농경기록이 또다른 근거가 되죠.
또한 고수, 고당전쟁시 요서는 수당의 영토가 아니었습니다.
이역시 소장님이 논증하셨었죠. 백성이 살지않는,철저히 군사기지만이 몇기 존재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평원왕에서 영양왕 초기 까지 요서에서 농경이 가능했을 것으로 보이며
영양왕이 말갈병으로 수를 공격하기 전에 철수시켰을 것으로 보입니다.
적봉진과 파림좌기 지역등 고구려 요새의 흔적도 남아있습니다.
-> 수정 : 수당의 원정군이 요서남부지역의 고구려영토를 점령한 기록이 무려라 정도뿐이어서 고구려가 요서남부를 영토화한게 아니라 말살한 것 같습니다. 수당의 영토역시 만리장성 밖에는 유성뿐이기 때문입니다.
그다음 3번
581년은 한창 강성하던 돌궐이 동서로 분열된 해입니다. 몇년전부터 분열조짐은 있었구요
따라서 581년에 돌궐이 대규모로 고구려로 쳐들어오기는 힘듭니다.
주력병력이 저 멀리 동쪽으로 빠지면 바로 반란이 일어나도 이상하지가 않은 상황이었죠
즉 이것은 고구려가 지두우지역과 거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기 위해
혼란에 빠진 돌궐을 공격한 것으로 봐야합니다.
저는 이 공격으로 평원왕이 지두우의 자원을 확보했다고 생각합니다.
직접지배하기에는 무리가 있죠 대평원이라 성을 쌓고 수비하기가 힘든 지역이기 때문입니다.
-> 수정 : 다리강가 지역에서 고구려 성터로 추정되는 유적3곳과 계단식 적석총, 벽화등이 발견되었으므로 이부분은 재고의 여지가 있습니다. 장수왕과 평원왕이 각각 영토화했고, 그 사이 돌궐전성기에는 빼앗겼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4번과 5번
내몽골 고려성의 배치는 맨위에 달아둔 링크를 참조해주시기 바랍니다.
저는 고려성들의 배치가 동북평원의 농토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고구려 후기의 인구를 계산해봤을때
농안과 한반도서부의 평야만으로는 한계가 있죠
고정관념대로 요하를 경계로 삼는다면
요하 코앞에 넓게펼쳐진 농토를 포기했다는 말과 같습니다. 말이 안되죠
방어선은 요하에두고 동북평원에선 농사만 지었을 수도 있지만 그렇게하면 거란과 돌궐기병대의 약탈을 막을 수 없습니다.
대흥안령산맥의 길목길목에 요새를 짓고 적의 기병대를 요격하는 훨씬 좋은 방법이 있고
고려성이라는 물리적 증거도 있는데 이렇게 생각하지 않는게 이상한 겁니다.
6번
대흥안령에 요새를 쌓고 흑수말갈까지 복속시킨 고구려가
두막루를 내버려뒀을것 같지는 않습니다. 복속시켜서 식량을 바치도록 했을것입니다.
동북평원 북부가 춥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고구려 후기로 갈수록 온도는 점점 올라가죠. 발해시대에 최고점을 찍고 다시 온도는 내려갑니다
발해가 아무르강 이북까지 진출한 것으로 볼때, 고구려후기에는 최소 동북평원북부까지는 쓸모있는 땅이었을 것 같습니다.
오류나 모순되는점이 있다면 지적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첫댓글 견해의 폭을 떠나 논의의 활성화를 위해 글 올려주시는 것이 카페에 큰 도움이 되는 듯합니다. 앞으로도 건필하시기 바라며 감사드립니다.
견해의 폭에 문제가 있다면 지적바랍니다. 토론을 하고싶어서 올린거니까요
제대로 잘그려진 것 같습니다. 고대조선의 영토를 고구려가 온전히 수복했음을 보여주는군요.
수서 고려전에 요서 지역에서 집단농경을 했다는 기록이 어떤 대목인지 원문을 확인할 수 있을까요? 제가 알기로 공격대님께서 표시한 요서 지역의 상당수(대부분 現 내몽고자치구)는 농경지대가 아닌 것으로 압니다. 그 지역에는 유목민인 거란, 해 등이 살았고 지두우는 그 위쪽인 눈강 유역과 대흥안령산맥지역(그 바깥쪽이 아닐겁니다)에 살았습니다. 요서 남부 지역은 농경지대이긴 하지만 삼국시대에는 제대로 개척된 적도 얼마 없는 것으로 알고 있고요. 그리고 삼강평원과 연해주 지역은 기본적으로 흑수부, 불열부를 비롯한 말갈부족들(이후 발해시대의 월희부, 철리부 등)이 살던 곳입니다.
요서에 평야지역이 있는데 농경지로 개간하지 않았다면 연 한 모용선비 요는 왜 저기에 도성과 군현을 두고 지배를 했겠습니까 내몽골은 아니지만 요상경성인 파림좌기와 그남쪽은 농경지가 맞습니다 거란과 해족은 농경이 가능한곳을 점유하면 안되는겁니까
지두우는 대흥안령 서쪽이구요
우선, 저는 공격대님께서 지적을 바란다고 2차례나 강조하시기에 도움을 드린다는 차원에서 지적을 드린건데, 이렇게 공격적으로 답글이 되돌아오는 것은 좀 아닌 것 같군요. 님의 의견이 있겠지만, 사람 하는 말이 아 다르고 어 다르다고, 말투를 좀 순화하심이 어떨런지요? 그렇게 반응하시면 도움을 드리고자 지적을 드리는 사람의 입장에서도 지적드리기가 꺼려집니다. // 말씀드렸다시피 요서 남부는 농경지대가 맞습니다만, 최소 거란이 살았던 서요하 상류부터하여 그 이북 지역은 전형적인 농경지대가 아닌 것으로 알고 있기에 드린 말씀입니다. 뭐 저도 해당 지역을 직접 답사해본 적은 없어서 확실하게 말씀을 못드리겠습니다만,
그 지역은 고구려 700년 동안에는 선비족이나 거란, 해 등의 유목민들(물론 이 중에는 농경 요소를 가진 자들이 없지 않았지만 기본적으로는 분명 유목민입니다)이 살았던 곳이고, 후대에도 거란(요)제국이나 몽골인들이 사는 땅이 됩니다. 만약 저기가 농경지대라면 고구려는 왜 저 지역을 놔두고 굳이 당나라 침입에 대한 방어선으로서 천리장성을 요동 지역에 구축했을까요? 물론 천리장성의 존재와는 별도로 고구려가 거란 등에 영향력을 행사하고 그쪽에도 성이나 진지를 구축한건 맞습니다만, 서요하 상류가 농경지대라면 고구려의 영토(내지)나 방어선의 개념부터가 달라지지 않았을까요? 해서 드린 말씀입니다.
@신농 공격적으로 말하려던건 아닌데 그렇게 들렸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물론 방어선의 개념이 달라지지요 요동이 지키기가 훨씬 쉬우니 요동에 주요방어선을 구축한 것이고 저쪽은 전진기지 및 자원수급지라고 보는편이 맞는것 같습니다. 평소엔 말, 소, 기병, 철, 소금, 농작물등의 자원을 최대한 수급하고 전면전이 벌어지면 인구를 철수시키는 형태로요
@신농 고구려의 천리장성은 요동이아니라 요하를건너서 요서에 있었다는 중국자료가 있습니다
@신농 고구려의 평양은 한반도의 평양이 아니며 요동요양입니다
요동옆에 요하가있지만 수도를 방어하기위해서 천리장성은 요하의 서쪽에 있었을겁니다
우리가 만날 한반도 평양으로 생각하니까 이런생각을 할수밖에없어요
생각해보세요 요동에 요양이 수도라면 님같으면 요동에 천리당성 쌓겠어요
요하 서쪽으로 쌓겠어요? 요하나 요동쪽은 최후보루고 그전에 천리장성을 쌓는건당연하며
요서쪽에 농경할수있는곳은 충분히 했을겁니다
이런 지역들은 고구려의 영향권(유목 내지 수렵지대)으로 볼 수 있지, 마치 농경지대 같은 직접지배지역으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고구려 영토가 단순히 면적상으로 얼마나 컸느냐보다는, 그 지역에 있었던 거란이나 말갈 등을 어떻게 지배할 수 있었느냐는 문제입니다. 고려나 조선은 불가능했던 것이 고구려에는 어떻게 가능할 수 있었을까.
저는 직접지배 또는 복속된지역 이라고 적었습니다. 말갈 흑수부와 두막루는 직접지배가 아닌 복속이라고 봅니다.
복속지역을 영토처럼 칠하는게 꺼려지신다면 원나라지도에서 고려는빼주시고 오스만튀르크에서 크림칸국은 빼주시기 바랍니다. 당나라랑 요나라도 상당히 쪼그라들겠네요
고려조선과 고구려는 기본마인드가 다르다고 봅니다.
고려조선은 그저 전쟁없이 백성들 죽지않고 정권유지나 하는걸 바랬던것 같애요
그런다고 정권과 백성목숨이 더 잘 보존되는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통료부근 농경지가 많이 있고 고구려가 경작한 바둑판 같은 끝도없는 농경지도 직접 보았습니다.
딴건 둘째치고 지명에 대해 간단히 말씀드리자면, 특정 지역에 나타나는 지명은 어디까지나 '그곳에 고구려가 어떤 식으로든 영향력을 끼쳤을 가능성이 있다'는 방증 자료로는 충분히 활용 가능합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죠. 온달과 관련된 지명이 오늘날 아차산 일대와 단양을 비롯한 중원 지역에서 확인이 됩니다. 이를 두고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이 어디냐에 대한 논란이 있죠. 하지만 그 지명을 두고 그 지역에 이런 지명이 있으니 온달이 전사한 아단성은 그 둘중 어디에 있다...라고 얘기하기에는 곤란한 면이 있습니다. 지명이란 것이 언제 정확하게 생겨났는지 연혁이 있는 경우도 있지만, 대부분 그런 연혁이 없으며, 수시로 바뀌거나
잘못 전해지기도 하는 등 불확실하기 때문이죠(족보를 보고 그 사람의 혈연적 가계를 정확하게 파악하기 어려운 것과 비슷하달까요). 하지만 몇가지 사실은 유추할 수가 있습니다. A와 B라는 국가가 있다고 가정했을때 분명히 B의 영역인데 A와 관련된 지명이나 전설이 유래한다면, 그 지역은 양국의 접경지 혹은 군사적 접촉이 오랫동안 꾸준히 이뤄졌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또한, B와 관련하여 A가 반드시 군사적 진출(영역확장, 전쟁, 정복 등)을 하지 않아도 사회 · 문화적인 진출(외교, 이민, 교류, 문물 전래 등)을 통해 그 영향력이 후대까지 이어졌을 때에도 마치 실제 그 지역이 A의 영토였던 것처럼 전해질 수 있다는 점이죠. 그렇게
봤을때, 위에 링크를 건 논문처럼 '고려'라는 지명이 중국 동북지역 곳곳에 있다고 했을때 그 지명의 고려가 고구려인지, 고려인지, 고구려~고려를 모두 통칭하는 것인지 일단 고민할 필요가 있으며, 각각의 지명이 생겨난 연혁도 살펴볼 필요가 있을듯 합니다. 그리고 중국 동북지역은 조선 초까지 한국사와 밀접한 연관성이 있던 곳이었던만큼, 어떠한 경로로 그 지명들이 생겨났는지 자세하게 방증하지 않은채 지도에 점만 찍고, 그 범위를 주욱 그어서 그 안에 있던 건 다 같은 의미에서 살펴보는 짓은 비합리적이라 생각합니다. 마치 고구려 성을 지도 위에 다 점으로 찍고 마치 같은 시기에 있던 성인양 이해하는 것처럼 말이죠. ^^
저도 발굴조사가 이루어졌으면 좋겠지만 중국이 못하게 막고 우리학계도 저지역에 가려는 의지가 없는게 아쉽습니다. 발굴이되기전까지 이글의 제 주장은 가능성이상이 되기 힘든것도 맞습니다. 다리강가는 손보기교수님 발굴단이 가서 고구려식성과 장군무덤으로 추정되는 적석총 무덤, 벽화조각을 확인했고 몽골과 청등 후대국가의 흔적도 발굴하여 지속적으로 요충지로 사용되었다는것을 알 수 있습니다.
파림좌기, 우란호터의 고려성은 아직까지도 고려성이라부르는 현지인이 남아있다는점, 19세기 러시아와 일본의 현지지도작성시 현지인이 고려성이라 불러서 그렇게 적혔다는점. 발굴은 못하지만 돌절구가 성내에 있다는 점
장수왕이 지두우로 진출하려면 이지역을 점령해야 한다는점. 돌궐비문에 전성기영토의 동쪽경계가 산맥으로 적혀있는점. 당이 659년 적봉진을 공격한 기록 정도가 근거입니다. 대흥안령산맥의 금 계호(금이 몽골족을 막으려 쌓은 장성)로 추정되는 장성도 지도상에 고려성이라 표시되어있고, 금 계호는 기록에 이전에 있던 성곽을 증축해서 쌓았다고 하니 개연성은 충분히 있습니다. 저도연혁챙기고싶고 방증하고싶어요. 그게가능했으면 일반인인제가나설틈없이 이미됐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