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 나라의 대우 마태복음 20장 1-15절
지난 주에는 너무도 짧은 시간에 너무나 망가져버린 나라를 생각하면서 한편으로 우울하고 많이 속상도 하고 화가났던 한주간이었고 그러면서도 그래 이런 사람 때문에 세상이 아직 살만하구나하는 걸 경험한 한주간이었습니다.
배드 뉴스는 여러분들 잘 아시는데로 이태원 참사에 대한 이야깁니다. 신문, 방송, 온갖 언론에서 한 주간 내내 이 이야기를 들으셨을텐데 예배에서까지 듣는 게 힘든 분들도 계실 겁니다. 근데 우리가 더 힘든 건 참사도 힘든데 참사 이후 대처가 책임있는 관계자들이 국민들 가슴에 대못을 박는 현실입니다. 작은 초등학교에서도 아이들끼리 갈등이 생겨 어떤 큰 피해가 생기면 담임선생님부터 심지어는 교장선생님께서 나서셔서 사과하고 사고의 원인을 찾아내고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애를 씁니다. 하물며 한 나라에서 집단적으로 156명이나 되는 사람이 돌아가셨습니다. 더더욱 속속들이 드러나는 소식들은 우리를 경악하게 만들고 있습니다. 그 좁은 골목길에 20만이 넘게 모이고 그래서 위험이 감지되어 100건이 넘는 신고가 들어갔음에도 불구하고 국민안전 지휘체계도 제2의 세월호 참사 막겠다며 1조 5천억원이나 들여서 만든 재난안전통신망도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단 한명만이라도 그 골목에 서서 통제를 했어도 일어나지 않았을 참사입니다. 실제로 참사 2시간 전까지만 해도 한 여성이 그곳에서 사람들의 이동을 통솔하는 장면이 인터넷에 나옵니다. 시간적으로 7-9시입니다. 아마도 사람들이 제일 많이 모였을 시간 때입니다. 좀 더 인원이 많았을 시간에도 그 여성이 계셨던 동안에는 사고가 나지 않았었던 겁니다. 참사 당일 대한민국 안전망은 그 어느 것도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민주주의의 심각한 위기입니다. 대한민국이 민주주의 국가라면 행안부든, 경찰청내부든, 서울시 시스템이든, 재난안전통신망이든, 용산경찰서든, 하다못해 동네 파출소든 자율적 권한이 주어져 있었다면 어느 시스템이든 하나라도 작동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어느 시스템도 작동하지 않았습니다. 사고는 아래에서 위로 보고조차 보고되지도 않았고 알지 못하는 비선을 통해 대통령으로부터 지시가 내려왔고 그 시스템의 어느 수장도 20만이 모이는 행사의 안전에 관심이 있었던 사람들이 없었습니다. 단 6개월 만에 국민들의 안전을 관리하는 모든 시스템이 작동하지 않을만큼 망가져 버렸고 그 시스템의 관계자들은 자신들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조차도 모르고 있습니다.
무섭습니다. 박정희 전대통령이 자꾸 떠오릅니다. 정말 아니기를 바라지만 대통령이 현 법무부장관과 새롭게 임명된 판사 30명으로 추측되는 사람들을 앉혀놓고 술자리를 함께 했다는 이야기도 흘러나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행정부가 검찰권력을 손에 쥔것도 모자라 사법권력까지 손에 쥐려고 하고 있는 겁니다. 무소불휘의 권력으로 어떤 음모를 꾸미는 사이에 얼마나 많은 국민들이 죽어나갈지 모릅니다. 대통령 스스로가 한수원 이사에는 전문성이 필요없다고 모텔업과 술집을 하는 전혀 전문성이 없는 사람을 국가 에너지 사업의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는 한수원 이사로 낙하시켰습니다. 핵폭탄같은 원전을 다루는 일을 비전문가에게 맡긴 겁니다. 경제가 불안하고 원자력이 불안하고 국가안보가 불안합니다. 게다가 안전까지도 불안합니다.
이제라도 대통령이 정신 차리기를 바랍니다. 역성혁명입니다. 제왕이 부덕하여 민심을 잃으면 천명을 받은 다른 사람을 세울 수밖에 없다는 의미입니다. 국민이 뽑은 대통령! 국민의 힘으로 새롭게 바꿀 수 있습니다. 민심이 천심이요 백성귀한 줄 모르는 지도자는 반드시 하늘의 심판을 받게 되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도 거창한게 아닙니다. 오늘 본문의 방점은 포도원주인의 마음입니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노동력=사람의 가치입니다. 일을 잘하는 사람일수록 사람의 가치가 더 인정되고 더 질 좋은 노동을 하는 사람일수록 값비싼 대우를 받습니다. 12만원/억대의 연봉, 사람의 가치가 오로지 자본과 노동력으로 평가되는 비정한 사회입니다. 이런 사회에서 노동을 하지 못하거나 돈이 없는 사람은 쓸모없는 사람입니다. 시장에서 팔리지도 않고 아무도 거들떠 보지도 않습니다. 특히나 아프고 병들고 그래서 전혀 노동을 할 수 없는 사람은 사람대접조차도 받지 못합니다.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셨을 때 노동을 하라고만 만드신 것만은 아닐텐데 말입니다. 예를 들어 현대판 베짱이 이야기처럼 우리가 텃밭에서 일을 할 때 어떤 사람은 노래를 부르고 어떤 사람은 그저 아이들과 잘 놉니다. 어떤 사람은 그저 일하는 사람과 말동무를 해줍니다. 그런 사람은 전혀 쓸모 없는 사람일까요? 그런 사람들의 우정과 따뜻함과 공감의 시선은 오히려 우리의 노동력과 관계를 더 풍요롭게 해주는데도 쓸모없는 사람일까요? 아내 아버님이 돌아가시기 전 병상에 오랫동안 누워계셨었습니다. 아내는 훗날 그런 이야기를 합니다. 아버님 돌아가시고 집안에 어린 남동생 이제 초등학교 6학년밖에 되지 않았던 남자라고는 초딩하나밖에 없게 되었을 때 동네 분들이 집안에 성인 남자가 없다고 얼마나 무시하고 함부로 대했는지, 아버님이 아프셨어도 존재 자체만으로도 얼마나 큰 힘이었는지 모른다는 이야기를 한 적이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함부로 비교대상이 될 수 없습니다. 아무일을 하지 않아도 누군가에게 존재자체만으로도 가슴벅찬 가치를 지닌 존재일 수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현실을 보면 사람의 존재, 생명의 존재가치는 자본이나 노동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어느것들과도 비교될 수 없는 존재의 가치를 저마다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송이 코스모스가 피어났는데 그 꽃을 보고 자살을 생각했던 사람이 생각을 바꾸었다면 그 꽃의 존재의 가치를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요? 너는 한송이 밖에 피우지 못했기에 햇볕을 줄수가 없어, 물은 딱 고만큼이야 할 수 있을까요 오늘 하루만 꽃피우고 저기가서 찌그러져있어 할 수 있습니까? 깊은 우울증에 빠져 있는 어떤 사람은 오늘 아침에 일어나서 커튼을 활짝 열어젖힌 것만으로 충분한 삶의 몫을 다했을 수도 있습니다. 하루종일 누군가를 위해 노동을 하지 않아도 말입니다.
오늘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 이런 마음으로 느껴집니다. 열시간을 일한 사람이나 한시간을 일한 사람이나 먹고 살아야할 식구들이 있습니다. 열시간 일했던 사람은 열시간 일한 것으로 하루의 몫을 다했지만 한시간 일한 사람은 하루종일 일자리를 찾으면서 거리 이곳저곳을 헤매며 애닯아하고 애타하며 가족들을 위해 사랑하는 이들을 위해 애쓴것만으로도 하루의 몫을 충분히 했는지도 모릅니다.
그 포도원 주인에게는 그 모든 것을 헤아리는 마음이 있었습니다. 저마다의 다른 속도와 다른 결과 저마다의 최선과 저마다의 아픔과 고통과 안전까지도 헤아릴 줄 아는 그 헤아림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 종일 길거리에서 서성이던 사람조차도 자신의 포도원으로 초대했고 일용할 양식으로 하나님 나라의 기쁨으로 환대했습니다. 이 포도원 주인의 마음이 예수님의 마음이요 하나님의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집안 식구를 다스리는 부모의 마음, 교회를 함께 세워나가는 지도자들의 마음, 나라를 관리하고 운영해 나가는 지도자들의 마음이 이러길 바라십니다.
맹자의 양혜왕편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맹자가 왕을 찾아가 어떻게 나라를 다스려야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때 맹자가 그런 말을 합니다. 백성들과 뭘하든 함께 하라는 겁니다. 예를 들면 이런 겁니다. 왕이 활쏘는 걸 좋아해요. 그래서 자기가 활 쏘는 궁터를 한 몇천평을 마련했어요. 그리고는 누구도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들어오면 벌금내게 하고 그러면 백성들이 뭐라고 하겠느냐는 겁니다. 우리 왕은 백성들을 돌볼 생각은 안하고 허구헌날 활만 쏘러 다닌다고 도대체 활쏘는 것 말고 할줄 아는게 뭐가 있냐고 그럴 거라는 거죠. 그러면서 그 얼마되지 않은 궁터도 넓다고 혼자서 활쏘는데 뭐그리 넓은 땅이 필요하냐고 그럴거라는 거죠. 그런데 왕이 궁터를 한 십만평을 만든 겁니다. 그러고는 모든 백성들이 그안에서 같이 활을 쏘게 하면 어떻겠냐는 거죠. 주말마다 가족들끼리 캠핑와서 활도 쏘고 삼겹살도 구워먹고 개울가에서 가재도 잡을 수 있게 잘 만들어 놓으면 백성들이 우리 임금님 십만평도 너무 좁다 더 넓게 해드려야하지 않겠느냐 더 넓히자 이십만평 오십만평이 문제냐 백만평이라도 늘리자 할 것 아니겠느냐 뭘 하든 혼자만 하지 말고 함께 하고 백성들의 마음과 살림과 형편과 안전을 진심어린 마음으로 걱정하는 마음으로 한다면 왕이 하는 모든 일을 백성들이 좋아할 거라는 겁니다. 나랏일을 하든, 집안일을 하든 진심으로 걱정하고 헤아리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시민들이 분노하는건 모자라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술을 마시는 것 때문이 아닙니다. 나라의 살림에 책임자이면서도 진정성 있는 책임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는 겁니다. 천공만이 조작할 수 있는 로봇같애요.
책임을 방기해서 참사가 일어날 수 있습니다. 능력이 부족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정말 아파하는 마음으로 진정성을 가지고 사과하고 어디에서부터 잘못됐는지 점검하고 컨트롤 타워 다시 세우고 전문가 앉히고 시스템 망가진 거 다 복구하고 제도적으로 보완하고 재발방지책 마련하고 하면 되지요. 그래서 앞으로는 절대로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없도록 시스템을 마련하고 이런 일이 있을찌라도 국가가 나서서 모든 것을 책임감있게 해준다는 믿음이 생기면 그나마 일어난 일은 어쩔 수 없지만 이 참사 속에서도 국민들이 위로를 받지 않을까요?
지난주에 만났던 한 가정의 이야기로 마치고자 합니다. 지난 주 수요일에 두 분의 무연고자 장례식을 치뤘는데 두 분 다 암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런데 그 두분 중 한분의 이야깁니다. 80넘어 보이는 어르신이 돌아가셨는데 그분의 가족으로 보이는 어떤 할머니와 다리가 불편하신 아들과 그 아들의 딸로 보이는 삼대가 함께 오신 겁니다. 그래서 이 가족의 할아버지신데 장례비용이 없어서 공용장례로 치르시는구나 했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그 아들로 보이는 분과 돌아가신분과 20세 정도의 차이를 보이는데 공사판에서 만난 분들이래요. 그래서 서로 친구처럼 자식처럼 지냈는데 어느날 암이 걸리신 거예요. 그런데 수술비가 없는 거예요. 수술비가 없으니 병원에서 수술도 안해주는 거예요. 그때 이 아들처럼 보이는 공사판 동료가 카드를 내 주었다는 겁니다. 그후 20년 동안 이 할아버지를 모셨데요. 이 아들분도 몸이 성한 분이 아니셔요. 한쪽다리가 불편하셔서 절뚝거리시는데 뭐로 봐도 살림이 넉넉해서 돌봐드린 게 아니예요. 그런데 그 아들의 어머니 하시는 말씀 “그냥 숟가락 하나 더 얹었어요” 너무도 대수롭지 않게 말씀하시는 거예요. 그렇게 한가족처럼 20년동안 사신 거예요.
자신의 나라(세상)에서 만난 아픈 인연을 함부로 내치지 않고 소중한 인연으로 끌어안으면서 서로다른 여건의 사람들을 자기 방식으로 환대하며 헤아리며 사셨던 겁니다. 이런 분들은 저마다 자신의 나라의 아름다운 지도자입니다. 세상이 황망하게 무너져도 그속에서도 저마다의 왕궁에서 책임있는 삶의 모습으로 꿋꿋하게 살아가는 분들이 있습니다. 하나님 나라의 민초들과 더불어 지치지 않는 심신으로 하나님 나라의 희망을 열어가시는 모두가 되시길 빕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