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36) 시상, 만만치 않은 무게 - ① 시상, 깨달음의 요약/ 시인, 문학평론가 박현수
시상, 만만치 않은 무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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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시상, 깨달음의 요약
시를 쓰기 위해 고민하다 보면 문득 떠오르는 괜찮은 생각이 있다. 이것을 시상이라고 한다. 시상은 시의 씨앗이 성장하여 나타난 순간적인 생각으로, 흔히 간략한 언어적 표현으로 나타난다. 시상이 간단한 형식으로 나타난다고 하여 이것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된다. 시상은 의식적·무의식적으로 축적된 고민과 사색의 결과가 일종의 깨달음과 같이 나타난 것이다. 그것이 한 순간에 나타난 것이라 해서 일종의 우연이라 생각해서도 안 된다. 시상이 지닌 의미는 다음 언급에 잘 나타나 있다.
여러분도 아시다시피 한 개의 시상(詩想)이라는 것은 한 순간에만 의거하는 것은 아니올시다. 또 모든 과거의 상념(想念)들과 전연 무관하게 단독으로 우연히 성립될 수 있는 것도 아니올시다.
가령 미미하나마 졸작 「국화 옆에서」를 예로 말씀드리더라도 여기에는 네 개의 이미지가 중첩되어 있습니다만, 이것들은 어느 하나도 한 순간에 우발적으로 투영된 것에만 의거한 것은 아닙니다.
4연 중 맨 첫 연의 “한 송이의 국화꽃을 피우기 위해 봄부터 소쩍새는 그렇게 울었나보다”의 한 송이의 피어 있는 국화꽃의 색채와 향기의 배후에 봄부터 초겨울까지 계속되었던 저 소쩍새의 울음의 음향을 첨가시킬 이미지에는 물론 색채와 음향을 조화시켜 보려는 표현적 의도에 의해서 결정을 보게 된 건 사실입니다마는, 이 한 송이 국화를 중심으로 하는 이미지가 고정되기까지에는 그 전에 이와 비슷한 많은 상념이 내 속에 이루어지고 인멸하고 다시 이루어지면서 은연중에 지속되어 왔었던 것을 나는 기억합니다.
그 중에 몇 가지를 예를 들어 말씀 드리면, ‘저 우리 이전의 무수한 인체가 사거(死去)하여 부식해서 흙 속에 동화된 그 골육은 거름이 되어 온갖 풀꽃들을 기르고, 그 액체는 수증기가 승화하여 구름이 되었다가 다시 비가 되어 우리 위에 퍼부었다가 다시 승화하였다가 한다’는 상념이라든지 ‘한 개의 사람의 음성에는 ― 그것이 청(淸)하건 탁(濁)하건 절실하면 절실할수록 거기에는 반드시 저 먼 상대(上代) 본연의 음성이 포함되리라’는 상념이라든지, ‘저 많은 거리의 젊은 소녀들은 사거(死去)한 우리 애인의 분화된 갱생(更生)’이라는 환상이라든지 ― 이런 것들입니다.
이러한 여러 가지 상념들은 언뜻 보기엔 「국화 옆에서」의 첫 연의 시상과는 아무 관계도 없는 것 같기도 하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전 ‘인체윤회’의 상념이나, 거 ‘음성(音聲) 원형(原型)’의 상념이나, 저 ‘애인갱생’의 환각 등은 ― 요컨대 이러한 상념과 환각의 거듭 중복된 습성은, 한 송이의 국화꽃을 앞에 대할 때, ‘이것은 저 많은 소쩍새들이 봄부터 가을까지 계속해 운 결과려니’ 하는 동질의 사상을 능히 불러일으킬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또한 제2연의 내용이 되는 국화 개발(開發)의 원인으로서 여름의 천둥 소리를 끌어 올 수도 있는 때문입니다.
―서정주, 「시작 과정 ― 졸작 「국화 옆에서」를 하나의 예로」(서정주, 박목월, 조지훈,『시창작법』, 선문사, 1954, 106-108쪽.)에서
시인의 설명에 따르면 ‘한 송이의 국화꽃’과 ‘소쩍새’를 연계시킨 이런 시상은 한순간에 우연히 떠오르는 것이 아니다. 이 시상의 탄생은 모든 존재가 죽음으로써 끝나지 않고 윤회를 거듭한다는 심오한 생각이 바탕에 놓여있었기에 가능한 것이다. 서정주 시인은 이런 생각을 영육불멸과 윤회 인연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는 우리의 정신적 원형으로서의 ‘신라 정신’이라 부른다. 즉, 모든 생명은 하나로 고립되어 탄생하는 것이 아니라 우주 전체와 거물망같이 연계된 인과관계에 의해 생성한다는 생각이다.
< ‘詩 창작을 위한 레시피(박현수, 울력, 2015)’에서 옮겨 적음. (2021. 5.10.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36) 시상, 만만치 않은 무게 - ① 시상, 깨달음의 요약/ 시인, 문학평론가 박현수|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