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37) 시상, 만만치 않은 무게 - ② 생사에 대한 깨달음, 「두이노의 비가」의 시작/ 시인, 문학평론가 박현수
시상, 만만치 않은 무게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maverick7401/ 두이노의 비가(제1비가) - 릴케
② 생사에 대한 깨달음, 「두이노의 비가」의 시작
시상은 이처럼 시인이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오래도록 삭혀 혼 생각이 축적되어 나타나는 것이다.
따라서 시상이 그 가치를 지니기 위해서는 한순간의 재치가 아니라
평소의 깊이 있는 생각이 바탕에 놓여야 한다.
시인들의 행사시나 학생들의 백일장 작품들이 한계를 지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가령 독일 최고의 시 중 하나로 평가 받는 릴케의 「두이노의 비가」의 시상을 보자.
내가 이렇게 소리친들, 천사의 계열 중 대체 그 누가
내 목소리를 들어줄까? 한 천사가 느닷없이
나를 가슴에 끌어안으면, 나보다 강한 그의
존재로 말미암아 나 스러지고 말 텐데, 아름다움이란
우리가 간신히 견디어내는 무서움의 시작일 뿐이므로.
―릴케, 「두이노의 비가」 부분(라이너 마리아 릴케, 김재혁 옮김, 「릴케 전집 2」(책세상, 2000, 443쪽)
이것은 1912년 하순에 시작하여 1922년 2월 26일에 완성되었다는,
10년이 넘게 걸린 대작 「두노이의 비가」라는 작품의 탄생을 가져온 구절이다.
이것은 릴케가 이탈리아 어느 후작 부인 소유의 두이노 성 절벽 아래를 산책하다가
바람결에 들려온 소리를 그대로 받아 적었다는 구절이다.
유한한 인간과 초월적인 존재인 천사의 대립을 강렬하고도 웅장하게 보여주는
이 구절은 인간 존재의 본질에 대한 릴케의 심오한 고민이 없었다면 절대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이때 천사는 인간의 한계를 극명하게 보여주는 존재이다.
릴케의 이 찬사는 이에 대해서 수많은 검토와 해설이 시도되었을 정도로
난해함과 심오함을 품고 있는 개념이다.
이 천사의 의미에 대해서는 릴케 자신의 다음과 같은 해설을 참조할 수 있다.
그렇습니다.
여기(「두이노의 비가」: 인용자)에서는,
젊은 말테가 ‘긴 학습’이라는 옳고 힘든 과정에서도 아직 이르지 못한 삶의 ‘긍정’이 이루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삶의 긍정과 죽음의 긍정은 하나라는 것이 「비가」 안에서는 입증되고 있습니다(강조는 원문의 것임. 이하 동일). 여기에서 경험되고 찬미되기로는,
다른 편을 인정하지 않고 한 편만을 인정한다는 것이 결국 모든 무한한 것을 배제하는 제한이라는 사실입니다.
죽음은 우리로부터 방향을 돌린,
우리의 빛이 미치지 않는 삶의 한 면입니다.
우리는 두 개의 제한되지 않는 영역에서 살고 있는
우리의 현존재의 가장 위대한 의식(意識)을 성취해내도록 시도해야 합니다.
그것은 두 영역으로부터 다함없이 부양되고 있는 것이기에….
진정한 삶의 형상은 두 영역에 걸쳐 있습니다.
가장 커다란 순환의 피가 두 영역을 통해서 돌고 있습니다.
하나의 이승도 없고 하나의 저승도 없으며, 커다란 통일이 있을 뿐입니다.
이 통일 안에서 우리를 뛰어넘는 존재, ‘천사들’이 살고 있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는 사랑의 문제의 상황도 그보다 더 큰 다른 반쪽만큼 확대되어
이제 비로소 완전한, 이제 비로소 온전한 세계 안에 있게 된 것입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안문영 옮김, 『두이노의 비가/오르페우스에게 바치는 소네트』(문학과지성사, 1991, 124쪽.)
이 천사의 등장은 “삶의 긍정과 죽음의 긍정은 하나”라는 릴케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승과 저승은 통일된 하나인데 우리 인간은 스스로의 한계 때문에 그런 통일을 인식하지 못하고 있으며,
이 통일을 성취하고 있는 존재가 바로 천사라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 따르면 인간은 가시적인 세계에만 집착하는 낮은 차원의 존재로서 초월적인 천사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꿈꾸어야 하는 임무를 지니는 존재가 된다.
이를 통해 릴케가 인간 존재의 근원적 한계와 가치에 대해 얼마나 고민하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바로 이런 고민을 바탕으로 앞에 제시한 웅장한 시상이 탄생한 것이다.
시상은 이처럼 만만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이런 깊이 있는 생각만이 시상이 된다고 생각하여 미리 겁내거나 주눅들 필요는 없다.
우리가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그 나름의 깊이가 있는 것이다.
다만 그것의 가치를 발견할 안목과 지식, 그리고 감각이 모자랄 뿐이다.
그래서 좋은 시인이 되기 위해서는 우선 시를 산출하는 시인의 자질을 먼저 갖추어야 한다는
부담감을 일생동안 가져야 한다.
누구나 인정하다시피 좋은 시는 절대 손끝에서 탄생하지 않기 때문이다.
< ‘詩 창작을 위한 레시피(박현수, 울력, 2015)’에서 옮겨 적음. (2021. 5.11.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37) 시상, 만만치 않은 무게 - ② 생사에 대한 깨달음, 「두이노의 비가」의 시작/ 시인, 문학평론가 박현수|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