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38) 시각적 이미지의 이모저모 - ① 시각적 이미지/ 시인 이형기
시각적 이미지의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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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시각적 이미지
세실 데이 루이스가 이미지를 ‘독자의 상상력에 호소하는 방법으로
시인의 상상력에 의해 그려진 언어의 그림’이라고 말한 것은 앞에서 이미 소개한 바 있다.
그림은 눈으로 보는 시각의 대상이다.
의미의 해석은 보고 난 다음에야 진행된다.
그러니까 그가 이미지를 ‘언어의 그림’이라고 했을 때는
그 속에 시각적 이미지를 이미지의 주종(主宗)으로 본다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고 하겠다.
물론 이미지에는 여러 종류가 있다.
시각적 이미지가 이미지의 전부는 아니다.
그러나 이미지를 말할 때,
특히 시의 표현 장치로의 이미지를 말할 때는 시각적 이미지가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된다.
왜냐하면 시각적 이미지가 다른 어떤 이미지보다도 표현 대상을 선명하고 명확하게,
즉 구체적으로 드러내주기 때문이다.
게다가 또 다른 감각, 이를테면 청각이나 촉각에 따른 사물의 지각도 거기서는
대체로 시각적 작용이 수반된다는 사실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예를 들어 ‘물소리 졸졸’이라는 청각적 지각은 ‘졸졸’ 소리를 내면서 흘러가는 물의 모양을 절로 연상케 하고,
또 ‘부드러운 머리칼’이라는 촉각적 지각은 그 부드러운 머리칼의 어떤 모양을 동시에 떠오르게 한다.
그래서 실질적으로는 시각적 이미지가 다른 이미지들을 대표한다는 의견이 나오게 된다.
현대시에서는 회화성(繪畫性)이 중시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그런 인식의 바탕으로 한다.
회화성이란 문자 그대로 그림 같은 성질이므로,
시각적 이미지를 존중하는 것이 현대시의 한 특징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주장에 동의 의부와 상관없이 현대시에 있어서는 실제로
시각적 이미지가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되고 있다.
그러면 그 시각적 이미지가 시의 표현에 어떻게 기여하고 있는지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고래가 이제 횡단한 뒤
해협이 천막처럼 퍼덕이오.
……흰 물결 피어오르는 아래로
바둑돌 자꾸자꾸 내려가고,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 종달새……
한 나절 노려보오, 움켜잡아 고 빨간 살 뺏으려고.
―정지용, 〈바다 1〉 부분
정지용의 〈바다 1〉 앞부분이다.
이 시는 여러 가지 시각적 이미지가 그야말로 그림처럼 선명하게 대상을 표현하고 있다.
그 표현 대상은 바다이다.
아니, 그 바다의 어떤 부분이 시인의 개성적인 눈에 비쳐진 모습이다.
시의 첫머리에 나오는 ‘고래’는 여객선을 비유하는 말이고,
‘천막처럼 퍼덕이는 해협’은 그 여객선이 지나간 다음 육중하게 나부라지는 파도를 이미지화한 것이다.
그리고 그다음 구절은 이 시의 화자가 그 여객선의 갑판 위에서 거품이 이는 물결을
내려다보고 있다고 생각하면 이해하기 쉽다.
‘피어오르는 흰 물결’이 그 거품인데, 뽀글뽀글 솟는 것처럼 보이는 거품을
이번에는 또 아래로 계속 떨어져 내려가는 하얀 ‘바둑돌’로 이미지화하고 있다.
햐얀 바둑돌, 즉 물거품은 다시 발전하여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 종달새’가 되고 있다.
바다 종달새는 실재하지 않는 새이다.
뽀글뽀글 피어오르는 물거품에서 연거푸 아래로 가라앉는 바둑돌을 연상한,
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이미지의 새인 것이다.
떠오르는 모양이 ‘은방울 날리듯’하므로 이 바다 종달새는 은방울처럼 작고 하얀 새이다.
실재하지 않는 바다 종달새의 겉모양을 이처럼 선명하게,
눈으로 볼 수 있게 만든 시인은 거기서 다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설령 이 바다 종달새가 실재한다고 하더라도 결코 보일 리 없는 살의 색깔까지 독자에게 알려주는 것이다.
‘한나절 노려보오, 움켜잡아 고 빨간 살 뺏으려고’라는 구절이 그렇다.
그러니까 화자가 ‘고래’인 여객선의 갑판 위에서 자꾸자꾸 아래로 내려가는 바둑돌,
즉 ‘은방울 날리듯 떠오르는 바다 종달새’를 한동안 지켜보고 있는 것은
그중의 몇 마리든 움켜잡아 그것들의 ‘빨간 살’을 뺏기 위함이다.
여기서 우리는 이 시의 표현 대상인 바다의 그 어떤 부분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 수 있게 된다.
그것은 바로 항해하는 여객선의 뱃전에 피어오르는 물거품이다.
그 물거품을 바둑돌과 바다 종달새로 이미지화시킨 것에 이 시의 핵심적인 매력 포인트가 있다.
그것들은 물론 모두가 ‘눈’이라는 감각기관을 통해 알아볼 수 있는 시각적 이미지이며,
언어로 그린 그림이다.
그리고 우리는 그 그림을 그려낸 원동력이 시인의 상상력이라는 사실을 다시 확인하게 된다.
여객선이 고래가 되고,
물거품이 바둑돌과 바다 종달새가 되는 것은 상상력의 작용에 따른 사물의 허구적 변용이 아닐 수 없다.
피아노에 앉은
여자의 두 손에서는
끊임없이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신선한 물고기가
튀는 빛의 꼬리를 물고
쏟아진다.
―전봉건, 〈피아노〉 부분
전봉건의 시 〈피아노〉의 1연이다.
이 시에서도 우리는 언어로 그린 그림 한 폭을 보게 된다.
그 그림에는 열 마리씩 스무 마리씩 끊임없이 빛의 꼬리를 물고 튀는 물고기가 그려져 있다.
그리고 제목인 ‘피아노’와 결부시킬 때 그 물고기는 피아노를 치는 여자의 날렵하게 움직이는 손가락이며,
동시에 그 연주가 만들어내는 선율이라는 것을 우리는 이해할 수 있다.
소리는 들리는 것이지 보이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이 시의 ‘물고기’는 보이지 않는 그 소리까지도 보이는 것으로 바꿔놓고 있다.
시에서 시각적 이미지는 이처럼 놀라운 표현 효과를 거두는 것이다.
<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5.12.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38) 시각적 이미지의 이모저모 - ① 시각적 이미지/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