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40) 시각적 이미지의 이모저모 - ③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시인 이형기제목없음
시각적 이미지의 이모저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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③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시각적 이미지 중에는 현실 공간에 존재하지 않는 추상적 관념에 모양과 색깔을 부여하여
그것을 구체화시킨 것도 있다.
그리고 같은 감각이라도 모양이나 색깔을 가질 리 없는 감각적 지각을 눈으로 볼 수 있게 바꿔놓은 것도 있다.
말하자면,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만드는 것이다.
‘시인은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사람’이란 말이 있다.
모양이나 색깔을 갖지 않은 대상에 모양과 색깔을 부여한 어떤 종류의 시각적 이미지는
그 말을 피부로 실감할 수 있게 해준다.
저 재를 넘어가는 저녁 해의 엷은 광선들이 섭섭해합니다.
어머니, 아직 촛불을 켜지 말으셔요.
그리고 나의 작은 명상의 새 새끼들이
지금도 저 푸른 하늘에서 날고 있지 않습니까?
이윽고 하늘이 능금처럼 붉어질 때
그 새 새끼들은 어둠과 함께 돌아온다 합니다.
―신석정, 〈아직은 촛불을 켤 때가 아닙니다〉 부분
이 시에서는 추상적인 관념인 ‘명상’이 ‘새 새끼들’로 이미지화되어 있다.
물론 그것은 모양과 색깔이 있는 시각적 이미지이다.
새 새끼들은 작고 귀엽다.
그리고 하늘을 자유롭게 난다.
따라서 이 ‘새 새끼들’의 이미지는 화자의 명상이 바로 그 새 새끼들처럼
작고 귀여우면서도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성질의 것임을 알려주고 있다.
타지 않는 저녁 하늘을
가벼운 병처럼 스쳐 흐르는 시장기
어쩌면 몹시두 아름다워라
앞이건 뒤건 내 가차이 모올래 오시이소
눈감고 모란을 보는 것이요
눈감고
모란을 보는 것이요
―이용악, 〈집〉 부분
이것은 이용악의 시 〈집〉의 3연과 4연이다.
이 시는 ‘시장기’를 ‘모란’으로 이미지화하고 있다.
표현할 수 없는 시장기를 눈으로 볼 수 있는 모란으로 바꿔놓았으니
과연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시인의 능력에 감탄하지 않을 수 없다.
더구나 그 모란은 눈을 감고 보는 것이다.
눈을 감으면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 상식이다.
그러나 우리는 눈을 감고 상상의 날개를 펼치면 떠나온 고향 산천이나
그 옛날 헤어진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는 경험을 하곤 한다.
이 시의 화자가 눈을 감고 보는 모란은 그러한 상상의 스크린에 비친 이미지이다.
그리고 그 모란은 또한 저녁때의 가볍기는 하지만 ‘병처럼 스쳐 흐르는 시장기’를 이미지화한 것이므로
단지 아름답다는 느낌에만 그치지 않고 비감한 느낌을 자아낸다.
달리 말하면 그것은 비극적 황홀감이라고 할 수 있는 느낌인 것이다.
나의 심장 앞에서
나의 불을 지키는 피의 사냥개
내 비참의 교외(郊外)에서
쓴 콩밭을 먹고사는 개
너의 혀의 젖은 불꽃으로
내 땀의 소금을 핥아라
내 몸속의 피의 사냥개
내게서 도망치는 꿈을 잡아라
흰 망령들에게 짖고 대들어라
나의 영양(羚羊)을 모두
우리 안으로 되불러 오라
그리고 나의 도망치기 쉬운 천사의 발꿈치를 물어라
―이반 골, 〈피의 사냥개〉 전문
이반 골은 독일인이지만 가정에서 프랑스어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독일어와 프랑스어로 시를 썼다.
그는 1950년에 백혈병으로 사망했는데,
이 시는 그가 병상에서 쓴 작품이다. 제목에 나오는 그리고
이 시의 중심 이미지인 ‘피의 사냥개’는 영어의 ‘bloodhound’, 즉 피 냄새를 맡고
야수를 추적하는 습성이 있는 개를 가리킨다.
백혈병에 걸린 그는 자기 몸속에 적혈구를 먹는 개가 있다는 환상을 가지고 있었다.
일종의 강박관념과도 같은 그 환상을 바탕으로 만들어낸 이미지가 ‘피의 사냥개’이다.
그러나 이 시에서는 피의 사냥개가 도망치는 꿈을 붙잡고,
망령들에게 대들고, 영양을 되불러오는, 말하자면 자기 생명의 수호자로 묘사되어 있다.
그것은 그것대로 의미가 있지만 여기서는 눈에 보이지 않는 백혈병,
아니 백혈병에 대한 절망감을 그가 ‘피의 사냥개’라는 가시적인 대상으로
이미지화시킨 점부터 먼저 주목해주기 바란다.
‘피의 사냥개’는 가시적인 대상이므로, 시각적 이미지이다.
그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게 했다는 것은 그 자체가
이미 시각적 이미지의 표현에 대한 기여를 입증한다. 보이지 않는 것,
막연한 것, 모호한 것을 볼 수 있게,
또 명확하고 선명하게 그려낼수록 그 표현은 훌륭하다고 할 수 있다.
< ‘누구나 좋은 시를 쓸 수 있다!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 5.14.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40) 시각적 이미지의 이모저모 - ③ 보이지 않는 것을 보이는 것으로/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