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노애락 喜怒哀樂, 하나님이 인간에게 주신 아름다운
삶의 선물이다. 어느 인생이든 희노애락은 공통적으로
받아 삶을 누리고 산다. 가끔 "그 사람은 슬픔이나 고생없이
잘 사는 사람" 이라고 이구동성으로 부러움을 사기도 하지만
사실 그 내면에는 우리가 모르는 눈물이 흐르고 고난의 쓴뿌리가
박혀있다는 것을 감지한다. 반면에 "저 사람은 이렇게 저주스런
삶을 살고 있으니 얼마나 불행할까"라고 생각했는데 알고보니
그는 심지가 굳고 깊고 인생의 참 맛을 느끼며 사는 사람인걸
몰랐던 것이다. 애
그러나 인생은 희노애락을 한올도 빠짐없이 그걸 다 가지고
살아간다. 최근에 주변에 별세하신 분들이 많아 마음이 우울
한 시간을 보냈다. 나의 두번째 아버지이신 장인 어르신이
99세의 나이로 주님의 품에 안기셨다. 지난 11월말에 서울엘
다녀가셨는데 이렇게 빨리 곁을 계속 주시지 않고 떠나셨다.
하나님 나라에 가시기 일주일 전에 우리부부는 영상으로
아버님의 권면과 축복을 받았다. "박목사, 나이들었으니 건강
주의하고 목회에 마음을 다하고 항상 행복하길 바래요" 이;
멘트는 아버님이 십수년을 똑같이 해주신 말씀이다.
나는 장인과 장모님의 사랑과 격려 그리고 중보해주신 기도로
이렇게 사역을 하고 있는 목사라고 자부한다. 나의 부모님이
일찍 별세하셨기에 더더욱 나는 장인과 장모님과 신앙이야기와
교회이야기 그리고 인생이야기를 나누며 배웠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영생교회에서 장례식이 열리는 시간에
아내는 세브란스에서 수술을 하는 시간이었다. 맏사위로서
마땅히 참석해야 하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다. 그곳에 있는
처남(심수목장로의 부부와 가족) 이 수고했고 서울에서
장례식을 위해 가족들과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참석을 했다.
김재원아나운서가 쓴 책에 "엄마의 얼굴"이란 책에서 그의
나이 13살 때 어머니가 천국으로 가셨다. 그는 그의 글에서
어머니를 생각하며 애도하지 못한 것에 대한 회한과 이제 나이
들어 어머니를 회상하며 충분한 애도를 가져야 함을 피력했다.
우리시대의 비극이라 할까? 애도라는 말이 사라졌다.
하나님은 인간에게 슬픔이란 인생에 소중하고 아름다운 선물을
주셨다. 인간이 슬픔을 알지 못하고 슬퍼할 줄 모른다면
그 인생이 얼마나 삭막할까? 사람이라 할 수 없다. 그런데
슬픔을 무시하고 눈물흘리는 그 깊은 인간의 정서를 무시하고
그걸 부끄럽게 생각하거나 창피한 것처럼 여기는 것은 인간
상실의 한 단면이 아닐까 한다. 이건 어디까지나 나의 생각
이지만 사랑하는 자녀들에게 애도와 눈물, 그리고 슬픔이란
것을 가르쳐 주어야 한다. 함께 우는 법을 배워줘야 한다.
장례란
고인을 추모하며 슬퍼하고 그래서 서로 위로하는 예식이다.
장례에 웃음이 있을 수 없다. 오래 잘사셨고 누릴 것 다 누리
셨으니 슬퍼할 일 아니라고 하면서 죽음에 무지한 이들이 있다.
특히 그리스도인들가운데 그런 이들이 많다. 천국에 가셨는데
너무 슬퍼하지 마시라고 그걸 위로라고 한다. 그러면 안된다.
혹여 충분히 그럴만한 가정의 장례식이고 더욱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부활의 소망을 가졌기에 잔치집처럼 웃을만한 가정이라도
서울모자이크교회의 성도들은 그런 태도를 주의하고 조심해야
한다. 주님은 슬퍼하는 자들과 함께 슬퍼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했다.
아브라함은 아내 사라가 127세를 살고 세상을 떠날 때에 죽은
아내를 생각하고 애도했다. 창23:1-2을 보면 아브라함이 아내
사라의 시신앞에서 애도하며 슬퍼하고 애통했다.
아내가 퇴원을 했다. 이제 몸이 좀 나아지면 아내와 함께 임진각
에 가서 북한 땅을 바라보며 아버지를 추억하고 애도하고자
한다. 아버님은 고향이 평양이신데 두분 모두 어머니를 북한에
두고 오셨기에 명절이 되면 임진각을 찾아 고향의 부모님을
그리며 한참을 눈물짓다 오신 분들이시다. 두분 모두 미국
필라델피아에 묻혔지만 평생 잊지 못하셨던 저 북녘땅을
살아있는 우리가 그 곳을 바라보며 옛날 그리워하시던 북녘
하늘과 산을 보며 애도의 시간을 갖고자 한다. 아내가
미국에서 장례식 사진을 처남이 보내왔는데 사진 끝에
딱 한마디 글을 남겼다. " 아, 아버지!" 라고.
ㄹㅊㅊ