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42) 역설, 논리적으로 모순되게 쓰자 - ① 역설의 역사/ 시인 공광규
역설, 논리적으로 모순되게 쓰자
Daum블로그 http://blog.daum.net/tehlio/ 역설의 미학
역설(패러독스)은 상식적으로 모순되나 실질적으로는 진리를 나타내는 말입니다.
‘펜이 칼보다 강하다’, ‘지는 것이 이기는 것이다.’라는 말을 흔히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 터무니없는 말이지만 정작 인간을 움직이는 것은 사상이고 이념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펜이 칼보다 강한 것은 진실이 되는 것입니다.
역설의 가장 큰 특징은 그 표현이 문법적 형태로는 옳은 구조를 가지고 있지만
일차적 의미로는 뜻이 모순되어 통하지 않는다는 점입니다.
“소리없는 아우성”, “찬란한 슬픔의 봄”, “정작으로 고와서 서러워라” 등이 대표적인 예입니다.
논리적으로는 문장이 모순되지만 내면적으로는 깊은 의미가 생겨나면서 시적 울림을 형성하게 됩니다.
역설과 반어는 상반된 모순을 이용한다는 점에서 유사하지만,
반어는 내적 의미를 반대로 표현한 것이고 역설은 내적 의미와 외적 의미의 모순을 직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다릅니다.
한국문학에서 역설의 기법을 가장 효과적으로 사용한 시인은 한용운입니다.
(『100년의 문학용어사전』, 758~759쪽 참조)
역설은 오래전부터 시의 방법으로 사용되었습니다.
그러나 일상에서 쓰는 역설은 이미 관용구가 되어 신선미와 경이감이 떨어집니다.
역설에는 발견과 충격이 개입하고 상상력의 작용이 있어야 합니다.
① 역설의 역사
역설은 반어(아이러니)와 함께 고대 동양은 물론 그리스에서 수사학적 용어로 이미 사용되어왔으며,
19세기 낭만주의 시대에는 반어와 혼동되어 사용되었습니다.
20세기 신비평가인 브룩스는 “시는 은유와 역설로 구성된다.”고 하였습니다.
역설은 노자의 “바른말은 얼른 보기에 반대인 것처럼 보인다.”와 같은 진술입니다.
반어의 경우 진술 자체에는 모순이 없으나 진술된 언어와 이것이 지시하는 대상이나 숨겨진 의미 사이에
모순이 생기는 반면 역설은 진술 자체에 모순이 생기는 것입니다.
선시에 나타난 언어의 비약과 파격의 수사법은 역설과 유사합니다.
언어당착적인 모순어법을 사용하여 깨달음의 세계를 글로 표시하기 때문입니다.
선시적 표현기법의 모범은 아무래도 역설이며 언어당착입니다.
뙤약볕 속 찬 서리 구슬을 맺고
쇠나무에 핀 꽃 광명을 자랑한다
진흙소 포효 소리 바닷속 달리고
바람에 우는 나무말, 도의 길을 가득 채운다
17세기에 살았던 하백 명조라는 스님의 선시입니다.
뙤약볕 속에서 찬 서리가 내릴 리 없고, 쇠가 나무가 될 수도 없으며, 꽃이 필 리가 없습니다.
또 진흙으로 만든 소가 어떻게 울겠습니까.
거기다 진흙으로 만든 소가 바닷속으로 들어가기란 불가능합니다.
진흙은 물속에서 금방 녹아버릴 테니까요.
또 나무로 만든 말은 울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처럼 선시는 불가능한 사실의 열거를 통해 초월적 은유를 하는 것입니다.
모순어법은 시에 재미를 줍니다.
모순어법이라는 것은 언어당착입니다.
모순된 표현으로 서로 다른 두 세계를 동질화시키는 것이지요.
이런 어법은 시적 대상에 상상력의 자유와 초월적 인식을 보여줍니다.
휠라이트는 표층적 역설, 심층적 역설, 시적 역설로 분류하기도 합니다.
표층적 역설은 “차가운 불”, “병든 건강”, “사랑의 증오” 등이 해당됩니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나의 봄을 기둘리고 있을 테요
모란이 뚝뚝 떨어져버린 날
나는 비로소 봄을 여휜 서름에 잠길 테요
오월 어느 날 그 하로 무덥던 날
떠러져 누운 꽃잎마져 시들어버리고는
천지에 모란은 자취도 없어지고
삐쳐오르던 내 보람 서운케 무너졌으니
모란이 지고 말면 그뿐 내 한해는 다 가고 말아
삼백 예순날 하냥 섭섭해 우옵네다
모란이 피기까지는
나는 아즉 기둘리고 있을 테요 찬란한 슬픔의 봄을
―김영랑, 「모란이 피기까지는」 전문
“찬란한 슬픔”은 모순어법으로 휠라이트의 표층적 역설에 해당합니다.
모순어법은 일상 언어용법에서는 모순되는 두 용어의 결합 형태로 수식어와 피수식어 사이의 모순입니다.
위 시에서 밑줄의 “찬란한 슬픔”은 수식어와 피수식어가 모순관계로 결합되어 있는 역설의 한 형태입니다.
모순어법은 유치환의 「깃발」에서도 보여집니다.
이것은 소리없는 아우성
저 푸른 해원을 향하야 흔드는
영원한 노스탈쟈의 손수건
순정은 물결같이 바람에 나부끼고
오로지 맑고 곧은 이념의 푯대 끝에
애수는 백로처럼 날개를 펴다.
아아 누구던가
이렇게 슬프고도 애닯은 마음을
맨 처음 공중에 달 줄을 안 그는.
―유치환, 「깃발」 전문
위 시에서 밑줄의 “소리없는 아우성” 역시 표층적 역설인 모순어법입니다.
수식어인 “소리없는”과 피수식어 “아우성”는 서로 모순이 됩니다.
이런 모순어법은 우리의 일상적 지각이나 상식을 파괴합니다.
그래서 보다 효과적으로 작중 의지를 전달합니다.
표층적 역설이 시행에 나타나는 부분적인 역설이라면 시적 역설은 시의 구조 전체에 나타나는 역설입니다.
시적 역설은 진술 자체가 앞뒤 모순되는 것이 아니라 진술과 이것이 가리키는 상황 사이에
명백한 모순이 나타나는 경우입니다.
이 모순은 모순이 아니라 진리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부서지지 않으면
안 된다 밀알이여!
고운 흙이
고운 청자를 빚듯
가루가 되지 않고서는 이루어지지 않는
빵,
한때 투명했던 이성과 타는 욕망도
고독의 절정에서는 소멸된다.
가장 내밀한 정신의 깊이로
화해되는 물과 불,
빵은 스스로
자신의 이념을 포기하는 까닭에
타인을 사랑할 줄 안다.
마음이 가난한 자의 식탁 위에
외롭게 올려진
한 덩이의 빵.
―오세영, 「빵」 전문
교훈적 감동을 주는 시들은 대부분 역설적 기법을 사용합니다.
상식을 벗어나는 역설이 오히려 실재의 비밀을 드러내어 일상적 삶에 지친 우리에게
지혜와 위안을 주기 때문입니다.
위 시는 존재론적 역설을 보여주는 시입니다.
밀알이 부서져야만 인간에게 요긴한 빵을 만들 수 있다는 역설입니다.
흙은 가루가 되어 청자를 빚고, 빵은 이념을 포기해 사랑이 된다고 합니다.
그날 아버지는 일곱 시 기차를 타고 금촌으로 떠났고
여동생은 아홉 시에 학교로 갔다 그날 어머니의 낡은
다리는 퉁퉁 부어 올랐고 나는 신문사로 가서 하루종일
노닥거렸다 전방은 무사했고 세상은 완벽했다 없는 것이
없었다 그날 역전에는 대낮부터 창녀들이 서성거렸고
몇 년 후에 창녀가 될 애들은 집일을 도우거나 어린
동생을 돌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미수금 회수 관계로
사장과 다투었고 여동생은 애인과 함께 음악회에 갔다
그날 퇴근길에 나는 부츠 신은 멋진 여자를 보았고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면 죽일 수도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태연한 나무 위로 날아오르는 것은 다 새가
아니었다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사내들이 자기 하늘까지
무너뜨리는 것을 나는 보았다 새점 치는 노인과 변통의
다정함을 그날 몇 건의 교통사고로 몇 사람이
죽었고 그날 시내 술집과 여관은 여전히 붐볐지만
아무도 그날의 신음소리를 듣지 못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
―이성복, 「그날」 전문
밑줄 친 “모두가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았다”는 부분이 역설입니다.
모두가 병들었다면 당연히 아파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자기가 병들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들은 아프지 않으며 아프다는 감각도 없습니다.
「그날」에 나오는 모든 시적 정황은 아프다는 감각을 잃고 있는
우리 삶의 한 국면을 암시적으로 열거해놓은 것입니다.
또 전방은 무사하고 세상은 완벽하고 없는 것이 없는데도 대낮에 창녀들이 서성거리고
장래에 창녀가 될 애들마저 병들었음을 모른 채 집일을 돕습니다.
모두 병들었는데 아무도 아프지 않은 현실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시입니다.
< ‘이야기가 있는 시 창작수업(공광규, 시인동네, 2018)’에서 옮겨 적음. (2021. 5.16.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42) 역설, 논리적으로 모순되게 쓰자 - ① 역설의 역사/ 시인 공광규|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