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알로 배알로/ 고미선
햇볕이 따스하다. 카페에 앉아 따끈한 커피 한 잔을 주문하였다. 바다를 향하여 탁 트인 유리창을 마주하고 앉았다. 용암이 흐르다 점점이 굳어진 자리는 원담으로 남아 있다. 밀물 때에 원담 안에서 노닐던 어린 물고기는 썰물이 되면 나가지 못한다. 용암이 굳어져 원시 어로작업의 근간이 되었다. 멀리 보이는 수평선이 속눈썹처럼 또렷하다. 물결에 걸쳐진 햇빛도 금빛으로 보인다. 저 바다를 건너면 어디에 도착할까. 잔잔한 파스텔 톤의 바다가 무언가를 생각나게 한다.
이 카페는 지난해에 원형 건물로 지어졌다. 시야의 반경이 200도는 되게 꺾여 있다. 남국의 정취를 느낄 수 있게 야자수 몇 그루도 심었고 화산석도 옮겨왔다. 입구에는 송이석으로 된 큰 물고기 한 마리와 작은 물고기 두 마리가 인상적이다. 주인의 깊은 뜻은 무엇이려나.
커피 한 모금을 마셨다. 갑자기 유리창 너머 바다에는 화살표 솟대처럼 잠겼다가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여러 개가 움직인다. 내 눈을 의심했다. 어머나, 이곳에서 보다니. 돌고래가 바다에서 관객을 향하여 놀이하고 있다.
영상물에서 보았던 돌고래가 잊히지 않는다. 이십여 마리가 수중발레를 하듯 가운데 한 마리가 하얀 배를 드러내며 뒤집어지는 광경이 거듭된다. 물 밖에서 호흡하도록 여러 마리가 힘을 모아들어 올리면 뒤집어지고, 연속이다. 돌고래는 인공호흡을 시킬 때 저런 행동일까. 돌고래쇼장에 앉은 느낌이다, 외할머니가 들려주던 돌고래 이야기가 생각났다.
열 살 무렵이다. 친정엄마는 보릿고개 시절 모자란 식량을 얻으려고 나를 외가에 자주 보냈다. 토요일 오후 한 시간 반 동안 완행버스를 타면 어스름 즈음에야 모슬포에 도착한다. 동네 어귀에 이르면 굴뚝에서 피어오르는 연기와 아이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외할머니를 부르자 “천안이 ᄄᆞᆯ 와시냐?(천안이 딸 왔느냐?)”라며 아궁이에 불쏘시개를 넣다가 반긴다. 가까이 앉게 하고 “어멍(엄마) 이름 지어진 이유를 알암시냐?” 하셨다.
큰할아버지와 외할아버지는 마당이 넓고 백 년이 넘은 기와집에 살았다. 일제 강점기 때 공출에 시달리자 해녀였던 외할머니와 몇몇 사람은 원정물질을 떠났다. 원산 앞바다까지 외할아버지가 운영하던 풍선(風船)을 타고 갔다. 큰외삼촌은 큰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날 수밖에 없다. 제주해협에서 동해안을 거쳐 독도에서도 물질하였다. 흔히 제주에서는 독도가 머정(해산물이 많은 장소. 재수 있는 곳)이 좋아서 갈 수만 있다면 돈도 벌고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한 팀을 이루어 장기간 물질을 하는데 먹이가 풍부한 바다에 이르면 고래가 나타났다. 사람은 “배알로~ 배알로~(배아래로)”를 외쳐 댄다. 멸치 떼를 쫓아 고래가 나타나면 뒤이어 상어까지 꼬리를 문다. 고래는 접영의 능사여서 올라오는 순간 고래등으로 배 밑바닥을 치면 배가 풍비박산되어 상어의 밥이 되어 버린다. 배에 탄 사람은 있는 힘을 다하여 “배알로~ 배알로~”를 외쳤다. 고래는 알아듣는 주파수가 특이하여 사람의 말을 잘 알아들었다.
해녀는 짧은 소중이 해녀복을 입고 물질하여서 상군이라야 깊은 바다의 해산물을 캤다. 검정 속곳은 무명옷이었다. 하얀 적삼은 바닷속에서도 작업상황을 분별하기 위한 조상의 지혜이다. 해초를 캐내어 망사리에 가득 담아 힘겹게 올라왔다. 미역과 우뭇가사리와 소라 전복을 담았다. 전복을 따기 위하여 허리춤에 찬 비창은 끈을 매달아서 바닥에 놓치는 일을 방지했다. 기어가는 물체를 보며 쫓아가다 한숨에 집어넣어 들어내야 전복을 잡았다. 옛날에도 전복을 떼야 돈이 되었다. 소라 문어 성게도 계절에 따라 돈으로 환산하는데 최고다. 허벅지를 드러내고 종아리는 차가운 바닷물에서 몇 번이나 쥐가 나기도 했다. 발을 붙잡고 물 위로 박차고 올라와 아픈 종아리도 풀어내야 했다.
불턱에 앉아 꽁꽁 언 몸을 녹인다. 바닷속에서 겪은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물속에서 바위틈새에 붙어 있던 전복을 떼어내다 숨이 차자 물숨 아끼려고 올라왔다. 숨비소리 내고 다시 내려갔더니 전복은 그 자리에 없고 도망갔더란 말도 했다. 소중이 입고 물질하면 여름에 더워도 바닷바람이 실어 갔다. 겨울에는 날씨가 좋지 않아 며칠 일을 할 수가 없다. 수많은 해산물 채취를 위하여 경험자의 체험담을 들으면 그날만큼은 대 수확의 꿈을 안고 상상의 나래를 편다.
해녀가 작업하면서 숨비소리를 잘 내뱉어야 살 수 있듯이 고래도 수액거리는 주파수를 잘 던져야 한다. 고래는 사람인 듯 해녀를 많이 닮았다. 물 위로 올라 왔다가 잠시 숨 고르는 것도 사람을 빼닮았다. 신호로 보냈던 주파수는 살기 위한 몸부림이었고 오케스트라에서 연주되는 교향곡이었다.
고래는 사람을 헤치지 않고 같이 유영을 하면서 해녀를 보호해 주었다. 호시탐탐 노리던 상어 떼의 습격을 받으면 난감했다. 짧은 소중이 해녀복이었으니 맨살에 상처는 치명적이다. 상어가 피비린내를 맡으면 떼를 지어 몰려오기에 해녀는 살아남지 못한다. 있는 힘을 다하며 해녀는 빠져나오고 돌고래는 방패막이가 되어주었다.
깊은 바다의 머정도 상군해녀는 잘 찾아내었다. 작업도 썰물에 들어서 물 봉봉 든(만조) 밀물에 나오는 이치도 물살에 거슬리지 않은 그들만의 지혜였다. 나올 때 는데래기(끈적끈적한 해초)를 밟지 않으려고 바닷돌 사이를 잘 살핀다. 미끄러워 뒤로 넘어지면 사고로 이어지니 상군해녀는 살아가는 지혜를 불턱에 앉아 알려주었다. 대장 상군은 해녀속담을 들먹이며 “물 숨은 골라 맥인다.(물질을 하다 보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다.) 물 숨 애끼라.(물 숨은 여유를 두어라.)”하며 물 숨을 경외 시 하지 않았다. 조금 깊은 수심에서 작업하면 귀가 멍멍해질 때도 많았다. 귀가 멍멍해짐이 잦아지자 목소리도 조금씩 커졌다.
거우쟁이(해녀의 긴 팔다리)가 긴 해녀는 상군의 조건이었다. 돈짓당(신당)은 그들만의 무사고를 염원하는 바람의 장소였다. 궂은비와 눈보라에도 굴하지 않고 가족을 생각하였다. 소지를 사르고 방생하며 용왕님께 창호지에 싼 맷밥을 던지며 이기보다는 이타에 기도 했다. 물찌와 날짜를 정하여 머정에 재수 좋게 해달라고 빌고 생로병사의 근간도 신이 관장했다.
고래는 바다의 왕이었다. 동료 고래를 죽이지 않고 순진함을 팔지 않아도 왕이 되었다. 다른 고래도 인정하면서 혼자 약육강식하지 않아도 왕이었다.
고래의 손과 발도 사람을 닮아 뼈가 다섯 개씩 있다. 진화론에서 보듯 사용하지 않는 부분은 후퇴되어 퇴화해 버렸는지 모른다.
제주와 독도 해녀는 닮은 점이 많다. 아리따운 아기 해녀에서 혼기 전의 해녀가 무작정 따라나섰으리라. 독도 물질 갔다가 눌러앉은 오도 가도 못하는 정착민도 있다. 울릉도와 독도 여행 중에 홍합밥을 맛있게 해준 사람은 제주 언어를 사용하는 출항 해녀였다.
외할아버지는 외할머니가 해산달이 되어가자 육로로 고향 제주로 내려가라 하였다. 임신한 줄 모르고 봄 물질에 떠났다가 배가 불러오자 알았다. 원산에서 천안에 이르자 갑작스레 몸을 풀었다. 1931년 10월이다. 친정엄마 이름도 천안에서 출생하였다 하여 이천안(李天安)이다. 외할아버지는 풍선으로 제주에 오고 외할머니는 동네 여인과 한 달 동안 몸조리하다 내려왔다고 말해주었다.
바닷속의 덩치가 큰 동물도 죽음을 앞두고는 바다로 돌아간다. 남은 종족 보존을 위하여 죽어서도 먹이가 되며 깊은 바다에 무덤이 된다는 말을 들었다. 동물에게도 삶과 죽음이 공존했다.
지금은 외할머니와 친정엄마의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제물을 바치며 저승길마저 오락가락 한 적은 어디 한두 번인가. 칠성판을 등에 지고 명정포 날리던 일도 가족을 위해 단순하고 정직한 마음이 있었다. 두 분이 얘기 나누던 모습이 엊그제 같은데 똑같은 여든여덟의 나이에 바닷속에 혼이 박혔나 보다.
고래와 인간은 죽음과 삶이 우주의 커다란 그물이다. 인생은 그 위에 달려있는 구슬이다. 멀리서 서로 비추어서 하나의 장엄한 세계를 형성한 것이다.
카페 옥상으로 올라갔다. 둥근 건물에 계단도 가운데로 뚫으니 한 마리 물고기가 되었다. 야외 테이블에 앉았다. 마치 내가 배에 타서 망망대해를 순항하는 듯하다. 이종 동생의 어머니까지 상군해녀인 지금, 조상의 얼을 되새기고자 이곳에 문을 열었다. 차광막을 드리우니 외할아버지가 탔던 풍선(風船)이 되었다. 내가 탄 이 배 밑에도 고래가 줄을 이어 사람들이 “배알로~ 배알로~‘를 외치는 듯하다. 풍어의 꿈을 안고 달린다. 윤슬이 곱다. 끝(독도문예대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