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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언덕 밑 정동길엔 근대사가 숨쉰다
서울 도심 한가운데 시간이 멈춘 듯한 곳이 있다.
정동이다.
주변 고층 건물과 대조적으로 돌담과 낮은 건물이 만들어내는 거리의 풍경은 다른 세상에 온 듯한 느낌을 준다.
첫 신식학교, 첫 개신교회 등의 서양 문물이 '상륙'했던 정동에는 우리 근대사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정동(貞洞)은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씨의 정릉이 있었던 곳이다.
당시엔 정릉동이었다.
태조의 아들 태종은 신덕왕후의 묘를 사대문 밖인 경기도 양주(현재의 성북구 정릉)로 옮겼다.
능이 떠난 동네는 이름 또한 정동이 됐다.
정동은 당쟁의 출발점인 서인(西人)과 동인(東人)의 기원이기도 했다.
도성 서쪽인 서대문 가까이 정동에 살던 심의겸으로 인해 서인, 서울 동쪽 건천동(현 충무로)에 살던 김효원으로 인해 동인이란 명칭이 생겼다.
당쟁은 조선 중후기 300년을 성리학 이데올로기를 명분으로 내세운 권력투쟁으로 물들였다.
임진왜란 당시 의주로 피난을 갔다 돌아온 선조는 정동, 현재의 덕수궁 자리에 머물렀다.
경복궁, 창덕궁은 모두 불에 타 선조는 갈 곳이 없었다.
성종의 형 월산대군의 집은 일본군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의 군대가 점령해 머물렀기에 온전했다.
선조는 여기서 머물다 서거했다.
광해군이 창덕궁을 새로 지어 옮겨간 뒤에는 ‘경운궁’으로 불렸다.
그 뒤 광해군에 의해 폐비가 된 선조의 계비 인목대비(1584~1632)가 유폐돼 생활했고, 광해군을 내쫓은 인조가 광해군처럼 여기서 즉위했다.
1876년 일본과 체결된 ‘강화도조약’ 이후 서구 세력들이 물밀듯 조선에 들어왔다.
1883년 미국 초대 공사 푸트(L.H.Foote, 1826~1913) 일행이 정동 안에 있던 집들을 사들여 미국공사관으로 사용했다.
이후 영국 공사관(1884년), 러시아 공사관(1885년), 프랑스 공사관(1889년), 독일 영사관(1991년), 벨기에 영사관(1901년)이 줄줄이 터를 잡았다.
정동은 구한 말 조선 땅에서 가장 서구화된 땅이었다.
이들 외교관의 모임 장소인 외교관구락부 역시 정동에 자리 잡았다(1884년).
명성황후가 일본에 의해 시해된 뒤 경복궁 건청궁에서 러시아 공사관으로 옮기는 아관파천으로 1년 남짓 러시아 공사관에 머문 고종은 경복궁으로 돌아가지 않고 가까이에 있는 경운궁을 주궁으로 썼다.
정동은 대한제국 정치 권력의 심장부요, 치열한 외교의 각축장이 됐다.
경운궁(慶運宮)은 왕위에서 물러난 고종이 머무를 때부터 현재의 명칭인 덕수궁(德壽宮)이 됐다.
정동 나들이는 지하철 1호선과 2호선이 지나는 시청역 3번 출구 옆 서울도시건축전시관에서 시작한다.
1. 서울도시건축전시관
고종의 후궁이자 영친왕의 생모인 순헌황귀비의 사당의 장소였다.
일제 강점기엔 조선총독부 체신국 건물(조선체신사업회관) 터였다.
1937년 조선총독부가 체신국 청사를 건축하면서 덕수궁과 성공회성당, 현재의 서울광장으로 이어지는 흐름이 막혔다.
이후 국세청 별관으로 사용했다.
광복 70주년이던 2015년 역사성 회복의 일환으로 일제 강점기의 옛 건물을 철거키로 하면서 이 장소에는 2019년 서울시의 도시건축전시관이 들어섰다.
옥상은 ‘서울마루’라는 이름으로 개방돼 있다.
2. 서울시의회(옛 부민관)
서울도시건축전시관 바로 오른쪽은 현재는 서울시의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
일제강점기 때인 1935년 12월 ‘부민관’이라는 공연시설로 지어졌다.
광복 이후 군정청과 국립극장으로 사용됐고, 1954년부터는 국회의사당으로 쓰였다. 국회의사당이 1975년 여의도로 옮겨가면서 1976년부터 1991년까지는 세종문화회관 별관으로 시행됐다.
1991년 지방자치 제도가 시행되면서 서울시의회 본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3.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
서울시의회 본관 왼쪽, 서울도시건축전시관 바로 뒤가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이다.
여기서부터 '작은 영국'이다.
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 영국대사관과 대사관저, 구세군중앙회관까지 죽 이어져 있다.
영국 국교인 성공회(聖公會)는 기독교 신앙 고백인 사도신경에 나오는 ‘거룩한 보편 교회’(The Holy Catholic Church)를 한자로 옮긴 것이다.
'천일의 앤'으로 유명한 영국의 헨리 8세가 그의 이혼을 불허하는 로마 가톨릭교회와 분리하여 만들어 영국에서 시작됐다.
성공회 사제는 독신 의무가 없어 대체로 기혼이다.
성당은 둥근 아치가 이어지는 로마네스크 양식이다.
1920년대에 트롤로프 주교가 아더 딕슨에게 설계를 맡길 때부터 조선 사람 심성에 맞게 선이 부드러운 건물이 되기를 원했다고 한다.
1922년 공사비 부족으로 부분 완공에 그쳤다.
증축설계는 1994년부터 진행됐다.
건축가 김원은 수소문 끝에 딕슨의 설계도를 영국 지방의 한 도서관에서 찾아냈고, 원래의 설계를 충실하게 재현했다.
성당 내 중앙통로 좌우 12개 기둥은 열두 제자를 뜻한다.
지붕에서 내려오는 둥근 아치를 받치며 서 있다.
제단 뒤쪽의 모자이크화는 채색한 사각 타일(tessera)을 이어붙여 만든 작품으로, 예수와 다섯 성인의 모습을 담고 있다.
가장 높은 곳의 예수님은 왼손에는 '나는 세상의 빛'이라는 성경을 들고, 오른손으로는 삼위일체를 뜻하는 세 손가락을 펼치고 있다.
성당 외벽엔 6.25 당시 총탄 자국들이 남아있다.
1987년 6월 항쟁이 시작된 곳이기도 하다.
4. 양이재(養怡齋)
성당 뒤쪽엔 양이재(養怡齋)라는 한옥 건물이 있다.
경운궁(덕수궁의 옛 이름) 내에 건립돼 왕족과 귀족 자녀들의 교육을 담당했던 곳이었다.
영친왕 이은도 여기서 수학했다.
1920년 성공회가 조선총독부로부터 사들여 지금 자리로 옮겼다.
5. 세실극장
양이재를 지나 서울시청을 바라보고 50m쯤 내려가 세실극장 앞에 선다.
1990년대 초까지 세실극장은 대한민국의 연극의 메카였다.
성공회주교좌성당 4대 교구장인 알프레드 세실 쿠퍼(한국 이름 구세실·具世實) 이름을 땄고, 한국 건축 선구자인 김중업이 설계했다.
옥상은 세실마루 전망대다.
성공회 성당의 한국풍 붉은색 기와지붕이 손에 잡힐듯 가깝다.
덕수궁을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다.
6. 영국대사관과 구세군중앙회관
성당 옆은 영국대사관이다.
영국대사관이 이 터에 자리한 것은 1884년이다.
그때부터를 기점으로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덕수궁은 작아지기 시작했다.
영국대사관, 성공회 성당, 미국대사관, 그리고 정동길 중명전이 있는 공간까지다.
성공회 성당 옆으로는 덕수궁 돌담 내부길이 개방돼 있다.
영국대사관에 막혀 있던 길이 일부 열려 덕수궁을 빙 돌아보는 게 가능해졌다.
영국대사관을 오른쪽에 두고 100m쯤 죽 걸어나간다.
넓은 잔디밭이 나오기 직전 오른편에 그리스 파르테논 신전 같은 건물이 있다.
1928년 완공된 구세군중앙회관이다.
구세군 본부는 영국에 있다.
급격한 산업화와 도시화로 도시 빈민들이 늘어나자 감리교 목사였던 월리엄 부스와 부인 캐서린 부스는 1865년 동부 런던의 빈민촌에 교회를 세웠다.
빈민 구호 활동에 신속성과 효율성이 필요하다고 판단한 부부는 당시 가장 근대적 조직이었던 영국 육군을 본떠 '군'을 자칭하고 조직도 개편했다.
구세군 성직자들은 '사관'으로 불리며, 군복과 비슷한 옷을 입는다.
구세군의 상징인 자선냄비는 1891년 겨울 미국 샌프란시스코 근교 해안에서 배가 좌초돼 1000여 명의 난민이 발생하자, 조셉 맥피 사관이 이들을 돕기 위해 큰 냄비를 걸고 "이 솥을 끓게 하자"며 동전 모금을 받은 게 시작점이다.
한국에서 구세군의 공식 선교 활동이 시작된 건 1908년 로버트 호거드와 애니 존스 사관 부부가 한국을 찾아 교회를 설립하면서다.
7. 옛 선원전 터와 '고종의 길'
구세군사관학교 앞에는 넓은 잔디밭이 펼쳐져 있다.
왼편엔 이층집 한 채가 있는데, 조선저축은행 중역 사택이다.
원래는 조선왕조 역대 왕들의 어진과 신주·신위를 안치하는 선원전 터였다.
1919년 고종이 승하한 뒤 선원전 터는 일제의 의해 필지가 매각되면서 갈기갈기 찢겼다.
선원전 터 뒤쪽 정동 8번지에는 경성제일고등여학교가 건립됐다.
정동 39번지에는 일제 금융기관에 팔려 조선저축은행(제일은행의 전신)의 간부 사택이 들어섰다.
연면적 465㎡(140여 평)에 서양식과 일본식 주택 양식을 절충한 형태다.
광복 후 여학교 터엔 경기여고가 들어섰고, 조선저축은행 간부 사택은 미대사관 간부 직원 사택이 됐다.
현재는 선원전 복원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옛 선원전 터 왼편에 높은 돌담 사잇길이 있다.
폭 3m, 길이 110m의 ‘고종의 길’이다.
고종은 대한제국을 선포한 뒤 정궁인 경운궁에서 다양한 국가행사를 계획했다.
그러나 경운궁은 비좁았고, 근처 경희궁은 비어 있었다.
경운궁과 경희궁을 잇는 어로를 새로 만들었다.
'고종의 길'은 2018년 생겼다.
지금의 도로 상황을 고려해서 옛 러시아공사관까지만 연결돼 있다.
8. 미국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
돌담길 왼쪽은 미국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다.
여기서부터 왼쪽으로 미국 선교사들이 지은 교회, 이화학당, 배재학당이 이어진다.
'작은 미국'이었던 것이다.
하비브하우스는 1883년 우리나라에 세워진 최초의 외국 공관이다.
조선 왕실이 서양인에게 매각한 최초의 부동산이기도 했다.
미국 정부의 반대를 무릅쓰고 한옥을 고집한 필립 하비브 대사(1971~1974년 재임)를 기리는 뜻에서 이름이 붙여졌다.
하비브하우스는 전 세계 미국 대사관저 중 유일하게 주재국의 전통 건축양식을 따랐다.
내부는 한옥과 서양식을 결합했는데, 미국 오리건주에서 공수해온 더글라스 전나무로 대들보와 서까래를 세웠다.
솟을 대문과 격자창, 문고리 등은 한국 최고의 장인들이 만들었다.
9. 옛 러시아공사관
'고종의 길' 끝에서 하얀 전망탑을 만난다.
옛 러시아공사관에서 유일하게 남은 건물이다.
러시아인 건축가 사바틴이 설계했는데, 흰색 벽면과 아치형의 입구가 이국적이다.
1917년 러시아혁명 이후 공백 기간을 거쳤고, 1925년 소련의 총영사관이 됐다가 1949년 폐쇄됐다.
6‧25때 건물 대부분이 파괴됐다.
옛 러시아공사관 바로 뒤편 현재의 경향신문사 자리엔 러시아정교회의 ‘성 니콜라스 성당’이 있었다.
일대는 '작은 러시아'였다.
성 니콜라스 성당이 1968년에 아현동으로 옮겨간 뒤 그 자리에는 MBC 문화방송 사옥이 건립됐고, 이후 경향신문사로 바뀌었다.
현재의 러시아 대사관은 옛 배재고등학교 터에 있다.
1990년 소련(러시아)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옛 러시아공사관 터 반환 대신 배재고 터를 줬다.
10. 캐나다대사관
옛 러시아공사관을 뒤로 하고 50m쯤 걸어내려오다 보면 오른편에서 고령의 회화나무를 만난다.
수령이 600년 가까이 됐다.
회화나무 바로 앞은 캐나다대사관이다.
국기에 단풍잎이 그려진 캐나다의 대사관은 회화나무의 위치를 감안해 건물을 큰 길 안쪽으로 들여서 지었다.
상태가 좋지 않았던 회화나무에는 지지대를 세워줬고, 회화나무는 건강한 모습을 되찾았다.
개화기 당시엔 벨기에 영사관이 있었던 곳이다.
11. 옛 프랑스공사관
캐나다 대사관 맞은편에는 창덕여중이 있다.
그리고, 창덕여중 자리는 옛 프랑스 공사관이 있던 곳이다.
1889년 조선과 조불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프랑스 정부는 정동 28번지에 공사관을 신축했다.
지금은 사진으로만 남아있지만, 바로크풍의 유려한 외관의 5층 규모 공사관은 당시엔 보기 드문 고층 건물이어서 높이만으로도 화제였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면서 대한제국은 외교권을 강탈당했고, 다른 모든 나라와 국교를 끊어야 했다. 프랑스 공사관은 정치성 없는 업무를 총괄하는 영사관이 됐고, 1910년 경술국치로 일제에 국권을 빼앗기면서 프랑스영사관은 정동에서 쫒겨나 민영환(충정공)의 옛 집터로 자리를 옮겨야 했다.
현재의 주한프랑스대사관 자리가 그곳이다.
창덕여중 운동장에는 옛 프랑스 공사관 정초석이 남아있다.
표지석에는 ‘RF 1896’라고 쓰여 있는데, '1896년 이 자리에 프랑스 공사관을 세우다’라는 의미다.
12. 손탁호텔
창덕여중 가까이 손탁호텔의 표지석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식 호텔이며, 우리나라에 처음으로 커피숍이 입점한 곳이다.
러시아 공사관 수석통역관이었던 앙뚜아네트 손탁(Antoniette Sontag)이 지었다.
프랑스 출신인 손탁은 베르사이유조약에 의해 출생지인 알자스로렌이 독일로 병합되면서 독일인이 됐다.
아관파천을 주도한 러시아 초대공사 카를 베베르의 처형(妻兄)이었다.
고종의 총애를 받아 덕수궁 근처 황실 소유 가옥과 부지를 하사 받았고 1902년 2층 25개 객실 규모의 호텔을 지었다.
주변에 외국 공관들이 즐비하던 시절, 손탁호텔은 또 하나의 외교중심지였다.
러일전쟁이 한창이던 1904년 말 런던 데일리 텔레그래프 종군기자로 특파된 윈스턴 처칠은 일본을 통해 우리나라로 들어왔고 만주로 취재를 가는 도중 하루를 손탁호텔서 묵었다.
일제의 간섭이 심해지자 손탁은 1909년 한국을 떠났다.
손탁이 본국으로 돌아간 이후 이 자리는 1917년 이화학당이 구입해 1975년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기숙사로 썼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에서 쿠도 히나(김민정 분)가 주인으로 있었던 글로리 빈관(賓館)의 모델이 손탁호텔이라고 한다.
13. 옛 이화학당과 보구녀관
곧 길에서 아담한 팔작지붕 대문을 만난다.
옛 이화학당(이화여고·이화여대 전신) 교문이다.
1890년 전후 설립된 것으로 추정된다.
교문 앞에 비석 하나가 서 있다.
허리춤 높이의 이 돌에는 ‘대소인원계하마(大小人員階下馬)’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말을 탄 사람은 누구든지 여기서 내리라는 뜻이다.
성균관, 서원, 향교 등 교육기관 앞에 하마비가 있는 것에 착안해 나중에 세워진 것 같다.
이화학당은 1886년 미국 북감리회 여자선교사 스크랜턴(M.F. Scranton)이 설립한 여성 신교육 발상지이다.
학교 이름은 1887년 명성황후가 하사했다.
하마비 아래쪽으로 100m 지점, 정동교회와 이화여고를 가르는 담 쪽에는 '보구녀관’(保救女館)의 표지석도 있다.
1887년 미국 북감리회의 재정지원으로 설립됐다.
고종은 '여성을 널리 구하는 곳'이라는 의미의 '보구녀관'이란 이름을 하사했다.
14. 정동극장
맞은편엔 정동극장이 있다.
우리나라 최초 서양식 극장인 원각사의 복원을 표방하며 1995년 개관했다.
원래는 서울우유 본사 자리였다.
우리나라 우유의 대량생산은 1937년 경성우유동업조합이 설립되면서 시작됐다.
조합은 정동극장 자리에 우유공장을 짓고 우유를 독점 생산했다.
서대문과 동대문, 남대문을 지나 자전거 등에 우유를 싣고 매일 정동으로 수송했다.
광복과 함께 경성의 이름이 서울로 바뀌면서 1945년 회사 이름도 서울우유로 바뀌었다.
15. 중명전(重眀殿)
정동극장 뒤에는 덕수궁 부속 건물인 중명전이 따로 떨어져 있다.
한자로는 重眀殿이다.
밝을 ‘명(明)’이 아니라 밝게 볼 ‘명(眀)’을 쓰는데, 서울 5대 궁궐에서 이 한자를 많이 만난다.
원래는 황실도서관으로 계획돼 1899년경 완성됐다.
처음에는 1층의 서양식 건물이었으나 1901년 화재 이후 지금과 같은 2층 건물로 재건됐다.
이곳은 고종황제가 1904년 덕수궁 대화재 이후 1907년 강제퇴위 될 때까지 머물렀던 곳이다.
1905년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된 아픔이 있는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16. 정동교회
정동극장 맞은편엔 헨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 개신교 교회인 정동제일교회가 있다.
교회는 남쪽에는 배재학당이 있고 북쪽으로는 이화학당과 담을 마주하고 있다.
빅토리아식 예배당으로 붉은 벽돌을 사용한 단층 건물이다.
최초의 역사를 옛 모습 그대로 간직한 정동교회는 옛 모습을 고스란히 간직한 정동길과 조화를 이룬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 언덕 밑 정동길엔 /
아직 남아 있어요 / 눈 덮힌 조그만 교회당"
이문세의 노래 <광화문 연가>에서 나오는 작은 교회당의 주인공이다.
첫 근대식 결혼식과 유관순 열사의 장례식을 치른 공간이기도 하다.
1918년 설치된 한국 최초의 파이프오르간도 있다.
이 오르간 뒤편 숨겨진 공간에서 독립운동가들이 독립선언서를 몰래 등사했다고 한다.
이승만 전 대통령, 서재필 박사, 주시경 선생 등이 이곳에서 예배를 봤다.
17. 이영훈 노래비
교회 건너편에는 2008년 세상을 떠난 작곡가 이영훈을 기리는 노래비가 있다.
마이크 모양으로 만든 노래비에는 <붉은 노을><옛사랑> <가로수 그늘 아래 서면><소녀> 등 이영훈이 만든 주옥같은 노래와 그를 추모하는 글이 있다.
18. 배재학당
정동교회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면 아펜젤러가 세운 배재학당이 나온다. 우리나라 근대 교육의 효시다.
1885년 4월 조선에 들어온 미국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는 그해 8월 배재학당을 세웠다.
'배재'라는 학교 이름은 ‘인재를 배양하라’는 뜻으로 1886년 6월 8일 고종황제가 직접 지었다.
이 날이 현재 배재중·고등학교의 개교기념일이다.
이승만 전 대통령은 아펜젤러가 가장 아끼는 학생 가운데 한명이었다고 한다.
배재학당은 한옥 한채를 구입해 벽 두 칸을 헐어 교실을 만든 게 시작이다. 하지만 전국의 남학생들이 이 근대식 학교로 몰려들자 아펜젤러는 1887년 양옥교사를 착공했고, 두번째로 지은 건물이 현재의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쓰이는 곳이다.
배재학당역사박물관 앞에는 수령 500년이 넘은 보호수 향나무 한그루가 서 있다.
임진왜란 때 가토 기요마사가 이 나무에 말을 맸다는 얘기가 전해오는데, 그때 끈을 맸다는 대못이 지금도 나무에 박혀있다.
나무가 자라면서 대못의 위치도 높아졌다.
배재학교는 1984년 강동구 고덕동으로 이사했고, 옛 배재학당 자리는 ‘배재공원’이라는 시민쉼터가 됐다.
배재학당길은 현재의 러시아대사관 뒷문까지 연결된다.
러시아대사관 터가 배재학당의 운동장이었기 때문이다.
배재공원의 표지석에는 이렇게 쓰여 있다.
“1885년 8월 3일 미국 아펜젤러 선교사가 배재학당을 설립, 이 땅에 최초로 서양문물을 소개한 신교육의 발상지요, 신문화의 요람지다. 1895년에는 여기에서 독립협회가 태동했고 독립신문도 발간됐다. 또한 1897년 맨손체조를 비롯해 각종 구기운동이 처음 시작된 우리나라 체육의 산실이기도 하다.”
독립신문 터도 근처에 표석으로 남아 있다.
여기서 '독립'은 일제가 아닌 청나라로 부터의 독립을 의미한다.
19. 서울시립미술관
배재학당 앞쪽 샛길로 들어서면 서울시립미술관의 전시동 건물 파사드와 마주한다.
이 파사드는 일제강점기인 1928년 한성재판소 터에 르네상스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 전면부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건축 당시 경성재판소로 지어졌다. 조선 말기 평리원(한성재판소)가 있던 자리다.
1995년 서초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대법원으로 사용했다.
과거에는 이혼 업무를 했던 가정법원도 같이 있었다.
그래서 덕수궁 돌담길이 ‘이별’을 상징하는 곳이라는 이야기가 나왔다.
건물 전면만 보존하고 새로 건축해 미술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정초석에는 ‘定礎 昭和二年十一月 朝鮮總督 子爵 齋藤實’이라고 새겨져 있다.
'쇼와 2년'은 1927년이고. '齋藤實'는 당시 조선 총독 사이토 마코토의 한자 이름이다.
20. 덕수궁 대한문
시청역 쪽으로 조금만 걸어내려오면 왼편에 덕수궁 대한문이 나온다.
원래는 대안문(大安門)이었고, 지금보다 33m 앞에 위치해 있었다.
큰 화재가 난 뒤 1906년 ‘대한문(大漢門)’이라는 새로운 현판이 내걸렸다.
‘큰 하늘의 문’이라는 뜻이다.
이후 태평로가 생기고 확장되면서 두 번이나 뒤로 물러 앉아 지금 자리에 위치하게 됐다.
구한말 격동의 시대를 거치면서 덕수궁은 훼철되고 쪼개져 팔렸다.
현재 남아있는 덕수궁 궁역은 원래의 3분의 1 정도로 줄어든 것이다.
정동엔 꿈의 흔적들이 너무나 생생하게 남아있다.
신덕왕후를 잊지 못했던 이성계, 석어당에서 남산을 바라보며 임진왜란의 아픔을 삭였던 선조, 아들 영창대군을 잃고도 견뎌야 했던 인목대비, 대한제국으로 부국강병을 꾀했던 고종, 개화기 배움의 열정을 불태우던 앳된 학생들, 변혁을 꿈꾸면서 조선에 온 선교사들...
정동길을 걸을 때마다 곳곳에 남겨진 애잔한 꿈들을 만난다.
ㅡ사진 왼편은 옛 러시아공사관(위)과 옛 프랑스공사관(아래). 오른편은 위부터 이화학당 대문, 정동교회, 서울시립미술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