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형도의 편지 중에서 시창고
이봐, 힘을 아껴봐 -편지글 중에서 편지 8
가스라이터 한 개를 주었다. 아마도 처음으로 갖고 있던 물건인 듯.
옅은 코발트빛이다. 바슐라르가 그랬던가. 촛불은 '타는 물'이라고. 가스라이터는 타는 공기쯤 될까. 윤전기에서 손을 떼면 삽시간에 불은 없어진다.
우리들 사람들의 불이 점화하는 곳은 어디에 어느 쯤 될 것인가. 시간과 상상쯤 될까.
승현이가 한번 문학실로 찾아왔었고 어제는 장장 네 시간쯤이나 페퍼포그와 유리의 파편, 호흡장애 등이 있었고 얼결에 본의 아니게 석제도 내 기억 속으로 걸어왔다. 그리고 태연히 문학의 밤 행사를 가졌고 조세희선생과의 대화가 있었고 바오밥나무와 장미의 어린 싹이 우리의 귓가에 머물렀었네.
내 마음을 과연 잘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르겠다.
너도 알겠지만 난 좀 괴팍한 형식주의자여서 어떤 사고의 틀이나 감상의 공간이 주어지기 위한 내 주위의 여건에 심각한 알레르기를 느낀다.
이제 장례란 말은 쓰지 말기로 하자.
그 말이 주는 효용이나 기능 부수적인 느낌 같은 것을 생각하면 머리가 아파.
어떤 관념의 놀이나 쓸데없는 사유 그 자체 내에 고여 있는 휴지 같은 느낌.
그리고 서울엔 비가 많이 왔다.
1983. 8. 27
[출처] 기형도의 편지 중에서 |작성자 마경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