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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창작이론1
1.시와 시의 언어
시란 무엇인가에 대한 답변은 쉽지 않다. 지금까지 시에 대한 수많은 정의가 내려졌으나 완벽한 정의는 나오지 않았다. 원래 시의 정의는 나올 수도 없다. 그렇게 되어 버리면 다양성이라는 관점에서 시는 이미 의미가 없는 것이요 발전이란 것도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시대에 따라 시에 대한 생각이 달라질 뿐만 아니라 시 자체도 변모하기 때문이다.
편의상 시는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 뜻을 말로 나타낸 것이라는 정의에서 출발해 보자. '시언지(詩言志)'라는 이 정의는 동양의 전통적인 시관(詩觀)으로 오랫동안 통용되어 왔다. 먼저 뜻을 보자. 문학을 정의할 때 '가치 있는 체험을 내용으로 한다'고 하니, 시에서의 뜻도 이와 같다고 할 수 있다. 표현하지 않고는 못배길 절실한 그 무엇이 여기서의 뜻이라고 하겠다.
이번에는 뜻을 전달하는 '말'에 주목해 보자. 문학이 언어 예술이므로 시에서의 말도 제재(題材)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시의 경우에 있어서 언어는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가 하면 시의 형태도 소설이나 희곡과는 다르다. 짧고 압축되어 있다. 그러나 짧고 압축된 형태의 문학이면 모두 시라고 할 수는 없다. 절제(節制)된 언어의 질서가 어떤 원리에 의해 이루어지고 또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알아야만 한다.이처럼 시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는 해명해야 할 과제가 많이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시에 대한 부당한 선입견을 버리는 것이 좋다. 시는 아름다워야만 한다든가, 고상한 세계를 노래해야만 한다든가, 시는 일상 생활에서는 쓸모가 없다든가 하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는 것이 시에 대한 정의(定義)를 내리는 것보다 더 중요할 수 있다.
시의 언어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우리가 사용하는 언어와는 어떻게 다른가에 대해 알아보자. 언어를 매개로 하는 문학 중에서도 가장 언어에 민감한 갈래가 시이다. 시인은 자신의 체험·정서·사상 등을 제한된 형식과 언어 속에 담아내야 하기 때문에, 시어(詩語)의 선택에 각별한 노력을 해야만 한다.
우리가 일상 생활에서 사용하는 언어는 역사적·사회적으로 형성된 관습적 의미로 통용되고 있다. 즉 언어는 어떤 특정 대상을 지시하는 기호(記號)로서 사용되고 있는 것이다. 정확한 의사 전달을 위해서는 언어의 이와 같은 기능은 필수적이다. 이처럼 지시적 기능(指示的機能)을 가진 언어의 의미를 외연적(外延的) 의미라고 부른다.
그러나 시어로 채택된 언어는 외연적 의미만으로는 불충분하다. 시어는 관습적인 때가 벗겨진, 보다 신선하고 새로운 의미의 언어이어야만 한다.
고향(故鄕)은
늘
가난하게 돌아오는 그로하여 좋다.
지닌 것 없이
혼자 걸어가는
들길의 의미(意味)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선(線)을 그어 보라.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선(線)의 의미(意味)
아, 내가 모르는 것을
내가 모르는 그 절망(絶望)을
비로소 무엇인가 깨닫는 심정이
왜 이처럼 가볍고 서글픈가.
편히 쉰다는 것
누워서 높이 울어 흡족한
꽃 그늘 ―
그 무한한 안정(安定)에 싸여.
들길을 간다.
(이형기, '들길')
이 시에는 들길을 걸어가는 시적 화자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그러나 시를 읽어 가는 과정에서 우리는, 그가 삶에 지쳐 귀향(歸鄕)길에 오른 가난하고 외로운 사람이라는 것, 고향이란 그 누구에게나 안식과 평화를 베풀어 주는 따뜻한 공간이라는 사실을 점차 알게 된다.
따라서, 시의 제목인 '들길'은 바로 고향으로 가는 길이다. 여기에는 물론 삶에 실패하여 빈손으로 고향을 찾아가는 화자의 궁핍한 심정이 암시적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그러나 시인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화자의 가난한 귀향에 관한 것만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가 물질적으로 가난했지만, 오히려 그로 인해 자기를 성찰(省察)함으로써 얻게 된 정신의 충만함이다.
역설적이지만 그는 가난했으므로 참다운 고향의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세속적인 만족과 쾌락이란 덧없고 허망하다는 것, 참된 삶이란 욕망을 채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을 비우는 데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이상의 설명은, 물론 시인이 시를 통해 표현하고자 하는 전체 의미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나 그 전체의 의미를 해명하기 위해 좀더 긴 글을 쓴다 하더라도 그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시를 설명 혹은 분석하는 일은 일상적인 언어 행위인데 반해, 시 그 자체는 일상어를 초월한 시의 언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시인은 일상어로서는 표현이 불가능한 이 시적인 진실, 즉 궁핍한 귀향자가 들길을 가며 깨달은 생(生)의 진실을 한 마디로 '백지(白紙)에다 한 가닥 / 선(線)을 그어 보라. / 백지(白紙)에 가득 차는 / 선(線)의 의미(意味)'라고 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시인이 창조한 언어, 즉 시의 언어라 할 수 있다. 다음을 보자
살던 성북동 비둘기만이 번지가 없어졌다.
본래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기면서
새벽부터 돌 깨는 산울림에 떨다가
가슴에 금이 갔다.
그래도 성북동 비둘기는
하느님의 광장 같은 새파란 아침 하늘에
성북동 주민에게 축복의 메시지나 전하듯
성북동 하늘을 한 바퀴 휘돈다.
(김광섭, '성북동 비둘기')
성북동은 서울에 있는 한 지역의 구체적인 지명이다. 번지란 땅을 인위적으로 나누고 번호를 부여한 것이다. 그런데 1행에서 성북동 산에 번지가 새로 생겼다는 것은 원래 자연이었던 곳에 인간의 주택지가 인위적으로 조성되었다는 뜻이다.
2행에서는 자연인 그 산에 살던 비둘기만 보금자리를 잃었다고 했다. 1행과 2행은 문명과 자연의 대립 구조(對立構造)로 되어 있는 것이다. 따라서 1행의 번지는 문명을, 2행의 번지는 자연적 삶의 터전을 뜻하게 된다. 이처럼 시어는 언어의 지시적 의미에서 출발하여 새로운 의미를 갖게 되는데, 이를 함축적(含蓄的), 또는 내포적(內包的) 의미라고 한다.
지시적이고 객관적인 외연적 의미에서 암시적(暗示的)이고 주관적인 내포적 의미로 확대되어 가면서 시어는 하나 이상의 의미를 갖기도 한다. 그리고 시어가 하나의 의미로 포착되지 않고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때 오히려 시의 의미와 가치를 풍부하게 하는 경우도 있다.
산(山)에
산(山)에
피는 꽃은
저만치 혼자서 피어 있네
(김소월, '산유화(山有花)'의 2연)
이 시에서 '저만치'의 뜻은 무엇일까? 우선 어떤 거리를 지시함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구체적으로 몇 미터라고 해석될 수는 없다. 전체적 문맥으로 보아 꽃이 저기, 저 쪽에서 피어 있다는 의미에서 거리를 뜻한다고 볼 수 있다.
이 경우 '저만치'는 시인이 꽃과의 사이에서 느끼는 심정적(心情的) 거리감으로 해석되어도 좋다. 그런가 하면 '저만치'는 '저렇게' 또는 '저와 같이'로 어떤 상태나 정황(情況)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즉 산에서 피는 꽃은 저렇게 외로이 피어 있다고 해석하는 것이다. 그런데 '저만치'를 거리의 의미로 해석하는 것과, 상태나 정황으로 해석하는 것이 서로 모순되지 않고 오히려 상승 작용을 일으켜 결과적으로 '저만치'의 의미가 더욱 풍부해지게 되었다. 이처럼 한 단어 또는 한 문장 구조 속에 두 개 이상의 의미가 들어 있는 경우를 일러 언어의 다의성(多義性), 또는 모호성(模糊性)이라 한다. 이것은 문학, 특히 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2.시와 서정
시의 중요한 특성 가운데 하나는 서정성(抒情性)이다.전통적인 시에서부터 오늘날의 실험시에 이르기까지, 작품마다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시는 산문(散文)과 달리 어느 정도 서정성을 지니고 있다.
서정성이란 대상을 의미나 개념으로 파악하지 않고 감정이나 느낌으로 이해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인데, 그것은 음악의 세계와 매우
유사하다. 음악에서는 직접적이거나 분명한 의미, 혹은 개념의 전달이 없다. 다만, 소리의 변화가 주는 감각적인 분위기와 느낌이 어떤 감정을 유발시키고, 청자(聽者)는 자신의 주관을 통해 그 의미를 상상할 따름이다.
시의 경우도 이와 비슷하다. 음악이 소리를 통하여 어떤 대상을 이해한다면, 시는 소리가 포함된 언어를 통해 대상을 이해한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감정적인 요소이다. 산문은 대상을 객관적으로 바라보지만, 시는 주관적 혹은 감정적으로
느끼는 언어인 것이다. 나아가 시에서는 대상과 주관이 아예 하나로 융합되거나 결합된다.때로 인간에게는 감정적(感情的)인 의미가 이지적(理智的)인 의미보다 더 중요한 경우도 많다. 이에 따라, 언어를 이지적인 의미를 지향하는 것과 감정적인 의미를 지향하는 것의 두 가지로 나누기도 한다.
전자를 산문의 언어, 후자를 시의 언어라고 부른다. 산문의 언어가 중시하는 것은 이지적인 의미, 즉 외연적(外延的)인 의미이며, 시의 언어가 중시하는 것은 감정적인 의미, 즉 내포적(內包的) 의미이다.
붉은 해는 서산(西山) 마루에 걸리었다.
사슴의 무리도 슬피 운다.
떨어져 나가 앉은 산(山) 위에서
나는 그대의 이름을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서름에 겹도록 부르노라.
부르는 소리는 비껴 가지만
하늘과 땅 사이가 너무 넓구나.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
부르다가 내가 죽을 이름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사랑하던 그 사람이여!
(김소월, '초혼(招魂)'에서)
이 시에서 '선 채로 이 자리에 돌이 되어도'는 무슨 뜻일까? 먼저, '돌'의 의미를 해석할 수 있어야 한다. 시의 전체적인 문맥으로 볼 때, 여기서의 '돌'은 '바위의 조각으로 모래보다 큰 것'이라는 사전적 의미, 즉 일상에서 사용하는 의미로 쓰인 것이 아니라, '돌'이 가진 한 부분의 속성만을 확대하여 '붙박이로 자리를 지키는 존재'라는 내포적 의미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이는 곧 님에 대한 시적 화자의 변치 않는 사랑이 형상화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이 시에서 시인이 관심을 가진 것은 어떤 사실을 객관적으로 표현하거나 전달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에서 연유된 자신의 슬프고 허무한 감정 그 자체의 형상화(形象化)이다. 이처럼 감정의 표현은 문학, 특히 시가 누릴 수 있는 특권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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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
―이제하(1937∼)
밤새 격렬하게 싸우다 달아난 애인을 뒤쫓아 숲까지 갔더니
웬 녀석이 사과궤짝까지 들고 와 새벽부터 웅변연습을 하고 있다.
구케의원이라도 돼 또 나라를 말아먹으려나 싶어 야리다 보니
한 옆에는 낯짝 우두바싸고 세상의 고뇌란 고뇌는 혼자 짊어진 듯이
신음소리를 내는 녀석까지 보인다.
하지만 고요한 바다와 푸른 나무로 에워싸인 숲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쫓던 애인도 잊고 나는 무슨 생각에 잠긴 말 곁으로 다가간다.
야채와 당근을 먹을 만큼 먹은 듯 말은
호주에 가 있는 짝이라도 생각하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렇게 받아들일 밖에 없다.
여자나 남자나 성정이 불같은 연인들일 테다. 사랑할 때만큼이나 싸울 때도 격정적이어서, ‘밤새 격렬하게 싸우다’ 급기야 애인이 뛰쳐나간다. 아직 어두운데 나가긴 어딜 나간단 말이냐. 걱정도 되고 해서 화자는 ‘애인을 뒤쫓아 숲까지’ 간다. 숲은 일상공간이 아니기 때문에 뭔가 낯선 것들이 거기 있을 것 같다. 그래서 예로부터 숲은 시인들의 상상력을 자극해왔다. 그런데 화자는 애인을 찾으러 숲에 갔다가 이런저런 기이한 세상 풍경을 본다. 아무도 없을 것 같은 새벽 숲에서 ‘정치인’도 보고 ‘철학자’도 보고 말도 본다. 말은 이제하의 상징동물이니 ‘시인’이라고 생각해도 될 테다. ‘우두바싸고’는 피난 보따리 싸듯 감당 못하게 담아 싼다는 뜻이다. ‘정치인’ 흉내 내는 놈과 ‘철학자’ 흉내 내는 놈에 대한 야유에 찬 묘사가 ‘푸른 나무로 에워싸인’ 바닷가 숲의 아름다움과 대비돼 더욱 우스꽝스럽다.
시의 배경이 된 공간은 제주도가 아닐까? 여행지에서도 독하게 싸운 그 애인은 어디서 분을 삭이거나 후회하고 있을까. 맨몸으로 뛰쳐나갔을 테니 혼자 공항에 가 있지는 않을 테다. ‘쫓던 애인도 잊고’ 화자는 ‘무슨 생각에 잠긴 말 곁으로 다가간다’. ‘야채와 당근을 먹을 만큼 먹은 듯 말은/호주에 가 있는 짝이라도 생각하는 것 같’단다. 말은 시선을 아득히, 동이 틀락 말락 한 수평선 너머로 두고 있을 테다. 차분해진 화자도 아득히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렇게 받아들일 밖에 없다’고. 참으로 감수성이 안 늙는 시인 이제하!
원문보기:
http://news.donga.com/3/all/20141121/68033025/1#csidxce190058e53df5998681e989000d5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