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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관옥나무도서관(The Gwanok Namas Library) 원문보기 글쓴이: 안씨달나라에가다
일시 : 2015년 11월 27일 저녁 7시.
장소 : 문화 거리 안에 자리한 아트센터.
이야기 손님 :
심상덕 서예가
황도근 무위당학교장
김용우 원주사람
박두규 시인
<무위당 장일순 순천 작품전>이 순천문화예술회관(2016.1.13~1.20)에서 열립니다. 어느날 갑자기, 무위당 말씀이 우리에게 다가올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분이 우리에게 부드럽게 다가올 수 있도록 맞이하는 시간, 준비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무위당 장일순의 생명사상과 삶이야기’를 들려주실 소중한 손님들과 함께 이야기 실타래를 풀어봅니다.
♬
한송이 꽃 속에 천지가 있네
한송이 꽃 속에 우주가 있네
한송이 꽃 속에 천지가 있네
한송이 꽃 속에 우주가 있네
... ♬
자그마한 것에도 온 우주가 있다는 노래와 전남 <한살림> 조합원들이 연주하는 오카리나 소리, 그 생명 가득함과 평화로움이 내려앉은 가운데 이야기 마당은 펼쳐집니다.
묻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왜 왔을까?”
눈을 감고서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스스로 생각해봄으로써 ‘모임’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사회자가 말문을 엽니다.
“세월호 참사...”
세월호 참사는 우리를 너무나 슬프게 하였고, 부끄럽게 만들었습니다. 304인 죽음 앞에서 우리는 너무나 무기력하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스스로 달라져야한다는 생각으로 자신을 돌아보려 하였습니다. 무엇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 삶을 변화시켜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무엇을 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중에 장일순 선생님의 ‘생명사상’을 되새겨봅니다. 무위당은 세월호 참사라는 참담한 현실 앞에서 무엇을 말하였을까? 이 물음에 대한 대답을 찾는 과정에서, 무위당 삶과 작품을 통해 그 뜻을 되새겨보고자 <무위당 장일순 순천 작품전>을 준비하고 있습니다. 이 작품전을 통해, 순천에서 새로운 길을 찾아보고, 세월호 이전과 이후의 나를 바라보며, 좋은 삶을 어떻게 만들 것이고 그것을 사회에 어떻게 빛을 발하게 할 것인가를 고민하려고 합니다.
“혁명이란 따뜻하게 보듬어 안는 것이라오. ”
“나는 미처 몰랐네 그대가 나였다는 것을...”
“사람은 한울을 떠날 수 없고 한울은 사람을 떠나서 이루지 못하나니...
... 한울은 사람에 의지하고 사람은 먹는데 의지하였나니 만사를 안다는 것은 밥 한 그릇을 아는데 있나니라”
어둠 속에서 무위당 작품이 빛을 받아 그 말씀을 전합니다. 짧은 시간이 지난 뒤, 여전히 고개를 끄덕이고 있을 때 시인은 말합니다. “순천에서 단순히 작품전만 해서 무슨 의미가 있겠나 싶어, 하반기 동안 장일순 선생이 어떤 분인지 조금씩 알아가는 기회를 자주 갖도록 하고 싶었습니다. 그럼으로써 순천 사람들이 스스로 장일순 선생님을, 이 시대를 살아가는, 또는 배움적 삶을 열어가는 화두로써 잠깐이나마 스쳐지나가도록 하는게 좋지 않겠나 싶어 이런 자리를 마련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은 원주에서 무위당 선생을 직접 모셨던 세 분, 누구보다 가까이 그분의 언행을 보고, 듣고, 배우고, 또 함께 나눴던 분을 모셨습니다. 이 분들을 통해 장일순 선생님 삶을 보다 생생하게 듣는 자리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형식은 대화마당으로 꾸렸습니다. 황도근 교수는 무위당 삶과 철학, 정신과 관련하여, 심상덕 서예가는 예술 쪽, 무위당 작품에 대해서, 김용우 선생은 무위당 삶과 정신이 우리에게 어떻게 다가올 수 있는가를 얘기할 것입니다.”
밥 한끼 잘 대접하고
따뜻한 방에 재워 잘 대접하면
그것이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시간이 가도 잊히지 않는 분들이 있습니다. 주로 세상을 떠난 분들이 기억에 남습니다. 첫 번째는 당연히 어머니입니다. 어느 경우에서도 내 편에 서주었고 늘 나를 그리워하였습니다. 그 다음은 무위당 선생님입니다. 그리고 김찬국 상지대 총장이 그렇습니다. 이 분들 특징은, 대단한 일을 해서만이 아니고 마음에 아주 정이 많습니다. 저한테는 누구보다 많은걸 끝없이 주신 분들이죠.
무위당 선생님에 대해 말씀을 좀 드리죠. 선생님은 앞에 나서는 일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셨어요. 젊을 때는 국회의원 선거에도 나가고, 학교도 세우고, 투옥이 될 만큼 강렬한 분출이 있었답니다. 그런데 무위당 선생님이 어느 순간 좀 바뀌셨어요. 지학순 주교를 만날 때도 강렬했지만 앞에 나서지는 않았죠. 모든 이를 다 품고 가려고 하셨습니다.
그런 성품인지는 몰라도 “내 이름으로는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유지를 남기셨죠. 제자들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답니다. 그래서 모두 조용히 지냈어요. 돌아가신 다음해부터 무위당 묘소에서 모임이 있었는데 해가 갈수록 숫자가 늘어났어요. 누가 자의적으로 한 게 아닌, 그리움 때문이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마음에 담았던 분, 자신을 끝없이 아껴주신 분에 대한 그리움이 생긴 것이죠. 5주기, 7주기, 그리고 그 이후 자연스럽게 일이 이렇게 여기까지 오게 된 것입니다.
무위당 사상도 “세상에 일부러 드러내지 말라”였습니다. 그래서 우리도 생명운동, 협동운동을 하면서 그것을 대단히 중시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선생님은 똑똑한 사람, 잘난체 하는 사람에게 꼭 말해줬던 것이 ‘기어라, 겸손하라’, ‘기어서 천리를 가라’였습니다. 세상에 드러내어 일하면서 있을 수 있는 문제점을 절실하게 말씀해주셨습니다. 우리는 그 분의 이러한 뜻을 그럭저럭 지켜오고 있었는데 세상이 무위당을 찾고 있는 듯합니다. 세월호가 바로 그렇습니다.
무위당 선생 사상이란 것이 특별한 게 없습니다. 무위당 선생은 간단히 얘기합니다. “원주에 오시는 분들 잘 모셔라. 밥 한끼 잘 대접하고 따뜻한 방에 재워 잘 대접하면 그것이 모든 것을 하는 것이다.” 이처럼, 그 분은 운동가이면서 굉장이 마음이 따뜻했습니다. 작품에서도 그 마음이 나타납니다. 어떤 것도 팔기 위한 작품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도 당신 마음을 적어서 보냈으며, 내용 또한 “목에 힘빼, 그래야 살아!!”처럼 어렵지도 않습니다.
무위당 선생을 알면 왜 빠져오기 힘들까? 인간에 대한 깊은 사랑이 배어나왔고, 협동조합 활동을 통해 더불어 사는 삶에 대한, 그 분의 끊임없는 열정이 있었기에 그렇다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단시간 동안 이뤄지는 빠른 발전 속에서 그것을 느끼지 못했습니다. 나도 그랬습니다. 발전 속에서 우리는 행복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서울, 지방 모두 그렇습니다. 누려왔던 것을 놓칠까봐 불안해합니다. 우리는 돈에 대한 노출이 너무 심해졌습니다. 대학도 마찬가지이며, 사회 곳곳이 마찬가지이죠. “돈보다 생명이라는, 돈보다 사람이 먼저다”라는 무위당 선생님 생각이 절실해집니다. 세월호 문제도 결국 돈이 그렇게 만든 것이죠.
우리 사회는 가장 빠른 속도로 발전한 만큼 경제적 양극화가 심각합니다. 그보다 더 심각한 것은 바로 이념의 양극화입니다. 무위당 선생님은 77년부터 이 이원화를 너무나 걱정하셨습니다. 그게 바로 생명 운동이다. “너를 보고 나는 부끄러웠다. 너와 내가 하나...”, “상대에게 가까이 가라. 그게 적일지라도...” 이처럼 무위당 선생은 이원화를 경계하셨고 그래서 철저하게 중도의 길을 고민하였습니다. 그건 너무나도 어려운 길이죠. “한뿌리... 너와 내가 다르지 않다” “너와 나는 함께다”, “만물여아일체” 이런 말씀을 이번 전시회를 통해 만나게 될 것입니다.
민초 같은
밟아도 밟아도
생명력이 있는 것을 써야하는데...
“어디서 뭘 하는 누구니?”
“저는 취미로 서예를 하고 있는 누구입니다.”
1975년 즈음, 무위당 선생님을 이렇게 처음 만났습니다. 그 후 “너는 서예가가 되었으면 좋겠다” 하며 서예할 수 있는 장소를 마련해 주었는데 내가 거절했죠. 10년 해가지고서 누구를 가르치는 것도 그렇고, 서예 해가지고서는 먹고 살기 힘들고, 또 가난하게 사는 것도 별로였기에 그랬습니다. 어렸을 때 이야기죠. 처음, 서예가를 꿈꾸지도 않았을 뿐더러 잔심부름은 괜찮았지만 서예 지도는 너무너무 싫었습니다. 그런 내가 그간 선생님을 따라다니며 여러 심부름도 하고 그랬지만, 열세번 전시회, 이런 것까지 할 줄은 몰랐습니다. 황 교수 말씀처럼 “무위당 선생에 조금이라도 한번 발을 들여놓으면 빼기 힘들다”, 딱 그것이죠.
사실, 서예를 처음 시작할 때 무위당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죠. 좋은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일종의 소귀에 경읽기였죠. 우리는 무위당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 것이죠. 만약 무위당이 지금 재림하여 오신다면 큰일이에요. 30년 전에 무궁무진한 메시지를 줬음에도 불구하고 실천한게 너무 없기 때문이죠. 작품이 좋고, 내용도 좋다고만 하고, 그리고 몸으로 부딪히며 느끼는 정도였지 실질적으로 움직이는 것에는 너무나 등한시 했죠.
<한살림> 로고는 원래 ‘지렁이체’입니다. 지렁이는 일분일초도 쉬지 않고 흙을 먹어 토해내어 땅을 살린다고 합니다. 지렁이처럼 열심히 일하며 살아라는 뜻이 지렁이체에 담겨있죠. 그런데 안타깝게도 전국 <한살림> 로고가 인쇄체로 바뀌었습니다. <한살림> 로고가 지렁이체로 환원되기를 바라며, 그때 비로소 생명운동을 제대로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무위당이 서예가로 흐르기 시작한 시점은 출옥 후 가택연금 시절이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집에서 소일거리로 서예를 집중적으로 했다고 합니다. 그런데 무위당 작품은 대한민국 서예가들이 상상치 못한 내용들이 너무 많습니다. 지금 우리 한글 서예가들은, 민초 같은 밟고 밟아도 다시 일어나는 생명력 있는 것을 써야하는데 생명력 없는 기능에만 신경을 쓰고 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것일 수 있습니다. 암튼, 내게 선생님의 영향이 있다고 한다면 그런 생명력 있는 작품을 하고 싶습니다.
순천 전시회에서는 선생님 작품 중 - 동학 내용이 많은데 - “밥은 하늘이다”처럼 알기 쉽게 우리에게 가까이 다가오는 작품을 볼 수 있을 것입니다.
무위당의 ‘혁명’이라는 것은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혁명은 보듬는 것이다.” 여기서 이야기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민주주의!!! 어떤 민주주의냐? 우리가 혹시 착각하여 욕망의 민주주의를 하자는 것은 아닌지? 선생님이 말했던 것으로 투쟁 민주주의를 많이 거론합니다. 하지만 그보다는, 선생님이 그 이전에 얘기했던 것으로, 민주주의의 가장 근본적인 것은 바로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80년 광주를 생각해보죠. 그때 광주는 국가와 자본으로부터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죠. 그러나 그때 광주는 평화와 행복을 누렸습니다. 자유와 자치를 누렸습니다. ‘광주’가 피의 탄압으로 끝난 후, 훗날 광주 사람들이 ‘광주’를 평가할 때 초점은 민주주의, 그것도 ‘국가를 향한 민주주의’에 맞춰져 있습니다. 그런데 사실 놓친 것이 있답니다. ‘광주’의 핵심은 ‘공동체’라는 것입니다.
(다시 본 이야기로 돌아와서) 지역공동체가 지속 가능할 때, 자립해 나갈 때 그게 진짜 민주주의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현재 우리 지역공동체는 모두 국가와 자본의 식민지가 되어 버렸습니다. 세월호 문제에 대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이유도 결국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이 공동체적 삶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공동체가 복원된다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자기를 내려놓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죠. 핵심은 이웃과 더불어, 자연과 더불어 살아야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 - ego 일 수도 있습니다 - 라는 존재, 그 자체에 매달려서는 공동체적 삶은 어렵습니다. 내 욕망과 이기를 추구하는데 공동체가 유지되지는 않겠죠. 내가 공동체적 존재, 즉, 자율적인 존재로 거듭날 수 있는가? 내가 우주적 존재라는 것을 각성하고 그 위에 들어서면, 그때부터 (공동체적 삶과 더불어) 우리 사회가 성숙해질 것입니다. 국가를 향한 민주주의, 욕망을 향한 민주주의가 되다보니 전국 모든 지역에서 선거 때마다 기업유치, 인구증가, 개발 등을 하겠다고 합니다. 순천, 제주, 원주, 다를 바 하나 없습니다.
우리가 겪고 있는 이 경제체제 하에서 두 개의 선택지가 있다고 생각해보죠. 하나는 우리가 공동체적 기업을 만들어서 자립, 자급하는 사회입니다. 또 하나는 삼성, 현대가 들어와서 좌우하는, 자본에 포섭된 노예민주주의 사회입니다. 어느 사회가 안정적인가요? 민주주의의 또다른 요소, 공동체가 되기 위해서는 자립적 경제 문제를 고민해야만 합니다. 예를 들어보죠. 이탈리아 트렌토(Trento)라는 지역이 있는데, 인구는 60만 명 정도입니다. 570여개 협동조합이 지역 경제의 67%를 차지하고 있고, 고용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아이들을 ‘삼성’ 같은 대기업에 취직시키고, 의사, 판사를 시키기 위해 교육시키는데, 이런 경제 구조를 지닌 트렌토에서는 애초부터 협동조합, 지역공동체에서 일하는 교육을 시키는 구조가 되는 것이죠. 외부경제에 의해 휘청거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비슷한 사례로 캐나다 퀘벡을 들 수 있는게 그곳은 1500개 정도 협동조합에서 12만 명을 고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대단한 숫자입니다. 반면, 원주는 지역 GDP 3조 가운데 600억 정도를 협동조합이 담당하고 고용은 500명 정도입니다. 이는 2%인데, 이 정도로 우리 사회에서 견뎌낼 수 있겠는가? 이런 민주주의에서 저항의 힘, 지켜내는 힘, 공동체를 지속가능하게 하는 힘이 되겠는가? 장기적인 측면에서 바라봐야겠죠. 지역민들이 운영하는 경제 규모가 30% 정도라면 얘기가 달라지겠죠. 국가를 대하는 방식, 자본을 대하는 방식이 달라질 것입니다.
또 다른 문제, ‘자치(自治)’의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는 ‘자치’를 못하면서 정치에 모든 것을 기대고 있습니다. 민주주의가 잘못되어 있는 것이죠. 이웃과 자치를 못합니다. 의원 뽑는 게 자치, 정치는 아니라는 것이죠. 자치는, 이웃과 더불어, 지역의 문제, 우리의 공동사안에 대해서 자기를 내려놓으면서 결정하고 따를 수 있는 능력입니다. 자치 능력을 신장시키기 위해선 지역 공동체에서 훈련하여야 합니다. 즉, 자치 능력 훈련의 장이 공동체라는 것이죠. 공동체 안에서는 끊임없이 결정하는 과정이 있습니다. 먹고 사는 문제부터 정치적인 문제, 자치적인 문제 등 여러 가지가 있는데 그 과정에서 결정해 나가는 능력을 길러야 하는 것입니다. 자치라는 것은 같이 결정하고, 같이 결정한 것을 따르는 것입니다. 이웃과 어떤 결정을 하기 위해 토론과 회의를 해서, 그리고 결정한 것을 따르는 훈련을 우리는 얼마나 해봤나요? 이런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해봐야만 합니다. 즉, 순천 민주주의 ‘되냐?’하는 것이지요, 누구를 뽑는 민주주의 말고! 다섯 명 민주주의가 되면, 열 사람 민주주의가 되고, 백 사람 민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천명, 만명 민주주의가 되어야 합니다. 이러면 세상을 바꾸는 것이죠.
무위당의 ‘혁명(革命)’이라는 것은 나가서 싸우는 것이 아닙니다. 미워하고 증오하는 것이 아닙니다. 어떻게 자기를 내놓으면서 사심이 아닌 공동의 문제에 대해서, 네 이웃과 함께 지역 공익을 같이 결정할 수 있느냐 하는 것입니다. 상대방을 보듬어 안으면서, 그리고 같이 결정하고 따라가는 민주주의를 해나갈 때 현대 사회의 여러 문제를 넘어설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공동체 민주주의 즉, 공동체에 기반한 민주주의가 바로 그것입니다. 민주주의라는 것은 공동체를 통해서 행복이 전개되고, 사람이 성숙될 때 민주주의가 실현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싸우는 민주주의만을, 욕심만 챙기는 민주주의를 해왔던 것입니다. 이런 민주주의에 훈련된 사람이 다른 삶을 외면하는 것은 아주 쉬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쯤 우리가 돌아봐야할 문제 즉, 혁명이라는 문제가 결국, 따뜻하게 보듬어 안은 공동체 민주주의라고 하는 것이죠. 이 문제 인식을 통해, 어떻게 지역이 자립하고 자치하고, 그 속에서 인간 개개인 자율성을 증대할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자신의 우주적 영성을 깨달아 나갈 때 이 사회가 좀 더 성숙해질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2016년 1월, 순천 전시회 기간 동안 생명평화결사에서 준비한 의미 있는 행사가 있습니다. 30년 전에 무위당 선생님이 생명운동, 생명사상을 얘기한 이후, 이제는 우리 사회에서 생명운동, 생명사상은 보편 언어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생명사상, 생명운동의 과제도 매우 많습니다. 과연 생명운동은 이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있는가부터, 예를 들면, 통일문제에 대한 생명운동의 대안은 무엇인가, 앞으로 미래 비젼은 무엇인가 등등. 이런 과제를 논의해보자는 취지 아래 구체적 대안을 모색해보고 생명평화운동 방향성을 재정립하기 위한 <생명운동 포럼(가칭)>을 순천에서 열기로 했습니다. 의미있는 자리이기에 함께 해 주셨으면 합니다.
이렇게 우리는 손님들 이야기를 통해 무위당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손님들이 자리가 낯설어 다 하지 못한 이야기가 있다면 더 할 수 있도록 우리가 맘을 내어줄 차례입니다. 아울러 이야기를 듣는 동안 우리 마음에 자연스레 피어오른 궁금한 마음도 함께 넣어 이야기를 나눠 봅니다.
Q. 무위당 장일순 후학들이 많다고 하는데 어떤 분들인지? 말씀해주시면, 그들이 무위당 뜻을 잘 따르고 있는지 (농담삼아) 검증해보겠습니다.
A. 장일순 선생님은, “제일 조심할게 매스컴 조심하라, 정상에 있을 때 니 스스로 내려올 수 있는 용기가 있느냐?”라고 하였습니다. 매스컴에 의해 스타가 될 수도, 나락으로 떨어질 수 있는데 이는 정말 새겨들어야할 경구입니다. 또 한가지, 무위당 선생이 ‘자기의 이름으로 뭐하지 말라, 감투 자리에 가지 말라’고 했는데, 한살림 이사장도 하고 전시회도 하는데 어떻하니 하며 이에 대한 고민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무위당은 이현주 목사와 함께 노자이야기 대담집을 냈죠. 거기에서 핵심은 무위입니다. 무위는 ‘하지 않는 일이 없는’ 것입니다. 무위자연, 하는 일을 소리 내지 않는 것, 치악산 밑에서 사계절이 오고가든, 눈이 오고가든 모두 흔적 없이 오고 가지요. 아무 일도 하지 말라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을 하되 소리 나지 않게, 그런 자리에 있는지 없는지 모를 정도로 조용히 하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떤 자리에서 소리 없이 잘 하면 무위당 뜻에 부응한다고 생각합니다.
무위당 작품 중 저파비(猪怕肥)라는게 있습니다. 정치인 안철수가 와서 그 작품을 가만히 본 적이 있었습니다. 인파출명저파비(人怕出名猪怕肥 : 돼지가 살찌는 것을 두려워해야하는 것처럼 사람도 이름이 나면 두려워해야 한다)인데, 정치인 손학규도 그랬습니다. 정치인들은 그것을 가장 두려워한 듯합니다. 무위당은 ‘기어라’는 말을 자주 했죠. 이는 실천하기가 너무 어렵습니다. 드러내고 싶은 것은 본능인데 그것을 하지 말라라고 하니 정말 힘들죠. 한 예로, “목에 힘빼”라는 작품을 원주 한 병원 원장에게 써준 적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정치에 뜻이 있어 정치를 하려는 시점에 무위당이 써준 것이지요. 원장실에는 여전히 “몸에 힘빼. 그래야 살어!”가 걸려있습니다.
무위당이 스스로 제자를 둔 적은 없다라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으로 모셔야, 모시는 사람이 제자가 되는 것이죠. 예수가 제자를 거둔 게 아니라 예수의 말씀을 따라 살겠다면 제자가 되는 것처럼 말이죠. 예수 제자가 그런 것이고, 부처 제자가 되는 것도 마찬가지이고... . 그리고 (무위에 대해 한말씀 드리자면) 대체로 무엇을 하지 말라고 했던 것은 아니고, 노자에 나온 말처럼 ‘사심없이, (또) 사심없이’ 어떤 일을 하면 그게 무위의 길이 아닌가라고 이해하고 있습니다.
Q. 원주 공동체는 어떤 형태로 이루어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A. 공동체는 다양합니다. 우리가 말하는 것은 살아있는 삶의 공동체이죠. 물론, 다양한 취미 공동체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수도원 공동체, 윤구병 선생의 변산 공동체 같은 경우도 있구요. 그런데 하나의 지역 사회가 진정한 의미의 공동체 사회로 가려면 자신들 삶을 지탱시켜줄 수 있는 공동체 경제가 있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농경 사회와 달리, 현대 사회는 특정 집단이 강압적 소유, 고용, 경영하는 구조이죠. 아울러 현대 사회는 공동체 사회라기보다는 개인주의 사회이고 물질문명 사회입니다. 그래서 이 문제를 넘어서기 위한 지역 공동체를 만들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30만이 사는 사회에서 공동체가 하나라는 것은 곤란하죠. 만약 몇백개의 공동체가 있다면, 그 속에서 다양한 공동체 토양들이 발휘되는 것을 의미합니다. 원주 같은 경우 협동조합을 많이 했습니다. 협동조합은 자본주의 사적 소유 시장과 달리 공동 소유의 경제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모두가 소유하는 경제가 얼마나 되느냐하는 것이 지역 공동체성을 평가하는 중요 잣대라고 생각합니다. 원주 인구가 33만 명인데 비해서 아직 그 영향력은 위력적이지는 않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확대해 나갈 것인지가 고민 사항이죠. 근대 협동조합은 시장에서 자본과 경쟁하였고, 자본과 똑같이 욕망 충족의 협동을 추구했습니다. 그래서 근대 협동조합은 성공과 파멸의 역사입니다. 근데 무위당은 자연과 공생하고, 이웃과 공생하는 협동조합을 말했습니다. 그래서 <한살림>이 자연과 공생하는 일로서 유기농업과 농업살림운동, 환경운동을 하고, 이웃과 공생하는 측면에서 모든 거래를 농업공동체, 소비자공동체 지향을 갖고 일을 하는 것이죠. 원주는 이를 그대로 지역사회에 확장하는 과정입니다. 유기농업공동체, 의료공동체, 건축공동체, 언어치료공동체, 음악공동체 등 다양한 협동조합을 통해서 필요를 자본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들이 자치하면서 나누어 구하는 것이죠. 이렇게 30년 정도 지나 지역 경제에서 30~50%를 담당한다면 아마 교육까지 바뀌지 않을까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학교 교육, 교과 내용도 바뀔 수 있다라는 것이죠.
원주에서 협동조합이 오래 남았던 이유는 사상가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외국도 마찬가지입니다. 스승들이 있어 지속가능하였던 것이죠. 아울러 협동조합은 활동성, 지각, 사상의 틀이 같은 길을 가야만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상처받고 멀어지기 쉽습니다. 생각보다 공동체는 어렵고 고단한 길입니다. 하지만 한번 발을 들이고 그 길을 가면 삶의 무게가 단단해진다라고 할까요... 아무튼 공동체는 오래가지 않으면 아무 소용없습니다. 사라지고 나면 다시 유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원주도 마찬가지이죠.
Q. 생명평화사상과 중도의 삶, 경계인의 삶이 어떻게 연결되고 설명되는지를 듣고 싶습니다.
A. 중도는 정말 어렵습니다. 그리고 중도는 중간이 아닙니다. 중도는 여차 잘못하면 곧바로 기회주의자가 될 수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현실에서 중도란 없다고 생각합니다. 중도의 길처럼 보이는 것도 실상 자세히 보면 중도가 아닌, 사람일이기에 중도처럼 보이는 '도리'일 뿐이죠. 무위당은 어느 순간 투쟁가들이 가진 아집과 독선을 보신 듯합니다. 지난한 투쟁 속에 운동가들이 가질 수 있는 교만함, 자신들의 지난 과거가 그 교만함 때문에 하루 아침에 무너지는 것이죠. 그래서 선생님이 이때 중도 얘기를 했던 듯합니다. 생명평화라는 것도, 무위당은 생명평화 용어를 쓰지 않았습니다. 김지하가 처음 말했고 도법 스님이 확대한 것이죠. 무위당이 바라보는 생명은, 세상의 아주 작은 미물도 온 우주가 만든 것이기에 경건하게 모셔라, 하물며 적도 온 우주의 선물이기에 상대를 미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싸우지 말라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교만하지 말라. 상대의 본질까지 끝까지 미워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Q. 무위당을 잘 알지 못한 상태에서 배우는 입장입니다. 원주에는 다른 지역보다 조합이 많은 것으로 들었습니다. 훗날 일반적인 학교 시스템까지 바뀔 전망이 있을 정도로... . 다른 지역 또한 그렇게 될 수도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그래서 이론만이 아닌, 행동하고 실천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인 것이라 생각합니다. 그런데 협동조합의 가치가 고귀함에도 불구하고 원주시민 모두가 조합원은 아닐 것입니다. 비조합원 같은 경우는 조합원에 대해, 일종의 패거리처럼 인식하여 배타적인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모두는 안고가야 할 숙제인 듯 한데, 이 부분을 해소시키고 있거나 조화를 이루고자 하는 노력이 있다면 그에 대해 듣고 싶습니다.
A. 큰 강물은 한 방울 물에서 시작합니다. 모든 일이나 자연의 섭리도 작은 일에서 시작하는 것이죠. 원주 협동운동도 처음 몇사람이 시작했어요. <한살림>도 37명이 시작했죠. 지금 전국적으로 52만이 되었고, 원주도 4만 정도이구요. 협동조합은, 협동조합법이 발의되기 되기 전부터 원주는 계속 이 일을 해왔습니다. 하나의 협동조합을 키워온 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필요한 다양한 영역에서 협동조합을 만들기 위해 노력해온 것이죠. 협동조합에 참여하는 인구가 그래서 늘어난 것입니다. 늘어나다보니까 27개 조합에 4만 명까지 된 것이죠. 더욱 커가는 협동조합도 있겠죠. 하지만 그보다는 다른 영역에서 계속 협동조합이 생겨나야겠죠. 협동운동은 성장의 운동이 아닌 확장의 운동이라고 생각합니다. 협동조합교육을 통해 활동가를 끊임없이 양성하고, 주민교육을 계속 하고, 필요한 것이 있으면 협동조합 경제 내에서 상담해주고, 조합에 대한 교육도 하고, 경영 컨설팅을 해주면서 협동조합을 계속 늘려가는 과정, 이게 협동운동 확장의 과정이라고 이해해 주셨으면 합니다.
Q. 무위당 말씀은 참 알쏭달쏭한 말씀이 많습니다. 꽃 속에 천지가 있다, 니가 나다 등이 그렇습니다. 선승들이 커다란 깨달음을 얻고 나서 하는 말씀처럼 여겨집니다. 무위당의 삶 속에서 커다란 깨달음을 얻는 계기가 있어서, 아니면 평소 생각하고 수련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큰 통찰이 있었기에 이런 말씀을 하셨는지가 궁금합니다.
A. 투옥 기간 중 깨달음을 얻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투옥 이후 작품 세계에서 그런 식의 선문답 작품이 나온 것이 그렇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이 감옥에 있을 때, 창문에 밥 한술을 놓으면 새들이 와서 먹는 동안 새들과 대화하고, 새들이 똥을 싸고 나면 나중에 민들레가 피어났는데 그 민들레와 잡초와 대화를 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사물하고 대화할 수 있게 된 감옥에서 큰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합니다. 선생님의 작품 중에는 확실히 선문답이 많이 나옵니다.
불치후학문(不恥後學問). 무위당 선생님은 후학들에게 물어보는 것을 부끄러워 하지 않으셨죠. 이처럼 끊임없이 깨어있는 과정이 장일순 사상과 삶을 이루고 있지 않나 싶습니다.
Q. <한살림>에 오는 사람들을 보면 <한살림>이 협동조합운동의 하나일까하는 의문을 가질 정도입니다. 암튼 각자 개인 생활 속에서 협동운동을 어떻게 해야하는지 말씀 듣고자 합니다.
A. <한살림> 조합원 중 생명운동을 하고자 찾아온 분은 적을 것입니다. 자기 아이 먹거리 걱정 때문에 <한살림>을 찾고 <아이쿱>을 찾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를 나쁘게 보거나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그것은 그 시대에서 요구하는 것입니다. 먹거리에 대한 고민은 신뢰가 무너진 것이기 때문이죠. 그냥 그대로 받아들이면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무위당 선생님은 “<한살림>은 유기농을 위한 것이 아니다. 한살림 옆에 농약을 친 쌀이 있으면 그것 또한 네 이웃이다. 그것도 사줘라. 끊임없이 껴안아라.”라고 말씀했습니다. <한살림>에 오는 사람을 구분할 필요할 없다고 생각합니다. 찾아왔으면 한단계씩 얘기하면 됩니다. 급하게 서두를 필요가 없습니다. 무위당은 상당히 감성적이었고 부드러운 분이었습니다. 어찌보면 한사람씩 ‘꼬시는’ 것이죠. 세상에 크게 소리 질러 이슈화하기 보다는 옆에서 감동 받게 하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넘쳐나면 그 향기가 퍼지기 마련이죠.
시인도 시간이 너무 많이 지나니 급한 마음이 들었나봅니다. 무한한 시간의 허리를 손으로 움켜잡아 매듭을 짓습니다. 그 매듭은 조만간 다시 풀려 우리는 또다른 시간과 만나겠지요. 시인은 <무위당 장일순의 작품이야기>에서 모두 함께 다시 만날 때까지 ‘한참을 두리번’거릴 듯합니다.
...
그 꽃은 세상의 비와 바람을 다 맞았고
꽃을 피워 봄이 되었고
벌과 나비의 양식이 되었고
씨를 맺어 생명을 잉태했다.
평생을 한 곳에서 한치도 움직이지 않았건만
스스로에게 또는 세상에게 하지 않은 것이 피었다.
나는 늙은이가 버리고 간 그 꽃을 주어들고
한참을 두리번거렸다.
첫댓글 얼마 전부터 관옥나무도서관과 함께한 안승호 군이 <무위당 장일순의 생명사상과 삶이야기> 자리에서 나눈 이야기를 정리해서 관옥나무도서관 까페에 올렸습니다. 배움터 까페로 스크랩합니다. 안승호 군에게 감사합니다..^^
아~~바람개비 친구분
고마우시기도 하지!!
그 날도 조명끄니깐 안 보이셔서 불빛찾아 자리 옮겨 다니며 열심히 메모하시더니..
그저 고마운 뿐이네요^^
와, 어쩜 이렇게 정리와 기록을..
고맙고 고맙습니다.
최고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