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51) 시상은 실마리에 불과하다/ 시인, 문학평론가 박현수
시상은 실마리에 불과하다
네이버블로그 http://blog.naver.com/hmook0005/ [강의][광고공부][카피라이터] HS애드 심의섭 카피님 _
① 광고 카피는 시가 아니다
하나의 시상을 얻었다면 한 편의 시를 창작할 준비가 된 셈이다.
그러나 애초에 떠오른 시상은 시에 있어서 하나의 실마리에 불과하다.
문득 떠오른 시상을 한 구절로 적어 놓았다고 해서 그것이 저절로 시가 되는 것은 아니다.
만약에 시가 시상 한 구절만으로 충분하다면 광고 카피 한 구절도 한 편의 완결된 시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다음과 같은 광고 카피를 보자.
그녀의 자전거가 내 마음속으로 들어왔다 ― 의류 브랜드 광고
아내는 여자보다 아름답다 ― 커피 광고
사랑은 움직이는 거야 ―휴대폰 광고
침대는 가구가 아닙니다. 침대는 과학입니다 ― 침대 광고
여기에 든 광고 카피는 광고계의 전설에 속할 정도로 유명한 것들이다.
그러나 어떤 성공적인 광고 카피도 간단한 언어적 표현만으로 성공을 거둘 수가 없다.
이 짧은 한 구절을 살리기 위한 배경 그림의 선택, 구도의 조정, 글자 모양과 크기, 적절한 상황 설정,
스토리 구성 등이 필수적이다.
어떻게 보면 이 구절보다 그런 배후의 작업들이 더 중요하다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광고에서 이런 작업의 비중이 크다.
이런 말이 믿기지 않는다면 이 광고 파키 중에 별로 와 닿지 않는 것을 해당 광고를 찾아 감상해 보면 될 것이다. 이를 통해 기억할 것은 인상적인 구절도 중요하지만,
그것의 생명은 결국 주위의 의도적인 설정에 달린 것이라는 사실이다.
마찬가지로 한 편의 좋은 시를 창작하는 데 있어서,
인상적인 한 구절의 시상을 어떤 위치에 놓느냐,
어떻게 풀어 나가느냐 하는 언어적 조율이 가장 중요한 작업이라 할 수 있다.
시상은 시를 시작하게 하는 하나의 실마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이런 작업을 통해 애초의 시상이 그대로 한 편의 시로 완성되는 경우도 있지만,
애초의 의도와 달리 전개되는 경우도 많다.
② 인상적인 구절만으로는 시가 되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인상적인 구절이 들어 있는 부분만 떼어 놓아도 시가 될 수 없다.
물론 시에서 인상적인 구절이 중요하다.
한 편의 좋은 시를 읽고 나서, 한 편의 시 전체를 기억하는 독자는 없다.
보통 그 시의 인상적인 한 구절에 독자의 모든 마음이 가 있기 때문이다.
한 편의 시가 유명해지는 것도 이런 구절 때문이다.
그런 구절에는 그 시를 만들게 된 핵심적인 시상이 응축되어 있다.
사람들은 시를 읽으면서 그런 구절에 밑줄을 긋고 싶어 한다.
어떤 경우든지 시 전체를 밑줄 긋고 싶은 작품은 거의 없다고 보아야 한다.
그래서 시는 밑줄 그을 만한 구절을 가지고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작품의 성패가 결정된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이 기억하는 인상적인 구절은 주로 다음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이런 구절을 가지고 있지 못한 사람은 진실로 가난한 사람이라 할 수 있다.
시인으로서나 독자로서나.
거울 속의 나는 왼손잡이요
내 악수를 받을 줄 모르는… 악수를 모르는 왼손잡이요
―이상, 「거울」 부분
스물 세 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바람이다
―서정주, 「자화상」 부분
인생은 살기 어렵다는데
시가 이렇게 쉽게 씌어지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다
―윤동주, 「쉽게 씌어진 시」 부분
겨울은 강철로 된 무지갠가 보다
―이육사, 「절정」 부분
나는 지금 이 세상에 없는 계절이다
―김경주, 「부재중」 부분
나는 터널처럼 외로웠다. 새들은 나한테서 날아갔다.
―네루다, 「한 여자의 육체…」 부분
그리고 오월, 기차여행 중 한 조그만 역에서
까미쉰 간선철도의 열차시간표를 읽을 때
그것은 읽고 또 읽어도
성경보다 위대하나니.
―파스테르나크, 「마르부르그」 부분
시는 바로 이러한 한 구절을 통해 독자의 마음에 파문을 일으킨다.
시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보통 이와 같은 파문을 일으키지 못한 시는 좋은 시로서 한계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김수영 시의 한 구절이 일으킨 그 파문을 천양희 시인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비가 오고 있다
여보
움직이는 비애(悲哀)을 알고 있느냐
―김수영, 「비」 부분
“시를 쓰지 않으면 살아 있는 이유를 찾지 못할 때 시를 쓰라”(릴케)는 말 앞에서 오래 마음이 들리던 시절,
움직이는 비애란 말은 “내 속엔 언제나 비명이 살고 있다”(실비아 플라스)라는 구절과 함께
내 정신을 내리치는 죽비였다.
움직이는 비애가 내면을 훑고 지나갈 때 나는 시라는 위독한 병을 철저히 앓을 수 있었다.
정신의 지문 같은 이 한 구절은 내가 초극해야 할 또 다른 절망이며 시작(詩作)에 가해야 할 박차이다.
오늘도 시가 내게 묻는다. 움직이는 비애를 알고 있느냐고.
(천양희, 「내 속엔 언제나 비명이 살고 있다」, 『벼락치듯 나를 전율시킨 최고의 시구』(문학세계사, 2009. 147쪽)
어떤 의미를 지니지만, 따로 독립시켜 놓으면 시를 쓰기 위한 일시적인 메모로 보인다.
그래서 시상을 한 편의 완결된 작품으로 보이게 만드는 시적 조율이 필요한 것이다.
짧은 시건 긴 시건 완결된 느낌을 주는 시적 조율은 필수적이자.
■ 시 창작을 위한 토론
㉮ 다음은 윤제림 시인의 「예토(穢土)라서 꽃이 핀다」를 달리 보인 것이다.
㉠과 ㉡을 비교하여 어느 것이 하나의 작품으로 완결성을 지니고 있는지 설명해 보자.
㉠ 대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와 서너 살 사내아이
어린 남매가 나란히 앉아 똥을 눈다
먼저 일을 마친 동생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쳐든다
제 일도 못다 본 누나가
제 일은 미뤄두고 동생의 밑을 닦아준다
손으로
꽃잎 같은 손으로
㉡ 대여섯 살 먹은 여자아이와 서너 살 사내아이
어린 남매가 나란히 앉아 똥을 눈다
먼저 일을 마친 동생이 엉거주춤 엉덩이를 쳐든다
제 일도 못다 본 누나가
제 일은 미뤄두고 동생의 밑을 닦아준다
손으로
꽃잎 같은 손으로
안개가 걷히면서 망고나무 숲이 보인다
인도의 아침이다
㉯ 다음은 함민복 시인의 「가을」이라는 시에서 가져온 구절이다.
이 구절이 완성된 한 편의 시인지, 아니면 일부 구절인지에 대해 설명해 보자.
당신 생각을 켜놓은 채 잠이 들었습니다.
< ‘시 창작을 위한 레시피(박현수, 울력, 2015)’에서 옮겨 적음. (2021. 6. 8.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51) 시상은 실마리에 불과하다/ 시인, 문학평론가 박현수|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