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창작강의 - (254) 시인이 만들어낸 소리 - ③ 세상에 없는 소리를 듣다/ 시인 이형기
시인이 만들어낸 소리
Daum카페 http://cafe.daum.net/withgoodpoem/ 고등어 울음소리를 듣다 / 김경주
③ 세상에 없는 소리를 듣다
마음의 귀가 듣는 소리는 실재하지 않는다.
앞에 든 시의 ‘임의 말소리, 발소리, 대님 푸는 소리’가 되는 매미 울음소리
또한 실재하지 않는 상상의 소리이다.
그러므로 좋은 청각적 이미지를 만들기 위해 필요한 밝은 마음의 귀는
곧 청각적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의 몫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유치환의 시 〈깃발〉에 나오는
‘소리 없는 아우성’도 상상력이 만들어낸 실재하지 않는 소리의 예이다.
다닳은신끄는소리발가락의뼈마디부딪치는소리발가락해지는소리조용히옮아가뿔피리소리홍역을앓는뜨거운신음소리유년의숲
무성한미로를꺾어내는소리
목마를다듬는소리
가까이다가드는별똥별의어둠을긋는소리
화약냄새퍼뜨리며성냥을켜는소리
지지직어둠이타는소리살갗이타는소리
나를덮는모래소리시세알흐트러지는소리
피의살을드러낸의식의깊이귀를자르는소리
안닳은귀를종이에싸는소리
―박제천, 〈아홉 개의 환각 그 둘〉 부분
위 시는 박제천의 〈아홉 개의 환각 그 둘〉 중 일부이다.
앞부분의 3분의 1정도만 인용한 시에는 ‘소리’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그 부제 그대로 이 시는 수많은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그런 소리들 중에는 현실적인 소리도 있고 비현실적인 소리도 있다.
인용하지 않는 후반부에는 ‘어둠의무게를허무는소리’, ‘살갗의반점마다달빛이반짝이는소리’,
‘새벽노을소리’, ‘부끄러운알몸에덮여지는신앙의물소리’ 등 비현실적인 소리가 늘어나고 있다.
난해시의 유형에 속하는 이 시에 대해서 비판적인 견해를 가진 사람도 적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어떻게 평가하느냐를 떠나서 이 시가 의도적으로 수많은 소리를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할 만하다.
이 시는 소리 또한 시인의 창작 대상이라는 것을 분명히 증명하고 있다.
현실적인 것이든 비현실적인 것이든, 그런 소리들은 모두 보통의 귀로는 알아들을 수 없게 되어 있다.
보통의 귀가 아닌 마음의 귀, 즉 상상력이 함께 하는 귀어야만 알아들을 수 있는 소리이다.
그런 상상력이 발달한 사람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수한 소리를 듣기도 하고 만들기도 한다.
물론 당신도 상상력의 힘을 빌리면 그렇게 살 수 있다.
지금 세계의 어느 곳에서 누군가 울고 있다.
이유도 없이 울고 있는 그는
나를 위해 울고 있다.
지금 밤의 어느 곳에서 누군가 웃고 있다.
이유도 없이 웃고 있는 그는
나를 두고 웃고 있다.
―라이너 마리아 릴케, 〈엄숙한 시간〉 부분
이 시는 릴케의 〈엄숙한 시간〉 중 일부이다.
이 시는 우리에게 ‘울음’과 ‘웃음’의 두 가지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들려준다고 했지만 사실 그 소리는 ‘세계’와 ‘밤’의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서 들리는,
그러니까 실제로는 들리지 않는 소리이다. 시인의 상상력이 만들어낸 일종의 환청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20세기 전반의 세계적인 대시인 릴케는 그 상상의 소리를 듣는 때를 ‘엄숙한 시간’이라고 말하고 있다.
아닌 게 아니라 세계의 어딘가에는 언제나 우는 사람 또는 웃는 사람이 있을 것이다.
그들의 그 울음과 웃음을 남의 일이라고 외면하지 않고 자기 자신의 일로
받아들이는 사람이라면 인생에 대한 그 태도가 엄숙해지지 않을 수 없다.
또한 그때에는 분명 그 엄숙한 태도에 상응하는 깊이 있는 철학적 사고가 수반될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는 시인이 만들어낸 상상의 소리를 철학적 사고와도 연결된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다.
철학적 의미는 별것이 없고 성과도 신통치 않지만,
필자도 그동안 시를 쓰면서 나름대로 많은 관심을 기울여 몇 가지 소리를 만들어보았다.
아래 시에 나오는 소리는 그중의 하나이다.
누군가 목에 칼을 맞고 쓰러져 있다.
흥건하게 흘러 번진 피
그 자리에 바다만큼 침묵이 고여 있다.
지구 하나 그 속으로
꽃송이처럼 떨어져 간다.
그래도 아무 소리가 없는
오늘의 종말
실은 전 세계의 벙어리들이 일제히
무엇인가를 외쳐대고 있다
소리로 가공(加工)되기 이전의
원유(原油)같은 목청으로
―이형기, 〈황혼〉 전문
제목이 〈황혼〉인 이 작품에서 필자는 바다만큼 크게 고여 있는 침묵과
전 세계 벙어리들의 외침을 대비시켜 특수한 소리를 만들려고 했다.
물론 침묵에는 소리가 없다.
외침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벙어리의 외침이므로 전 세계의 벙어리를 다 모아봐도 역시 소리가 날 리 없다.
하지만 필자는 이 시에서 그 두 가지의 소리 없음을 맞세움으로써,
들리지는 않지만 간절하기 그지없는 소리의 그 청각적 이미지를 창출하고자 의도했다.
< ‘이형기 시인의 시쓰기 강의(이형기, 문학사상, 2020)’에서 옮겨 적음. (2021. 7. 9. 화룡이) >
[출처] 시창작강의 - (254) 시인이 만들어낸 소리 - ③ 세상에 없는 소리를 듣다/ 시인 이형기|작성자 화룡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