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理의 관점에서 본 진주향교의 인문학적 위치 조명
(진주향교 파워포인트 해설자료)
1. 진주향교의 지리적 특징
명리학(命理學)을 신봉하는 역학자(易學者)들이 진주향교의 위치를 보고 이구동성으로 명당이라 말한다.
명당(明堂)이란 흔히들 ‘氣’가 충만히 흐르는 곳을 말한다.
명리학에서 ‘기(氣)’를 정의하기를
‘만물의 생성, 성장, 소멸을 지배하는 원천적인 힘’으로 규정하고 있다.
풍수지리학(風水地理學)에서 명당을 말할 때 좌청룡우백호(左靑龍右白虎), 장풍득수(藏風得水) 즉, 바람은 품고 물을 얻는 곳, 배산임수(背山臨水) 즉, 산을 뒤에 두고 물을 앞에 대하고 있는 형세의 땅을 명당의 조건으로 본다. 이런 조건이 갖춰진 땅에는 ‘氣’가 충만하게 흐른다. 고 여긴다.
명리학에서 ‘기(氣)’를 설명할 때 ‘기(氣)는 바람을 만나면 흩어지고, 물을 만나면 머문다.’는 명제를 전제로 한다.
우리 진주 향교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명당중의 명당이 틀림없다.
진주향교 지세를 보면 뒤로는 비봉산이 병풍이 되어 기(氣)의 흩어짐을 막고, 앞으로는 남강물이 그 기(氣)를 모아 감싸 앉고 있는 형국이다.
신경준이 감수한 여지승람 산경표의 해설에 의하면 우리나라 천기(天氣)는 백두대간을 따라 흐르다가 정맥으로 이어지고 그 정맥에서 다시 지맥으로 이어져 우리나라 전 지역을 기(氣)로 감싼다. 고 했다.
부연해서 덧붙이면 백두산 천지가 천기(天氣)의 발생지가 되고, 그 천기가 백두대간을 따라 두류산(지리산)까지 이른 후 각 고을로 이어져 금수강산 곳곳에 다수의 명당을 잉태했다. 고 보는 것이다.
두류산(頭流山)은 백두산(白頭山)의 頭(자)자에 流(류)를 덧붙인 이름이다. 즉 백두산의 천기(天氣)가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소백산, 속리산, 덕유산을 거쳐 두류산으로 이어짐을 뜻한다.
백두대간 거리는 지도상으로 1,400km정도이지만 실제거리는 2,800km가 넘는다.
우리 진주지역은 낙남정맥(洛南正脈)에 이어져 있다.
낙남정맥은 백두대간인 지리산 영신봉에서 남하하여 하동, 진주, 마산, 창원을 거쳐 김해 낙동강하류 신어산까지 이어지는 산맥인데 거리는 약 232km 정도다.
낙남정맥(洛南正脈은 동북으로 임천강, 경호강, 남강과 낙동강을 경계하며 달린다.
신경준은 산맥과 강의 개념을 이렇게 정의했다. ‘강은 산을 넘지 못하고 산은 강을 건너지 못한다.’
우리지역의 낙남정맥(洛南正脈)은 묵계재, 백토재, 이명산, 솔티 고개, 내동 해맞이 고개, 와룡산, 여항산으로 이어졌다.
비봉산은 낙남정맥(洛南正脈)의 지맥이다.
진양호 레이크사이드 호텔 건너편 옛 귀곡동 소재 산이 황학산이다. 그 산줄기가 끝나는 지점이 호텔 맞은편인데 그곳에는 쉼터가 있다. 이름을 ‘꽃등실’이라 붙이고 ‘백두대간 끝지점’이라 돌에 새겨 두었다. 좀 과장된 표현이지만 이해는 간다.
낙남정맥이 이곳으로 이어져 있다.
신경준의 이론에 의하면 산은 강을 건널 수 없기에 여기를 끝 지점이라고 했으리라고 본다.
시간이 허락되면 황학산 등산을 권한다. 진수 대교를 건너 수곡 쪽으로 향하다가 삼거리에서 청동기 박물관 방향으로 1.5km 정도 가면 오른 쪽 편에 마을의 정자가 있다. 그 정자 옆으로 시멘트 포장길이 있는데 그 길을 한참 따라가다 보면 비포장도로로 변한다. 그래도 계속 진행해 가면 주차장이 있고 등산 안내도도 게시되어 있다. 그리고 등산로도 잘 정비되어 있다.
꽃등실에서 진양호를 내려다보면 오묘함을 느낄 수 있다.
진양호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에서 덕천강과 경호강이 만나 남강이라는 이름으로 바뀌게 된다.
남강(南江)은 진주 관아의 남쪽으로 흐른다고 남강이라 이름 지어졌다. 남강의 명칭은 진주에서 창녕 남지 두물 머리까지의 강을 말하고, 그 후 낙동강 본류와 합류하고부터는 낙동강으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덕천강(德川江)의 발원은 지리산(頭流山) 천왕봉 해발 1,915m 바로 남족 아래 있는 천왕샘과 1,806m의 제석봉에 있는 제석천, 1,750m의 장터목 아래 있는 산희샘에서 발원한 물로 보고 있다. 이 물들이 모여 법천 계곡이 되고, 여기에 지리산 중봉과 써리봉 사이에서 발원한 순두류 계곡 물이 합쳐져 중산리 계곡이 되는데 물의 수량이 많아 강의 면모를 띠기 시작한다. 여기에 다시 세석산장의 샘과 영신봉 아래 음양수샘에서 발원한 내대천과 고운동 계곡에서 흘러온 반천이 합류해 덕산에 이르는데 이때 대원사계곡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면서 덕천강이 된다. 이 강은 하동 옥종을 거쳐 진주 수곡, 사천 본촌을 마지막으로 진양호에 합류하게 된다.
경호강은 남덕유산 남쪽기슭 참샘이 발원지다. 거기에 북쪽의 바른골과 삿갓골 샘이 합류하고 화림동 계곡을 거쳐 백운산 계곡수와 만나 위천이 된다. 여기에 지리산 주릉 북쪽계곡인 심원계곡, 뱀사골, 백무동, 칠선계곡에서 발원한 물이 모이게 되면 수량이 더욱 풍부해 져 임천강이 된다. 이 강은 산청군 생초면에 이르면 남계와 합쳐 경호강으로 이름이 바뀐다.
덕천강은 지리산의 기(氣)를 머금고, 경호강은 덕유산의 기(氣)가 응결된 물이다.
그러기에 남강은 기(氣)가 충만한 강인 것이다.
우리 향교는 비봉산이 기(氣)를 감싸 앉고, 남강이 그 기(氣)의 응집을 돕고 있다.
2. 주역에 기술되어 있는 晉州(진주)의 의미
진주를 한자로 ‘晉州’로 적는다.
晉 : 나아갈 진 州 : 고을 주
주역 64괘중에서 35번째 괘가 ‘火地晉’괘인데 그 ‘晉’괘의 의미를 살펴보면 정말 흥미롭다.
上卦(상괘)는 불을 의미하는 ‘火’괘인데 본래의 괘명은 ‘離’괘다. 해가 하늘에 걸려 있는 현상이다. 下卦(하괘)는 ‘地’괘인데 본래의 괘명은 ‘坤’괘다. 땅을 의미한다.
‘火地晉’괘를 보고 文王(문왕)이 彖辭(단사)를 이렇게 썼다.
日出東嶺之象(일출동령지상) : 해가 동쪽 산봉우리에서 떠오르는 형상이고,
君臣相際之義(군신상제지의) : 임금과 신하가 만날 때 의로서 만난다. 로 풀이를 했다.
요약하면 충순한 신하가 명철한 임금 아래서 벼슬을 하는 괘다.
周公(주공)은 物不可以終壯(물불가이종장) 故受之以晉(고수지이진) : 만물은 영원토록 장성할 수 없다. 고로 나아가는 것이 이롭다. 라고 서괘에서 밝히고, 괘상은 日出於地(일출어지) 升而益明(승이익명) : 해가 지평선에서 떠오르는데 오를수록 더욱 밝아진다. 라고 괘상(卦象)에서 밝혔으며, 괘덕은 順而麗乎大明(순이려호대명) : 순종하는 신하가 현명한 군주 아래에서 능력을 인정받는다. 고 했다.
괘체에서는 柔進而上行(유진이상행) ; 유연한 생각을 가진 사람이 위쪽으로 나아간다. 고 해석을 했다.
공자는 十翼(십익)에서 ‘나아간다.’는 의미를 가진 괘가 셋인데 이른바 晉卦(진괘)와 升卦(승괘)와 漸卦(점괘)다. 속도 면에서 晉(진)이 첫째고, 升(승)이 다음이며, 漸(점)이 그 뒤를 잇는다. 고 했다. 晉(진)은 태양이 떠오르는 속도이고, 升(승)은 나무가 자라는 속도며, 漸(점)은 산위의 나무가 자라는 속도다.
굳이 주석을 덧붙인다면 ‘晉’괘의 의미가 인문학적으로는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시킨다. 벼슬길에 오르는 사람이 많다. 사람들이 의(義)롭다. 성격이 유순하다.
지정학적으로는 동쪽 발전 지향을 암시하고 있다.
우리 고장 진주는 三南人才半晉陽(삼남인재반진양)이라 말할 정도로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곳이었는데 진(晉)의 역 풀이와 맥을 같이 한다.
임진왜란 때 진주성 전투에서 의(義)를 다해 순절한 충신, 관군, 민초들의 항거정신과 의암 바위에 깃든 이야기도 주역의 진(晉)글자 역 풀이와 궤를 같이한다.
진주시가 동쪽으로 발전해 나아가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라고 생각하면 홀로 웃지 않을 수가 없다.
3. 진주향교의 기능
향교의 문화적 기능은 유교의 문화 이념적 행사를 주로하는데 이를테면 춘추석전제와 삭망분향이 주행사이고, 부차적으로 향사와 양로례가 거행되었으며, 또 과거에는 사직제, 기우제, 성황제도 향교에서 지냈다.
향교의 교육 기능은 유학을 공부시키는 관학교육기관으로 오늘날 국립 중ㆍ고등학교에 해당한다.
향(鄕)은 일반적으로 수도를 제외한 지방을 지칭하는 말이므로 지방의 학교인 셈이다.
그 외에도 국가의 주요 정책을 국민들에게 전하는 홍보기능도 함께 수행했다.
향교와 오늘 날 교육기관과 비교하여 보면 도해와 같다.
우리나라 학교 기원은 삼국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고구려 태학이나 신라의 국학은 모두 관학의 성격을 띠고 있었는데 귀족자녀를 대상으로 하는 일종의 관리 양성 기관 역할을 했던 곳이다.
국도를 제외한 각 지방에 향당을 세운 것은 고려 이후이다.
고려 성종 6년(987년)에 전국 12목(양주, 광주, 충주, 청주, 공주, 진주, 상주, 전주, 나주, 승주, 해주, 황주)에 학교를 세우고 경학박사를 배치하여 교육을 했는데 이렇게 함으로써 학교의 기틀이 마련되었다.
향교의 설립 배경은 과거제도 도입과도 관련이 있다.
고려 4대 임금 광종(9년) 958년에 후주(後周)에서 귀화한 쌍기(雙冀)라는 사람이 있었다. 광종은 그를 신뢰했다. 쌍기(雙冀)는 과거제도를 도입하여 인재를 선발한 후 그들을 관리로 임명할 것을 건의했는데 광종은 그것을 수용했다.
쌍기는 958년에 처음 실시한 과거에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시·부·송·책으로써 진사시 갑과(甲科)에서 최섬(崔暹) 등 2명과 명경과에서 3명, 잡과에서 2명을 선발했고. 그 뒤 광종 대에만 모두 8차례의 과거를 실시하여 39명의 급제자를 배출해 관리로 임명했는데 그 성과가 높았다.
성종은 응시자격을 전국의 군현에 까지 확대했는데, 인재 양성 방안의 하나로 전국 12목에 향학당을 설치한 것이다. 이때에는 제향기능은 없고 교육 기능만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 유교를 건국이념을 삼게 되었는데 이 때부터 문묘를 향교에 병행 설치하게 되었다. 그렇게 함으로써 제향기능을 병행하게 되었다.
진주향교의 약사를 시대별로 요약한 내용은 제시된 항목과 같기에 읽어보는 것으로 가름하는 것이 좋겠다.
진주향교 건물 배치 형식의 전체구조는 전학후묘(前學後廟)의 구조다. 즉 앞쪽은 교육기능 공간을, 건물의 뒤쪽은 향사기능 공간이 마련되어 있다.
외삼문(外三門)을 지나면, 교육기능 공간이 나타나고, 내삼문(內三門)을 지나면 향사기능 공간이 나타난다.
향교 출입은 각각 3개의 문으로 구성된 외삼문과 내삼문을 지나게 되는데, 세 개의 문중 가운데 문은 신(神)의 문이고 양쪽문은 사람이 출입하는 문이다. 오를 때는 오른 쪽 문으로 들어가고 내려올 때는 반대편 문을 이용함이 원칙이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234개의 향교가 있다.
대부분의 향교 문에는 다양한 태극 문양이 그려져 있다. 우리 진주 향교 문에도 그려져 있다.
성리학을 가르쳤던 국가 교육기관인 향교에 삼일태극과 음양태극 문양이 공존하고 있는 것은 성리학과 깊은 관련이 있다.
역(易)과 태극 문양을 관련지어 보면 이러한 사실관계를 유추할 수 있다.
향사기능 공간인 대성전은 문묘라고도 하는데 공자의 위패를 봉안하고, 또 향사하는 건물이다.
대성전이란 이름을 처음 사용한 사람은 송나라 휘종인데 우리나라도 그 이름을 따르고 있다.
진주향교의 경우 향사인물은 성균관과 궤를 같이한다.
대성지성문성왕인 공자를 정위로 하고, 4성이 배향하고 있다.
송조 2현과 우리나라 18현도 함께 종향하고 있는데 이른바 신라의 설총과 최치원, 고려의 안향과 정몽주, 조선의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조헌, 송시열, 송길준, 김장생, 김집, 박세채 등 18현이다.
선성현봉안위차도는 보시는 바와 같다.
나라별 시대별로 다른 색깔로 표시했다.
대성전 좌우에 동무와 서무가 있는데 제례의 보조 건물에 해당한다. 이곳에는 과거에 종향되었던 선현들의 위패도 보존되어 있다.
실제로 강학이 이뤄졌던 곳은 명륜당이다.
명륜(明倫)’이란 인간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으로, 「맹자」 등문공편(滕文公篇)에 “학교를 세워 교육을 행함은 모두 인륜을 밝히는 것이다.”라 한 데서 유래했다. 즉 인륜의 대도 교육을 의미한다.
사교당은 명륜당과 함께 강학이 이루어지는 공간으로 유생들이 직접 수학했던 공간인데 오늘 날 강당에 해당된다.
사교당의 기능에 대해서는 1449년 좌의정 하연이 지은 진주향교 사교당기에 잘 나타나 있다.
공자께서 네 가지로 사람을 가르쳤으니, ‘글(文)을 배우고 행실(行)을 닦는 것으로 사람을 가르치되, 진실함(忠)과 신의(信)를 마음속에 간직하도록 하셨다. 이는 곧 정심과 수신이 치국평천하의 근본임을 말한 것이다.’
동재와 서재는 유생들이 일상생활을 하던 공간이었다. 요즈음 용어로 기숙사에 해당한다.
설립 초기에는 평민 자녀와 양반 자녀 구분 없이 함께 생활을 했는데 후기에 이르러서 양반자제는 동재에, 평민 자제는 서재에 거쳐했다.
외삼문 격인 풍화루 현판의 글씨는 默齋 李文健선생이 쓴 글이다.
풍화루의 의미 설명을 중수기에는 ‘성인의 교화는 지극히 묘하고 신성하여 당세의 덕화가 후세에까지 전하기를 바람’이라 기록되어 있다.
의미를 덧붙이면 논어 안연편에 ‘君子之德風 小人之德草 草上之風必偃’
군자의 덕은 바람이요, 소인의 덕은 초라, 풀 위로 바람이 불면 반드시 바람부는 방향으로 눕게 된다.
해석하면 군자의 덕으로서 일반인들을 교화함을 함축하고 있다.
사실 향교의 운영을 위해서는 국가의 재정적 지원이 필요했다. 교사(敎舍) 등 시설물 관리 교수관의 후생비 교생들의 숙식비 등 비용이 실로 많이 소요되었는데 수령의 책임아래 운영되었던 관계로 수령의 능력에 따라 운영 면에서 차이가 컸다.
향교에서 교육기능이 없어지고 제향기능만 남게 된 계기는 1894년 갑오개혁 때문이다.
갑오개혁으로 인해 과거제도가 없어졌다. 또 반상의 신분차도 없어졌다. 그리고 소학교령(小學校令)이 반포되었다. 교육의 기회가 균등해진 것이다. 자연스럽게 교육기능이 없어졌다.
근래에 들어 사회적으로 아미노 현상이 만연해 전통적인 가치관의 회복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우리 진주향교는 진주시청을 비롯한 여러 유관 기관의 도움으로 다양한 강좌를 개최함으로서 전통문화의 계승발전에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이를테면 유림들을 위한 경서와 교양강좌, 학생들을 위한 인성교육, 유아들을 위한 예절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성과가 높다. 덧붙여 옛 조상들이 문화유산으로 남긴 행사를 재연함으로써 조상들의 지혜를 다시 생각해 보는 계기도 된다.
현재는 과거를 포함하고 있고, 또 미래를 배태하는 원천이다.
과거는 단절된 역사가 아니고 미래를 예측할 수 있는 척도이기에 전통교육에 관심을 가져야 함은 당연한 일이다.